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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예지 Aug 31. 2021

건전한 취미는 부자들만의 특권일까요?

왜 노예처럼 다들 폰에 몰입되어 살아야 할까요?


"잭 웰치,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일론 머스크... 크게 성공한 사람 그 어느 누구도 워라밸은 없었다. 워라챌(Work-Life Challenge)만 있었을 뿐."

                                                                      

- 댄 페냐(히스패닉계 미국인 성공한 사업가 ) 연설 中 




중세 시대에는 배움과 학문도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글을 읽고 글을 쓰고 토론을 하는 것은, 먹고사는 걱정이 없어 시간을 온전히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계층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지금처럼 직업과 학문의 연구분야도 전문화되어 있지 않아서, 철학자인 동시에 수학자, 과학자인 경우도 다반사였지요. 배움이 이러하니, 취미는 말할 것도 없지요.



부자들은 일을 즐깁니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넘어, 평생 다 쓰기 어려울 정도의 부를 축적했지요. 당연히 일을 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데, 일을 계속합니다. 제가 아는 대표님 한 분도 은퇴할 생각이 없으시답니다. 일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는데 왜 그만두냐고 하시네요.





지금의 사회에서는 '워라밸'이라는 가치는 너무나 당연해 보여 우리 삶에 필수적인 조건처럼 여겨집니다. 워라밸의 속내를 좀 살펴볼까요? 일과 생활(여가)의 밸런스. 즉, 일만 너무 많이 하기 싫다는 겁니다. 개인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겠다는 거지요. 왜 이런 이야기가 나왔을까요?



전후 재건 과정에서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했습니다. 자원이라고는 사람 말고 없는 좁은 땅에서 많은 인구가 살아야 할 기반, 산업을 키워야 했습니다. 인력자원을 최대로 활용해야 했지요. 



인력 자원이라는 건 쉽게 말해 그 사람들의 시간을 사는 것입니다. 노동력을 사는 것이지만, 늘 말씀드리듯이 인간의 삶의 구성은 기본이 시간입니다. 시간이라는 개념의 존재 하에 노동이든 휴식이든 뭐든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기꺼이 시간과 노동을 제공했고, 하루 열 시간이 넘도록 일했습니다. 그 결과, 모두가 놀라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것을 이뤄냈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열심히 한 일들'은 스스로의 목적의식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여럿이 딸린 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가장들의 희생적인 삶, 사회 경제적 구조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자발적이라고 보긴 어려운 거죠. 모두가 힘든 시절이었고,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 으레 그렇게 사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퇴근하면 피곤하고, 다른 활동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하던 시절입니다. 가장들뿐 아니라, 가정에서 아이들을 양육하고 살림을 도맡아 하던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 여럿을 키우고 집안을 챙기고, 식사 준비를 위해 장을 볼 때도 매일 장바구니를 들고 직접 걸어가서 장을 봐오던 시절입니다. 유일한 휴식은 TV 켜고 드라마나 좀 보던 것이 다입니다. 



그때는, 과거가 더 힘들었기 때문에, 다른 경험을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일(Work)과 입에 풀칠하는 삶(living)이 다였지, 우리가 라이프(Life)라고 부르는 여가나 취미, 다양한 활동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럼, 지금 우리가 줄기차게 부르짖고, 삶의 기본 권리처럼 여겨지는 워라밸은 언제부터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가 되었을까요? 언론 매체에서 워낙 워라밸 이야기를 많이 하고는 있지만, 실상 어딘가에 '소속'되어 일하는 직장인들에게 가장 화두가 되는 부분입니다. 



드라마 미생에 나온 유명한 대사가 있지요. "회사가 전쟁터라고? 회사 밖은 지옥이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직장 생활 힘들다 말고 잘 해 봐야지.'하고 맘을 다잡는 계기가 되셨을 거예요. 



현실의 냉혹함을 일깨워주고, 자신의 환경을 탓하기만 하는 태도를 변화시켜 준다는 측면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세상을 너무 비관적이고, 아직 시작도 하기 전에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건 아닌지... 우려됩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청년의 입장이 되어본다면요. 



사회에 나가면 회사든, 개인 사업이든,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이든 어디든 해당이 됩니다. 부모로부터 평생 먹고 살 재산을 물려받아 자기 시간을 여유롭게 쓰며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요. 그런데, 회사는 전쟁터고 회사 밖은 지옥이라면, 이미 사회에 발을 내디디면서 전쟁이나 지옥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잖아요? 무섭고 두렵고 도망가고 싶고, 내가 여기서 뭘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사회의 어떤 측면을 보느냐에 따른 것일 뿐,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희망이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이왕 노력이라는 걸 해야 한다면, 최악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는, 최상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게 더 좋으니까요. 



레프 톨스토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 동서문화사



워라밸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주로 '몸값을 높이는 것'이 직장인들의 화두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승진하고, 연봉을 높이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나보다 앞서간 선배들을 봐도 딱히 미래가 보이지 않고요. 그러니, '가성비'를 위해, 돈을 좀 포기하더라도 내 시간이라도 돌려달라고 말하게 됩니다. 



