배움에 대하여

끝이 없는 길

by 비마

무엇인가 배운다는 일은 매우 지난한 작업인데, 내가 보기에 이 작업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길지 않은 인생을 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배우는데 썼고, 앞으로도 계속 배우는데 시간을 할당해야 한다. 결국 인생이란 것이 무엇인가를 계속 배우다가 끝나는 것 같다. 배우고 그 배운 것을 익히면서, 또 배우고 또 익히고...


끝이 없다. 계속 굴러내리는 바위를 계속 산 위로 굴려 올라갔던 시지프스가 떠오른다. 내가 공부하고, 경험하면서 배우고 알게된 것들, 그리고 끝없는 연습을 통해 잘 할 수 있게된 기술들.. 이런 것들을 자식들에게 모두 한꺼번에 전수해줄 수 없을까. 그러면 자식들은 내가 성취한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그런 것이 불가능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공부를 어떻게 해왔을까. 어렸을 때에는 아무것도 모른채 그저 남들이 하니까 따라서 했다. 학교도 남들이 가니까 나도 가고, 과외공부도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하게됐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1960년대 후반은 한국이 아주 못살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악기를 배우는 것은 그 동네에서 첫째나 둘째가는 부자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니, 공부 즉, 국어, 산수 이런 것들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초등학교 6년을 다니는 것이 너무 지루해서 어쩌면 내가 평생 초등학교만 다니다 죽는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학교는 좋아서 다녔다기 보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면 가야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다녔다. 한 학급에 70명 정도였기 때문에 선생님이 나의 장점을 잘 보고 가능성을 얘기해준다던가, "너는 노래를 잘 하니까 음악쪽으로 가봐"라는 말을 한다던가 하는 것은 애시당초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런데 내 옆에 앉는 짝들을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도 했다. 정순이라는 예쁘게 생긴 여자 아이는 수업시간에 내가 일어나서 책을 소리내어 읽을 때 내 엉덩이를 찰싹 때리며 "엉덩이가 이쁘게 생겼어"라고 말했다. 예쁜 여자아이가 그렇게 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 조성남이라는 짝은 앞니가 이상하게 잘라져 있었는데, 그것이 그애가 웃을때 독특한 표정, 좀 시니컬한 표정을 만들어냈다. 마치 `짜식이.. 놀고 있네'라고 비웃으며 말하는 듯 했다. 그는 나중에 정신과 의사가 됐다.


초등학교는 국어 산수같은 과목보다 교실에서 다른 아이들을 구경하며 느끼고 배우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작정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언젠가 담임선생님이 가르치는 과외공부를 마치고 밤 10시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불이 켜져 있는 만화가게에 들어가 혼자 낄낄거리며 시간가는줄 모르고 만화책을 읽었다. 내가 무슨 변고를 당한줄 알고 나를 찾아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메이던 아버지가 만화방에 들어와 나를 끌고 집으로 갔다. 그날 평생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따귀라는 걸 맞아봤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아버지의 심정과 행동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학교공부는 만화책같은 재미가 없었다. 학교 공부는 나에게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저 막연히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 뭔가를 내가 배워야 하며, 그것도 잘 배워서 시험을 잘 봐야 나중에 엄마 아빠가 나를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뿐이었다. 흥미라는 건 애시당초 없었다.


그때는 중학교 입시가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너는 인천에서 두번째로 좋은 중학교에 시험을 봐라"라고 말씀하셔서 상인천중학교에 시험을 봤다. 그러나, 별 목적의식이 없던 나는 나의 인생 첫 입학시험에서 보기좋게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담임선생님은 "야, 너 어떻게 된거야?"라고 인상을 쓰며 물었고, 부모님은 내가 처음보는 실망의 표정을 지으시며 한숨만 쉬시었다. 결국 2차(후기)로 송도중학교에 입학했다.


