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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괴물의 이름

개인적인 리뷰

by 한 줄씀
문학동네 프랑켄슈타인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다. 괴물은 이름 없이 괴물, 악마로 불린다.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괴물을 프랑켄슈타인이라 부른다. 소설의 제목이 『프랑켄슈타인』인 탓도 있을 테지만, 영화의 영향이 더 클 거다. 프랑켄슈타인은 무수히 많은 영화적 소재로 활용되었고, 고착화된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변형까지 시도되고 있다.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도 부를 이름이 없어서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을 거다.

사실을 고백하면 나도 소설을 읽기 전까지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의 이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소설과 괴물에 대한 사실을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전혀 없는 상태였고, 소설을 읽으면서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당연하게 어디선가 본 이야기 구조를 띄고 있을 거라 생각했고, 이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이번이 『프랑켄슈타인』을 두 번째 읽은 거다. 그런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뒤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공포란 요소가 얼마나 불리한 위치에 서 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히 공포가 전부인 소설이 아니다. 괴물에게 공포와 혐오를 느끼면서, 동시에 괴물을 동정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괴물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빅토르 역시 매드 사이언티스트 이미지의 시초로 회자되지만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불리는 괴물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본래 이름의 주인이지만 그렇게 불리지 못하고, 이름 없는 괴물은 자신을 만든 프랑켄슈타인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지적하고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에서 형성된 건지 정확히 짚어낼 수는 없지만 이런 이름의 옮겨짐 역시 『프랑켄슈타인』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괴물이 프랑켄슈타인으로 불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괴물에게 불러줄 수 있는 이름이 있다면 그건 바로 프랑켄슈타인 밖에 없을 거다.

괴물은 빅토르가 “생명 없는 육신에 숨을 불어넣겠다는 열망으로 거의 2년 가까운 세월을 온전히” 바침으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괴물은 끔찍한 모습이었다. 빅토르가 괴물을 본 순간 “아름다웠던 꿈은 사라지고 숨 막히는 공포와 혐오” 만이 심장을 가득 채웠고, 빅토르는 자신이 “창조해낸 존재의 면면을 차마 견디지 못하고 실험실에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빅토르가 이름을 짓지 않고 도망친 덕분에 괴물은 탄생과 동시에 버려진 것이었다.

이름 없는 괴물을 만든 빅토르는 첫 창조 이후 아무런 행동하지 않는 인물이 되었다. 괴물이 세상을 뛰쳐나와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 뒤에 빅토르는 괴물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생각했다. “행위가 아닌 결과를 볼 때, 진정한 살인자는 바로” 빅토르인 셈이다. 하지만 그 원죄에 대한 빅토르의 책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데스 산맥 정상에서 놈을 밀어 바닥까지 떨어뜨릴 수만 있다면 마다 않고 순례를 떠났을” 거라고는 하지만 빅토르는 단 한 번도 괴물에 대한 어떤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 괴물과 싸우려고 하지도, 누명을 벗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공포와 혐오에만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그런 빅토르에게 의무를 얘기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 괴물 본인이었다. “나에 대한 당신의 의무를 다하라, 그러면 나도 당신과 나머지 인간들에게 의무를 다 하겠다”고 괴물은 말했다. 이는 부모가 자식에게 요구하는 모범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다. 괴물이 만들어지고 세상을 배우는 과정에서 부모 역할인 빅토르가 보여준 것이라곤 공포와 혐오뿐이었다. 그런데도 괴물은 빅토르에게 의무와 책임에 대한 기회를 줬다. 기회와 같은 너그러움을 보일 수 있던 건 괴물 자체가 선량한 탓일 수도 있고, 괴물이 처음 본 가족의 모습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괴물이 가족에게 서 본 건 화목한 부분이 전부가 아니었다. 괴물에게 다시 절망을 안겨주는 것도 같은 가족이었다. (당연히 첫 절망은 빅토르가 안겨주었다)

인간에게 상처를 받은 괴물은 빅토르에게 “생명을 얻은 그날을 증오”한다고 말했다. “당신에게는 증오뿐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감정도 없고 심장도 없는 조물주! 내게 지각과 정념을 주고 인류의 경악과 경멸을 한 몸에 받도록 나를 내쳐버리다니!” 하지만 괴물은 마지막까지 좌절하지 않고 빅토르에게 의무를 상기시켰다. “기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당신밖에 없었다”는 괴물을 보면 애처로운 마음에 동정심을 가지게 됐다. 괴물이 겪은 사연을 통해 아픔을 알 수 있고, 그런 상처가 있으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기회를 주는(동시에 얻는) 괴물을 보면 참 인간적이란 생각을 하게 됐다.

