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과거의 나를 만났다
이 세상 사람은 두 부 류로 나뉜다. 척하면 척 죽이 잘 맞는 사람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 ㄷ언니는 나에게 처음부터 죽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배려심 깊고 선물 센스가 엄청나며 같이 있으면 말도 잘 통하고 재밌는 그런 사람. 우리는 다른 주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휴일을 서로의 집에서 같이 보낼 만큼 가까운 사이이다. 아이들끼리도 서로 잘 맞고, 남편들끼리도 나름 잘 지내는 미국식 표현으로 그야말로 Family friends랄까.
오늘 언니가 근처 도시에 왔다길래 한걸음에 달려갔다. 우리 아이의 보충수업도 빠지고 회사는 반차를 내고 부랴부랴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박물관에서 아이들과 함께 이곳저곳을 다니며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러던 와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 튀어나온 인공지능 이야기, 직장 생활 이야기, 어린 직원과의 세대차이 이야기... 언니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중에 되어서야 언니가 타향에서 주부로 살면서 느끼는 내적고민을 이야기해 주었다. 한국에서 긴 시간 직장 생활을 한 언니는 결혼하면서 미국에 오고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고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경단녀가 되었다. 일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면 본인만 뒤쳐지는 느낌이 든다고. 외벌이로 적게 쓰고 가정을 뒷받침하면 된다고 마음을 다 잡았다가도 소셜미디어에서 보이는 지인들의 직업적 성취를 보고 있자면 비교가 된다 하였다.
그런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내가 괜히 내 직장 생활이야기를 꺼냈나 하는 후회가 몰려오면서 그 시절이 떠올랐다. 첫 아이를 낳고 1년 여 만에 남편의 직장을 따라 2,000마일 넘는 먼 곳으로 이사 왔던 몇 년 전을 말이다. 당시에는 재택근무를 할 수 없었기에 어렵게 들어간 내 직장은 포기해야만 했다. 박사를 받고 1년여 만에 100군데 넘게 지원해 겨우 인턴으로 입사하고 미덥잖은 태도의 매니저에게 우기고 우겨 정직원이 된 그 직장 말이다. 아이를 보려고 일찍 퇴근하기 위해 새벽 5시 반에 매일 출근하면서도, 너무도 작은 아이를 생각하며 가슴 쓰리고 죄책감으로 시달리던 나날 들이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직장은 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주부로 사는 1년 반의 시간이 나에게 준 정신적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심했다.
아이가 너무나 예쁘면서도 나는 항상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하면 다시 육아와 엄마들의 세계가 아닌 어른들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마음 한 끝 쪽에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능력 있는 우리 엄마가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평생 주부로 살아야 했고 가슴앓이 했던 그 삶이 내 무의식에 자리 잡아 있었다. 한 생명을 낳고 키우는 일이 세상의 다른 어떤 일 보다도 귀중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무언가 뭔지 모르는 가슴속의 구멍이 채워지지 않았다. 그 구멍이 쓰라리게 아픈 날에는 육아를 도와주려 일찍 퇴근한 남편에게도 화살이 돌아갔는데, 당시를 회상하면 남편은 내가 항상 썩은 표정으로 그를 맞아주었다고 한다.
ㄷ언니의 고민을 듣고 마음이 아팠던 건 과거의 나를 봤기 때문임이라. 모두가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소위 인간은 밥값을 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라, 그저 태어났기에 그 자체만으로도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나의 일 자아는 마음속 구멍으로 남아 채워지지 않으면 자꾸만 쓰라리고 신경 쓰이는 그런 내 마음의 일부로 남아 있다. 언니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쑥스러워하지 못했다. 무얼 하든 언니는 너무 소중하다고.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어쩌면 나에게도 해주고 싶은 말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