왜 그랬을까? 나는 왜 중학교 입시에서 고배를 마셨을까? 아마도 공부에 재미를 붙이지 못해서 그러지 않았을까? 그저 남들이 하니까 나도 마지못해 하고, 부모님이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공부였다. 너무 순진하게 학교를 다녔다. 그러다가 그 지겹던 초등학교 6학년도 어느덧 끝이났다. 그리고 사춘기를 겪어야할 중고등학교 시절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내가 배워야 하는 과목들이 많이 분화되고 추가되었는데, 그중에 영어와 물리, 생물, 화학 이런 것들이 있었다. 기술이나 가정 과목도 있었던 것 같다. 영어는 처음 접하는 것이었는데도 별로 어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저 선생님이 가르쳐주시는대로 이해는 되었다. 그리고, 특히 물리는 마찰이라던가, 속도라던가 이런 개념들이 신기했고, 생물도 특히 유성생식, 무성생식 이런 용어들이 인상에 남았다. 특히 생물 선생님은 무성생식을 설명하면서 "만일 성경이 사실을 기록한 것이라면 (무성생식으로 태어난) 예수님은 생식능력이 없었을 거야"라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 그 말이 유성생식이나 무성생식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했다.


그렇게 가끔씩 나의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는 계기는 있었으나,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았다. 중학교때 내가 가장 많이 배운 것은 무협소설에 나오는 인간관계였다. 요즘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에 빠지듯 나는 그때 중국 (또는 대만) 무협소설에 빠져 있었으며, 사실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무협소설에서 배운 것이 더 많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신뢰, 배신, 노력의 대가, 실력의 중요성 등등... 사실, 어쩔 수 없이 배워야 하는 것들보다, 자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하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야무지게 책상에 앉아서 몇시간이고 집중해서 공부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아니, 나중에 중산층으로라도 살려면 그렇게 해야한다는 걸 몰랐다. 대신, 내가 몇시간이고 집중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바로, 무협소설을 읽는 것과, 세계문학전집에 있는 온갖 고전을 읽는 것이었다. 부모님은 빠듯한 생활경제 속에서도,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했다고 주장하는 책 외판원의 꼬임에 빠져, 아니면 자식이 책을 많이 읽어 훌륭한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는 바램으로, 세계의 온갖 고전 소설과 희곡과 시를 수록한 50여권 짜리 세계문학전집과 이광수, 황순원, 현진건 등이 나오는 50권짜리 한국문학전집을 월부로 사서 내 방에 들여놓으셨다.


나는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해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싸구려 무협소설이든 인류가 자랑스럽게 대대손손이 전하는 고전이든, 이런 책들을 읽는 과정에서 나는 무한한 즐거움을 발견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미치도록 재미있는 일을 발견한 것이다. 책 읽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나는 나중에 소설가가 되고 말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고등학교때 다른 과목은 공부를 안해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냈지만, 이상하게도 국어는 공부를 하지 않는데도 항상 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었다. 바로 많이 읽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내 속에 많은 내공, 즉, 저력이 쌓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고려대 국문과를 떨어지고 재수를 할 때에도 나는 그저 소설을 읽거나, 낡아서 누가 버린 기타를 줏어다가 치곤했다. 그 당시에는 혼자 기타치며 노래하는 것이 정말 부러운 기술이었다. 기타를 잘 치고 싶어 `피크기타 교본'이라는 책을 사다가 독학을 했다. 중학교때부터 친구의 기타를 빌려서 쳐보긴 했다. 그러다 재수, 삼수를 할 때 본격적으로 독학을 한 것 같다.