괴물의 사연을 들은 빅토르 잠시 동요하지만 다시 괴물을 혐오하게 됐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미 자신의 가족이 희생된 상황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빅토르와 다르게 이 시기에 괴물은 절망을 창출하고 있었다. 빅토르가 의무를 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물이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이에 자초한 절망과 화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 빅토르는 자신의 의무를 다시 외면했다.

그런 빅토르를 “노예여! 네놈은 내 창조주지만, 나는 네 주인이다. 순종하라!” 라며 괴물이 꾸짖었다. 제 역할을 못한 무능한 창조자, 부모인 빅토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시체이면서, 더 이상 아무것도 창조하지 못하고 도망만 치는 노예가 됐다. 노예가 된 빅토르에게 자유는 더 이상 자유가 아니었다. “무슨 자유란 말인가? 가족들이 눈앞에서 살해당하고 오두막집은 불타고 땅은 황무지가 되는 걸 눈앞에서 목도하고 자신은 집도 없고 무일푼의 떠돌이가 되었지만 몸만은 얽매임 없는”게 빅토르의 자유가 됐다.

창조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노예와 주인으로 뒤바뀌는 순간부터 아니, 사실 그 이전부터(처음 도망친 그때부터) 빅토르는 괴물에게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을 빼앗긴 게 됐다. “나의 권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나를 따르라.” 이제는 괴물이 빅토르의 주변을 맴도는 게 아닌, 빅토르가 괴물의 뒤를 쫓는 신세가 됐다. 괴물 역시 빅토르에게서 벗어나려 하는 게 아니었다. 빅토르에게 자신을 뒤따라오라 하는데, 괴물은 빅토르 없이, 빅토르의 고통 없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 가치가 없단 것을 알고 있었다. 괴물 본인도 완전한 자유가 아닌, 빅토르라는 철구를 다리에 걸고 걷는 죄인인 셈이었다.

빅토르의 자식 같은 괴물에게 프랑켄슈타인 가문의 성이 따라붙은 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괴물도 그 이름을 물려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괴물은 그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원할까?

빅토르가 창조한 괴물, 괴물이 창조하는 것은 빅토르의 고통이었다. 이는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며 이루는 것이었다. 빅토르가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괴물을 만들어 내고,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이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것과는 달랐다. 빅토르는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성적인 존재를 창조했으니, 내 능력이 닿는 한 행복과 복지를 보장했어야 합니다. 그게 제 의무였어요.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동포 인류에 대한 의무가 내게 더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라며 자신의 의무에 대한 소신을 내비쳤다. 그렇다. 빅토르는 반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괴물을 같은 인간(인류)으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빅토르는 괴물을 부정했다. 자식을 계속해서 부정하는 부모에게 이름을 물려받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부모의 이름을 받는 건 오히려 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괴물에게 붙는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을 인정하게 만들었다.

다시 말하지만 괴물도 빅토르와 마찬가지로 자유 없는 죄인이었다. 다른 점은 괴물은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거였다. “지금 와서 용서를 빈다 해도 무슨 의가 있을까?” 괴물은 죄 앞에서 빅토르와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빅토르에게 사죄를 할 맘은 있었다. 이 부분만으로 빅토르 보다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괴물은 다른 방식으로 죄 값을 치르고 있었다. (살인에 대한 죄가 아니라, 빅토르에게 절망감을 준 죄이다. 살인에 대한 죄는 치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신이 아무리 비참하게 무너졌다 한들, 내 괴로움이 당신보다 훨씬” 크다고 괴물은 말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하는 생각 때문에, 삶의 전반을 차지하는 괴물의 고통이 빅토르가 겪은 것을 압도한다는 거였다. 괴물 자체도 살인을 즐긴 것이 아니고 빅토르에 대한 증오 하나만으로 살아간 것이 때문에 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빅토르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괴물에 의해 하나씩 지워져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괴물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텅 빈 마음속에 빅토르가 절망감 하나만을 심어준 탓에 괴물은 죽을 때까지 괴로워해야만 했다.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한 괴물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이 난다.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했지만, 이후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역시 프랑켄슈타인이 가장 어울리는 이름 같다. 자신이 그렇게 증오했던 부모의 이름으로 불리는 건 괴로울 거다. 프랑켄슈타인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한번 이름을 불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거다. 그런 그에게 어울리는 단 하나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다. 자신의 지워지지 않을 죄와 소망이 함께 담겨 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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