돈이 필요해서 시키는 일을 하고 있으나, 최소한으로 하고 싶고, 지금은 그런 걸 주장할 정도의 사회적 분위기가 되니, '워라밸은 당연하다.'라고 말합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여가시간이 늘어날수록 돈을 많이 쓰고, 자신들에게 이익이 돌아오는 기업체와 그들에게 광고를 수주하는 언론들이 '워라밸'을 줄기차게 읊어댑니다. 



창업하거나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워라밸이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최소한 제대로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은요. 자신이 움직이는 만큼 돈을 벌고, 스스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한 달 지났다고 돈을 주는 곳이 없기 때문이지요. 



저도 한때는 워라밸이 당연한 것이고, 워라밸이 없는 일은 피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워라밸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남보다 나은 성취, 더 많은 소득을 얻기를 원하면서 워라밸을 추구한다는 건 맞지 않는다는 것이죠. 



워라밸 이야기를 한참 했는데, 이 글의 핵심은 '삶의 주도성'입니다. 부자라고 모두 삶을 주도적으로 살고, 직장인이나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수동적으로 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남이 시키는 대로 수동적으로 일한 사람들이 부자가 될 확률이 매우 낮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삶의 태도는, 일 뿐 아니라 여가시간을 보내는 방식에도 공통적으로 적용이 되죠.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 수동적이라기보다는, 스마트폰에 일상이 저당잡힌 사람들이 수동적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건전한 취미라는 것은 소위 독서나 글쓰기, 운동, 그림이나 사진, 요리, 여행,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것 등 몸을 움직이고 그 결과 무언가가 기대되는 활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다소 적극성을 띱니다. 



반면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은, 내가 스스로 의도적으로 선택했다기보다는, 수동적으로 습관적으로 하는 활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도 얼핏 보기에는 내가 취향에 맞는 플랫폼과 콘텐츠를 찾아보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고리즘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습관적이고 동일한 행동 패턴이 반복됩니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로 무엇을 얻게 되나요? 가끔의 감동이나 유쾌한 웃음도 있겠지요.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도 기억에 남고, 내 삶에 도움이 되고, 힐링의 효과가 지속되던가요?



가끔 지칠 때 생각나서 들여다 보긴 합니다만, 내 삶을 지탱하는 단단한 힘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냥 그 순간의 쾌락적인 느낌, 다 잊고 멍하게 지낼 수 있었던 무력한 편안함이 생각나서 다시 보는 겁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까. 아무것도 안 한다는 자책을 최소한 스마트폰에 몰입하는 동안은 느낄 수 없으니까요. 자책이 느껴지면 그 부정적인 감정을 잊기 위해 또 보면 됩니다. 



스마트폰이나 온라인 활동에 몰입되는 것은 '일상을 잊고 싶어서'라고 보입니다. 노스플로리다 대학의 명예교수인 데이비드 T. 코트라이트는 저서 <중독의 역사>에서 '중독'에 대해 말합니다. '짜릿한 흥분을 맛보기 위해서' 보다는 '주로 다 잊고 싶고, 무감각해지고, 머릿속을 지우고 싶어서' 도박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합니다. 가장 심각한 사용자들은 '실생활의 골치 아픈 일들을 떨쳐버리는 방법으로 온라인상의 여가생활을 강력히 선호하게 된 사람들'이라고요. 



이들은 도박장에 도착하기 전, 도박장 근처에 접근하기만 해도 이미 도파민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쥐 실험에서 먹이를 주기 전에 들려주는 소리만으로 이미 흥분되는 것과 동일하죠. 이것이 중독을 벗어나기 위해 환경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맘 단단히 먹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사실 두뇌의 작용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겁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중독적인 경험도 없으셨을 테고요. 



스스로를 노예라고 지칭하는 것이 편하진 않지만, 대부분 월급쟁이들을 현대판 노예라고 하는 분위기이니, 그렇게 설정해 볼게요. (현대판) 노예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을 무기력하게 수동적으로 합니다. 지겹고 답답한 일상과 현실을 잊으려 습관적으로 폰을 들여다봅니다. 



사람들은 TV프로그램도 너무 리얼한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백마 탄 왕자가 등장하는, 지금 시대로 따지면 재벌 2세, 3세와 평범한 사람과의 러브스토리에 열광합니다. 리얼 예능이라고 하는 것도, 리얼리티와 대본이 결합했을 때에 재미가 있습니다. 완전한 리얼은 그저 '나와 비슷하구나'의 잠깐의 위안일 뿐입니다. 도파민 분비가 안 되고, 굳이 다시 보고 싶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에 몰입하고 있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신이 노예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남이 시키는 일만 하고, 심지어 시간을 보내는 방식까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면, 주체적으로 산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죠.



건전한 취미는 부자들의 특권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누군가에게 또는 무엇인가에 위탁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선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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