어느날 녹음기능이 있는 라디오로 음악방송을 듣다가 우연히 통기타 전주가 근사하게 나오는 노래를 접하게됐다. 바로 녹음버튼을 눌렀다. 그 노래는 처음듣는 노래였고 3절까지 있었다. 제목은 "아야 우지마라"였다. 나중에, 몇십년이 지난 뒤에야 그 노래가 연세대 재학생이던 박두호라는 사람이 작사 작곡을 했고, 박정희 정권에서 금지곡이 되어 악보를 구할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튼, 나는 그 곡을 반드시 기타를 반주하며 노래를 부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채보를 하기 시작했다. 오선지를 그리고, 노래를 수백번 반복해서 들으며, 오선지 위에 콩나물대가리를 그렸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고등학교때 음악선생님이신 신만영선생님 덕분이었다. 선생님이 음악 기초를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그 정도 채보는 할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다른 과목과 달리 선생님의 음악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았었다. 그렇게 그린 악보에 이 코드 저 코드 쳐보다 비슷한 코드를 붙였고, 아르페지오 반주법을 그대로 따라 흉내냈다. 그때의 열정이 지금은 없다. 그러나 오십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그 노래는 외워서 기타를 치고 노래할 줄 안다. 그래서 뭐든지 어렸을때 시작해야 한다고 하나보다.


온갖 고전을 읽는 것 말고도 재수하면서 했던 쓸데없는 작업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세계의 고전을 읽으면서 책 맨 앞장에 나와있던 그 거장들의 얼굴 사진들을 하나하나 A4용지에 그려서 내 방 벽에 더덕더덕 붙였던 것이다. 내가봐도 책에 있는 사진들과 비슷해서 스스로 뿌듯해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당시 음악과 미술, 문학 등이 바로 나의 갈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대학 입시에 도움이 안되는 엉뚱한 짓만 했으니, 대학에 합격할 리가 없었다. 결국 4수까지 하다 군대를 가서 33개월을 복무하고 난 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회가 학벌없는 젊은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뼈아프게 알게된 것이다. 육군행정학교에서 두달간 간담이 서늘해지는 엄격한 헌병교육을 받았다. 그런 뒤 대졸자들은 서울의 육군본부나 수도경비사령부로 발령을 받았는데, 고졸자들은 대부분 전방부대로 가야 했다. 전방부대에서도 대졸자들은 편한 보직을 받았고, 고졸자였던 나는 순찰병으로 탈영병을 잡고, 검문소에서 교통정리를 하고, 때로는 목숨 걸고 탈영병과 총격전을 벌여야 했다. 전역을 불과 10개월 남기고 와수리에서 총기탈영병과 총격전을 벌인 뒤에는, 정말 나의 인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이러다 죽는다면 결과적으로 내 인생은 무엇일까. 개죽음이 아닐까. 군대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학벌이 있어야 사회에서 대우를 받는다"는 것,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제대후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공부를 해서 고려대학교 영어교육과에 들어갔다. 고교 졸업후 7년만이었다. 197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82년이었다. 75학번이던 고교동기가 나름대로 방황을 한 끝에 아직도 중문과에 다니고 있었다. 그때 나는 스물여섯살. "죽기살기로 공부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하루 13시간씩 15개월 동안 대학입시 준비를 했다는 것을 말한다. 눈을 뜨면 책을 보고있어야 했다. 나중에는 눈이 너무 아파 이러다 실명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그 뒤로 공부가 가장 쉬운 것임을 알게됐다. 누구나 거기에 시간과 집중력만 투자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체득한 것이다. 사실 내가 좋아했던 음악, 미술, 문학이 가장 어려운 분야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분야는 시간과 집중력 외에도 재능이라는 것이 필요했다. 그리고 재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컸다.


