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혈도 예의가 필요하다
병원에 가서 하는 가장 흔한 일이 피를 뽑는 것, 이른바 채혈이다. 건강검진 기관에 가도 채혈이 가장 기본적인 절차다. 갑상선 호르몬을 체크하려고 해도 채혈, 혈당을 체크하려고 해도 채혈, 콜레스테롤 수치를 알려고 해도 채혈이다. 심지어는, 나도 스스로 아침마다 공복에 손가락에 피를 내어 혈당계로 혈당수치를 체크한다. 모든 것이 피로 해결된다. 피가 없으면 아무것도 모른다.
아침마다 혈당을 잴때 될 수 있는대로 적은 양의 혈액을 뽑아서 검사지에 묻히려고 노력한다. 피를 많이 뽑아봐야 좋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혈당계 제조회사들도 서로 "우리는 적은 양의 혈액으로도 정확한 혈당수치를 잴 수 있다"고 광고한다. 그래야 잘 팔리니까. 아침마다 혈당을 재기위해 많은 피를 몸에서 뽑아내야 한다면 아무래도 건강에 좋지는 않을 것이다.
병원에서도 가장 흔한 작업중 하나가 바로 채혈이다. 따라서 채혈하는 간호사들이, 사실 간호사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채혈실에 여러명 앉아있다. 내 번호가 가리키는 곳으로 가면서 속으로 기도한다. "제발, 피를 아프지 않게 최소량만 요령있게 뽑는 사람이기를..." 대개 그들은 내 팔뚝 윗쪽에 고무줄을 얽어매고, 팔이 접히는 부분에서 혈관을 찾아낸다. 그리고는 가늘지 않은 주사바늘을 꼽는다. 그리고 나는내 피가 그 바늘을 통해 채혈관으로 들어가는 걸 지켜본다. 별로 기분 좋은 장면은 아니다. 특히, 그 채혈통에 내 피가 필요 이상으로 꽉꽉 채워지는 걸 보면 기분이 매우 나빠진다.
나는 그 채혈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피를 뽑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일을 해줬으면 좋겠다. 자기 피라면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많이 뽑지도 않을 것이며, 자기 팔뚝이라면 주사 바늘도 그렇게 아프게 찌르지 않을 것이다.
종로의 어느 건강검진센터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있었다. 아직 퇴직 전이었으니, 아마도 10여년 쯤 전이었던 것 같다. 채혈 데스크에 앉아있던 여러명중 한 젊은 간호사가 내 피를 뽑게 됐다. 그런데, 그녀는 주사바늘을 여기 꽂았다가, 저기 꽂았다가 하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여러번-- 맹세코 10번은 넘었던 것 같다 -- 찔렀다 뺐다를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단 한마디도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표정에 최소한의 미안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람이 아닌 로봇을 상대로 혈관을 찾는 연습을 하는 듯 보였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혈관을 찾지 못해 당황하고 있는 모습이라도 보이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녀의 얼굴은 그저 무표정했다.
그때 옆에 앉아있던 간호사가 이 잔인한 상황을 파악하고 나에게 말했다. "야유, 죄송합니다." 그녀는 얼른 옆자리로 와서 자기가 대신 나의 채혈작업을 했다. 원래 채혈하려던 간호사는 뻘쭘하게 비켜섰다. 그녀는 마치 내 팔이 채혈 연습용 고무팔인 것처럼 여겼던 것 같다.
2년전쯤. 역시 같은 기관에서 콜레스테롤과 혈당을 3개월마다 체크하기 때문에 채혈을 했다. 그런데, 간호사는 주사바늘을 매우 아프게 찌른 뒤, 2개의 채혈통을 꽉꽉 채우고 있었다. 채혈 경험상 너무 많은 피를 뺀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그러다가 급기야 적지않은 양의 피를 책상에 흘리고 말았다. 내 피를 필요 이상으로 빼는 것도 모자라 흘러넘치게 뺀 것이다.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피를 너무 많이 뽑으시네요."
"무슨 검사죠?" 그녀는 대답대신 무심하게 물었다.
"혈당이랑 콜레스테롤이요."
혈당, 콜레스테롤 검사에 무슨 피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녀는 더이상 아무 말도 없었고, 피를 흘린데 대해 사과도 하지 않았다.
물론, 한두번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채혈때마다 실력있는 채혈사가 걸리기를 기도한다.
작년에 고대 안암병원에서 채혈을 했다.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6개월마다 채혈을 한 뒤 갑상선 호르몬제를 처방받는다. 약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채혈사앞에 앉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의 채혈사는 하나도 아프지 않게 주사바늘을 찔러 넣은 뒤, 너무 많지 않게 적당량의 혈액만을 뽑아내는 것 아닌가. 나는 감탄했다.
"어떻게 그렇게 하나도 안아프게 채혈을 하죠?"
그녀는 대답 대신 예쁜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나는 남의 피를 뽑는 일을 조심스럽게 하지 않거나, 혈관을 찾지못해 팔뚝 여기저기를 함부로 찌르는 사람들이 싫다. 물론, 어느 분야에나 실력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실력없는 채혈사라도 물론 나를 크게 해치는 사람은 아니니 어느정도는 참아줄 수 있다. 그래도, 최소한의 조심스러움과 예의를 갖춰 내 피를 뽑았으면 좋겠다. 피는 곧 나의 생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