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러큐스로 가는 길

(시러큐스 유학기.1996)

by 비마

워싱턴의 하숙집에서 휴일을 무료하게 보내고 있자니, 답답했다. 어디론가 자유롭게 다녀보고 싶었다. 미국이라는 드넓은 나라에 와서 좁은 울타리 속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사실,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이고,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곳이었다. 미국을 알기에 이곳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이다. IIE의 페이지도 “워싱턴은 대단한 도시 (Great City)이고, 세계의 중심도시인데 왜 굳이 시골로 먼저 가려고 하느냐”면서 “가면 분명히 따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도 “여기에 있어도 따분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숙집 생활은 역시 답답했고, 휴일에는 딱히 해야할 일도 없었다. 하루빨리 씨라큐즈라는 곳에서 혼자 정착하고 싶었다. 그곳에서도 미국의 편린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IIE와 ELS, 그리고 한국에 있는 언론재단에서도 내가 먼저 씨라큐즈로 가겠다고 하자 원하면 갈 수 있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7월말에 그곳에 가서 정착하려면, 미리 가서 아파트도 계약하고 담당교수도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7월13일.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기자들과 함께 차를 빌려 씨라큐즈로 출발했다. 아직 토러스를 사기 전이었다.


미국은 정말 큰 나라였다. 8시간 동안 쉬지않고 차를 달릴 수도 있고, 가도 가도 똑같은 길이 계속 펼쳐지는 나라였다. 동부에서 서부로 간다면 며칠동안도 쉬지않고 차를 달릴 수 있을 것이다. 가끔 자동차를 세우고 휴식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는데, 공기가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숨을 들이마시면, 온몸에 상쾌한 기운이 전달됐다.


단지, 여기를 봐도 저기를 봐도 흰 사람 아니면 검은 사람 뿐이었으니, 정 붙이기 어려운 낯선 이국땅임엔 분명했다.


최고 제한속도는 주에 따라 다르지만, 시속 55마일 (약 88킬로미터) 인 구간도 있었고 65마일 (105 킬로미터)인 구간도 있었다. 그런데, 희한하게 느낀 것은 제한속도를 지키는 차들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차들이 제한속도보다 10마일 정도 더 빨리 달리고 있었다. 나중에 본 한 통계는 3%의 차들만이 제한속도를 지키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아무튼, 나는 제한속도보다 약 4마일 정도 빠르게 달려보았다. 나중에는 이것이 버릇이 되어 항상 제한속도보다 4마일 정도 빠르게 달렸는데, 한 번도 속도위반으로 걸린 적이 없다. 길옆에 붙어있는 제한속도 표지판들은 “최저 제한속도”를 말하는게 아닌가 의심이 날 정도로, 대부분의 차들이 과속을 했다.


81번 도로를 지루하게 달려 드디어 씨라큐즈에 도착하는 순간,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작은 소도시였는데도 거리가 깨끗하고 아담하다는 느낌보다는 칙칙하고 거칠다는 느낌만을 받았다. 검붉은 색과 회색의 멋없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다. 워싱턴이 대단한 도시라면 이곳은 초라한 도시였다. 이런 곳에서 11개월을 보내야 하다니! 미국의 그 많은 대학들중에서 왜 하필 이 대학을 선택했을까!


씨라큐즈대학 캠퍼스도 그리 좋아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유명대학들보다도 더 작은 듯이 보였고, 학교 앞의 거리도 볼 것이 별로 없었다. 맥주집, 이발소, 옷가게, 서점등 일층짜리 상점들이 좁은 길을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학교 근처의 여관은 하루밤에 60불이나 됐다.


그런데, 저녁을 먹기위해 학교 앞의 음식점들을 살펴보다가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됐다. 한국어로 ‘딸기분식’이라고 씌여진 간판이 있었던 것이다. 음식점 안에는 한국학생들이 3-4명이 저녁을 먹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씨라큐즈대학에서 1년간 연수를 하게됐다고 설명하자, 언론대학원 (Newhouse School)에 다니는 학생을 전화로 불러주기까지 했다. 우리는 이 대학에도 300여명이나 되는 한국학생들이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여기도 한국사람 많아요.” 한 학생이 말했다. 뉴하우스, 즉 언론대학원에서 텔레비젼을 전공하고 있다는 이지연이라는 학생은 한국에서 어떤 기업의 홍보실에 있다가 유학을 왔다고 했다. 그녀는 뉴하우스는 미국내에서도 알아주는 언론대학원이라고 말해, 씨라큐즈대학의 겉모습에 실망한 우리를 달래주었다.


그날밤, 여관에서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한 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아내가 큰 병에 걸려 8월초에 수술을 받게 됐다는 것이었다. 일단 수술만 하면 완치된다고 의사들이 말하고 있지만, 어쨌든 내가 아내 곁에 있어야 했다.


나는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구한 뒤, 7월20일에 다시 토러스를 몰고 씨라큐즈로 와서 집을 계약했다. 돈만 있으면 집을 계약하는 것이 아니고, 재정보증서, 은행관계서류, 재직증명서등 많은 서류들이 필요했다. 한달에 452불이었으며, 거기에다가 보증금 100불까지 지불해야 했다. 그리고는 서둘러 워싱턴으로 돌아갔다.


7월26일. 다시 짐을 싣고 워싱턴에서 씨라큐즈로 와서, 대충 짐 정리를 해놓은 뒤, 그날밤 다시 워싱턴의 덜레스 공항으로 출발했다. 밤새 10시간을 달린 것이다. 커피를 잔뜩 마시고 11시쯤에 씨라큐즈를 출발했으나, 가는 도중 운전하다가 깜박 깜박 정신을 잃었다. 약 3시간을 그렇게 달린 뒤에는 아예 차를 길가에 세워놓고 1시간쯤 자야했다. 운전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이다.


그렇게 쉬기를 4번. 졸음운전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확인했다. 더욱이 몸집 크고 긴 트럭들이 지나갈 때면 부딪치지 않으려고 조심해야 했다. 등에 식은 땀이 배었다.


그렇게 피곤하게 운전한 덕분에 비행기를 탄 뒤 식사시간만 빼고는 14시간 동안 내내 잠을 잘 수 있었다.


언뜻 잠을 깨었을 때 창문아래로 노을을 보았다.


하늘에서 보는 노을은 또 다른 것이다. 태양이 밑에 있기 때문에 구름을 밑에서 물들이고 있었다. 붉은 빛과 노란 빛이 하얀 구름들의 구석구석을 짙게 또는 연하게 물들였다. 그 위를 비행기가 헤엄치듯 천천히 미끄러져 지나갔다.


그 빛은 인간이 만들어낸 다른 어떤 색의 빛 보다도 더 아름답고 영원했다. 그 속에는 인종도 없고, 규칙도 없고 법도 없었다. 노을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묵묵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것을 보는 나는 이유없는 증오와 대가없는 호의를 생각했고, 아쉬운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를 더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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