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과 둔감
매일 지하철을 탄다. 교대역 근처에 있는 피아노연습실까지 지하철을 타면 20분, 걸어가면 35분이 걸린다. 걸어가면 운동도 되고 좋지만, 피아노 연습을 위한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전철을 타는 경우가 많다. 교대역은 3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역이어서 유동인구가 많다. 전철에서 내려 출구까지 걷는데, 대개의 경우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걸어가야 한다.
며칠 전 교대역에서 내려 계단을 한참 올라간 뒤, 개찰구에서 경로우대 카드를 찍고 나가려고 했다. 오른쪽에서 두번째 개찰구로 나가려는 사람의 뒤를 따라가는데, 그 사람이 개찰구가 열리지 않아 두세번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오른쪽 개찰구에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방향을 틀어 그쪽으로 나가려고 했다. 카드를 한번 찍었는데, 열리지 않아 다시 시도하려고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앞으로 파고 들며 거칠게 나를 밀쳐내고, 먼저 개찰구를 빠져나갔다. 나는 어이가 없어 그를 잠시 바라보다, 개찰구를 나왔다. 그 사람은 나와 비슷한 60대로 보였고, 짧은 머리에 땅땅한 체격이었다. 옷차림으로 보건대, 교대 근처에 많은 변호사나 법무사 또는 그런 곳에 근무하는 화이트칼라는 아닌 듯 했다. 그는 화난 듯 빠른 걸음으로 출구쪽으로 가고 있었다. 짧은 순간에 본 인상이지만, 교육수준이 그리 높지 않고, 품성도 그리 좋지 않은 사람일 것 같았다.
"왜 그러지? 무지하게 빠쁜 사람인가?"
그런 일은 드물다. 사람들은 대개 차례대로 개찰구를 통과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그 정도의 교양은 있다. 그런데, 그는 왜 나를 밀쳐내면서까지 먼저 가려고 했을까. 그렇다고 정신이상자는 아닌 듯 했다.
궁금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걷다가 몇 분뒤 그럴 듯한 가설이 세워졌다.
"그 사람은 내 뒤에 오면서 당연히 비어있는 맨 오른쪽 개찰구로 나가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옆으로 나가려고 하던 내가 갑자기 오른쪽 개찰구로 방향을 틀어 나가려고 했던 것이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갑자기 방해꾼이 앞을 막은 것이다. 더욱이 내가 카드를 한번 찍었는데, 에러가 나서 다시 찍으려고 하니 더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나때문에 2-3초가 허비된 것이다. 그는 보복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밀쳐내고 먼저 나간 것이다. "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이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누군가가 나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뒤에서 나를 욕하거나, 나의 자존심이나 감정을 상하게 할 때, 또는 정신적, 물리적으로 해를 입히거나 할 때, 사람들은 보복을 생각한다. 그래서 범죄까지 저지르기도 한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지나가지만,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보복을 해야 직성이 풀린다. 아무튼, 보복심리는 우리의 행동을 조종하는 중요한 동력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왜 그 사람에게 보복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의 행동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말해, 보복을 할 정도로 나의 감정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또는, 그 사건을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둔감하게' 받아들였다고도 할 수 있다. 왜 그랬나. 그가 어떤 면에서는 `정상적이고' `교양있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과는 어떤 식으로든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 그리고, 설사 `보복'을 한다해도, 그것이 상대방의 더 큰 `보복'을 불러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조용히 지나간 것이다.
`둔감'해야 할 일에는 `둔감'해야 한다. 둔감해야 할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바보같은 일은 없다. 세상 모든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그만큼 피곤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