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러큐스대 유학기 1996
나는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대학원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많았다. 대학원에서는 어떻게 공부를 하며, 얼마나 힘든 공부인가. 교수는 무엇을 가르치고, 학생은 무엇을 배우는가. 그래서 대학원 등록을 할 때에도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8월21일. 씨라큐즈대학의 학생증을 받았다. 학생증이라는 것이 그저 도서관에 출입할 수 있다는 것과 은행의 ‘학생구좌’를 열 수 있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만에 다시 이국땅의 대학원생으로 1년간 공부를 하게 됐다는 것도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다시 대학원 공부를 한다는 것을 생각이나 해봤는가. 아주 우연한 기회에 대학원에서 다시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학위를 받느냐 안 받느냐는 둘째문제이다. 인생은 배우는 과정이라고 한다. 배워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배우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배우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미국 대학원에서는 학기초에 수강 신청을 할 때 담당 지도교수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우리 연수생들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교수는 존 호텐슈타인이라는 독일계 교수였다. 그 전에 우리는 먼저 학교병원에 가서 홍역, 유행성 이하선염 (mumps), 풍진 (rubella) 등의 예방접종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예방접종 기록을 가져오면 예방접종을 면제받을 수 있다.
지도교수의 승인을 받는 데는 문제가 없었으나, 해당과목의 학과장 승인 (Waiver)을 받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신문 (American Newspapers)라는 과목을 신청했는데, 신문학과장이 이를 승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는 처음에는 “정규학생이 다 등록한 뒤 자리가 비면 받아주겠다”고 말하더니, 나중에는 “자리가 다 찼기 때문에 받아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규학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는 단지 단체 청강생에 불과했다.
사실, 기자들이 미국의 대학원에 와서 공부하면서 신문과목을 듣지 않으면 미국언론을 공부했다고 할 수 없다. 만일, 신문과목을 듣지 못한다면 무엇 때문에 비싼 돈을 들여가며 미국의 북쪽 한 구석에 있는 씨라큐즈라는 대학까지 왔나 하는 회의감마저 들었다. 텔레비젼이나 커뮤니케이션 관련 과목들을 신청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는데, 유독 신문과목만 등록을 제한하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신문학과장의 개성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지도교수인 호텐슈타인 교수는 “나로서도 어쩔 수 없다”면서 연수생들이 그냥 참고 조용히 다른 과목을 들어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그 교수의 무책임한 태도에 더욱 화가 치밀었다. 그가 만일 신문학과장과 얘기가 잘 통하는 사이였으면, 그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연수생들이 단체로 항의하자, 언론대학원의 루빈 (Rubin) 학장이 연수생들을 위한 세미나 시간에 들어왔다.
그는 세미나 시간에 신문과목의 강의를 넣겠다고 말하면서 그래도 미국학생들과 신문과목을 따로 듣고 싶은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다. 결국은 나 혼자 정규 신문과목을 신청했다. 그래서 나 혼자 그 과목을 듣게됐다. 그리고, 연수생 세미나 시간에 신문학과장이 직접 나와 두주일에 한 번씩 ‘미국신문’에 대해 강의하기로 합의가 됐다.
나는 처음에 그 신문학과장이 동양인들을 차별하는 줄 알고 분개했으나, 나중에는 그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흑인들을 포함한 여러 미국인 학생들로부터 그에 대한 평판을 수집했는데, 그리 부정적인 평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명문이라는 코넬대학을 졸업한 뒤 지방의 작은 신문사에서 15년간 기자생활을 하다가 씨라큐즈대학의 교수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왜 더 큰 신문사로 옮기지 않았느냐”고 묻자 “작은 신문사에서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가는 것이 큰 신문사로 옮기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기자생활도 좋아했지만,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좋아한다면서, “평생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만 할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고 말했다.
결국, 1996년 가을학기에 내가 신청한 과목들은 연수생 세미나와 미국신문,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언론윤리등 4과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