대학에서 배운 것은 전공이 영어교육학이었으므로, 영어와 문학을 기본으로 배우고 혼자서 사회과학 관련 서적도 읽었다. 내가 잃은 시간 만큼 -- 사실, 잃어버린 것은 아니고 그만큼 다른 것을 얻는 시간이었지만 -- 따라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대학시절은 너무 빨리 지나갔던 것 같다. 3학년부터는 기자시험 공부를 하느라 바빴다. 언론사에 입사한 뒤에는 시간이 그야말로 쏜살같이 날아갔다. 고맙게도, 삼성언론재단의 지원을 받아 미국 시러큐스대학에서 공부하며 석사학위를 따기도 했다. 물론 논문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계속 고쳐야 했고, 다시 시러큐스에 가서 "논문 방어(Thesis Defense)"도 해야 했다. 내가 학벌콤플렉스가 심했나보다. 다른 기자들은 그저 골프나 치다 오는 언론재단 연수에서 나는 죽자사자 공부해서 학위를 땄다. 후배들이 지금도 내가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며, 농반진반으로 나를 원망한다. 아무튼 그 뒤에 워싱턴특파원으로 부임해서 3년간 미국의 시스템에 대해 몸으로 부딪치며 배웠다. 선진국의 정치 사회 언론 시스템을 오랜 시간 몸으로 배울 기회가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물론, 기자생활 전반을 통해 글쓰는 훈련을 계속해야 했던 것도 행운이다. 지금도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어쨌든 글을 시작할 엄두는 낸다.


그렇게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 정년퇴직이란 것을 하게됐다. 2015년이었다. 그런데, 내가 정년퇴직전 10년간 배운 일이 또하나 있었다. 바로 피아노였다. 워싱턴특파원에서 서울로 귀임한 뒤, 이런 저런 이유로 한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점심시간에 특별히 할 일이 없었으므로, 과거 일년 배우다 그만뒀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했다. 점심 빨리 먹고 하루에 30분씩 피아노를 두드렸다. 별로 발전은 없었다. 그렇게 연습해서 발전이 있을리 없었다. 정년퇴직을 일년 앞두고, 하루에 3시간씩 연습을 했다. 그리고, 정년퇴직하던 달에 첫번째 연주회를 했다. 정년퇴직 기념 연주회였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면, 내가 중고등학교때 낡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했던 것이 피아노를 배우는데 도움을 주었다. 악보를 이해했고, 박자를 이해했고, 음정을 이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피아노를 배우는데 큰 도움이 됐다. 마치 스티브잡스가 얘기했던 것처럼 '과거의 점들을 지금의 어떤 점과 연결'하게 됐던 것이다. 피아노라는 점과 과거의 기타라는 점을 연결시킨 것이다. 영어로는 Connecting the dots. 그리고, 중고등학교때 읽은 소설과 희곡들, 시들도 나의 기자 시절 기사작성에 많은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역시 점들을 연결한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기자로서의 일이 아니다. 바로 취미인 기타, 피아노, 노래, 그리고 스토리다. 문학적 스토리이건, 미국 드라마의 스토리이건 스토리에 빠져든다. 앞으로 내가 몇년을 더 살 지 모른다. 마라톤을 했으니, 어느정도 장수를 하리라는 기대는 한다. 내가 건강하게 사는 동안 즐길 수 있는 일을 즐기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나에게 행운이다. 물론, 다른 방식으로 나의 경험을 통해 이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역시 의미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섣불리 내가 사회에 기여하겠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그것이 사회에 또하나의 소음이 되고, 또하나의 민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배운다는 작업은 끝이 없다. 지금은 성악을 배우고 있다. 노래를 제대로 불러보고 싶어서이다. 영어도 완벽하지 않다. 자막을 보지 않고, 미드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 역시 공부를 계속해야 한다. 피아노도 이미 15년을 배웠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기타도 마찬가지다. 뭐든 배워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 배워야 한다. 다만, 혼자서 배우면 발전이 더디고, 제대로 배우려면 프로한테 돈을 주고 배워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아무튼 나이가 들었다고 배우는 일을 포기한다면, 그저 그 정도 수준에서 살다가 가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배우려면 결코 오만해져서는 안된다. 겸손해야 한다.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항상 되뇌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배울 수 있다. 어느날 문득 인생이 무엇인가하고 자문하다가 "아, 인생은 끝없는 배움이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됐다. 결국 죽을 때까지 이 배움이라는 지난한 작업은 끝나지 않겠구나.(202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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