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4일. 다시 워싱턴에 도착해서 공항 주차장에 세워뒀던 토러스를 몰고 8시간을 북쪽으로 달렸다. 20일 동안 주차장 사용료는 100불. 하루에 5불씩이지만, 많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워싱턴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속에서 미국이 가까워짐에 따라 다시한번 불안감을 느꼈다. 역시 타국땅에서 혼자 생활하는 것은 고생이다. 한국에서 누렸던 사회적인 틀을 미국에서는 기대할 수 없다. 여기저기 얽혀있는 그 틀 속에서 나는 얼마나 안정된 생활을 누려왔는가. 그 모든 것이 일시에 사라지게 됐으니,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차라리 공항입국심사대에서 거절당해 한국으로 돌아갈 구실을 만들어줬으면 좋겠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것도 역시 안정과 성장이라는 논리를 적용할 수 있을 것같다. 성장에는 아픔이 따른다. 안정만 찾으면 현실에 안주하게 되고, 성장할 수 없다. 성장이란 다른 환경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발견하는 기회를 갖고, 사고의 틀을 넓게 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물론, 그 새로운환경은 자신에게는 불안정한 상황이다. 그 불안정한 상황을 안정된 상황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사고의 틀은 넓혀질 것이다. 그것은 도전과 응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어찌됐든, 1년을 견뎌보자는 심정으로 씨라큐즈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에서 침대와 가구들을 구해야 했다. 침대와 책상은 한 유학생의 도움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가는 어느 가정에서 얻을 수 있었다. 식탁과 의자는 신문 광고를 보고 헌 것을 50불에 사서 들여놓았다. 방안을 꾸미는 데는 워낙 소질이 없었지만, 그런대로 필요한 것들은 여기저기에서 얻어다가 들여놓았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식 주거방식을 약간은 알 수 있었다.
미국 가정의 특이한 점은 모두가 간접조명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워싱턴의 J특파원 집에 갔을 때에도 횃불 모양으로 방 한구석에 서 있는 등이 인상에 남아있었다. 그 등은 약 2미터 정도 되는 높이로 서 있는데, 빛이 천정과 벽에 반사돼 방을 밝히게 돼 있다. 전등의 불빛을 직접적으로 볼 일은 없게 돼 있었던 것이다. 내가 살았던 아파트의 거실이나 침실에는 한국처럼 천정에 등이 달려있지 않았다. 그것을 처음에는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했지만, K-마트에 가서 15달러를 주고 횃불형의 등을 사서 세워놓은 뒤에는 나도 차차 은은한 조명을 즐기게 됐다.
또하나의 특징은 모든 방이나 거실에는 카펫이 깔려있다는 것. 이곳 사람들은 그것을 카펫이라고 부르지 않고 러그 (rug)라고 부른다. 아무튼 집안 청소는 카펫의 먼지를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공청소기도 카펫의 종류에 따라 스위치를 조절하게 돼 있다.
미국사람들에게는 실내에서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 그러나 한국사람들은 누구나 집안에서는 신발을 벗는다. 바로 문화의 차이이다. 그런데, 집안에서 신발을 벗고 다니면, 카펫과의 마찰 때문에 양말이 빨리 닳는 것이 약간 불만사항이다. 한국에서 겨울양말 12켤레를 가져왔지만, 불과 3개월만에 대부분 발바닥이 닿는 부분이 뚫어져버려 양말을 다시 사야 했다.
아파트에는 냉장고와 접시닦는 기계, 가스 오브렌지등이 구비돼 있었기 때문에 살림살이를 장만하는 데는 그리 큰 돈이 들지는 않았다. 텔레비젼과 비디오, 전기밥솥, 청소기, 토스터등만 새로 사면 되었던 것이다. 씨라큐즈 생활을 시작할 준비는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 같다.
필요한 가구들을 아쉬운대로 다 장만하고 나서는 좀 여유가 생겼다. 미국이라는 나라, 씨라큐즈라는 도시에 대해 생각해 볼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다. 연수 초기에 어느정도 미국에 대한 개념을 정립해둘 필요도 있었다. 한국에 돌아갈 때 쯤 미국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바뀔 지도 궁금했다.
8월17일. 이제는 씨라큐즈라는 도시,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더 이상 겁이 나지 않았다. 이제는 어느 정도 적응이 된 것일까.
자유의 나라, 기회의 나라라고 일컬어지는 미국. 그러나, 거리의 건물과 사람들의 일상적인 분위기를 볼 때 미국은 ‘애늙은이’라고 부르고 싶다. 불과 2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미국은 너무나 빨리 발전해버려, 지금은 그 나름대로의 정해진 틀 속에 안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기가 세계제일의 강대국이며 따라서 자기들의 모든 체제가 세계제일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이 눈에 보인다.
그러나, 한국은 미국보다 엄청나게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이제서야 서서히 떠오르는 나라가 됐다. 한국의 근대화는 19세기 말에서야 시작됐지만, 일제의 식민지배, 3년간의 한국전쟁, 4.19혁명등 나름대로 수많은 풍상을 겪고 이제 도약하고 있다. 얼마나 빨리 도약하는 가가 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