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농구 이야기 그 서막 (1)
아버지는 63년생이시다. 아마도 토끼띠. 그리고 그는 근 반년 동안 헬스장을 다니면서 7킬로 정도를 감량하더니 이제 준비가 된 것 같다며 복싱장에 등록했다. 팔뚝이 내 남동생보다 두꺼우신 것 같은데 본인은 일부러 삼두 운동은 안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가 보기 싫다고 하셨다나… 겸사겸사 올해 생신 선물로 복싱화를 사 드렸는데 신이 나셨는지 가끔 저녁 운동 후에 오늘은 훅을 배웠다고, 링 위에 올라가 봤다고 신나서 전화를 하는데 뿌듯하고 귀여운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을 해보면 내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여러 가지 운동을 하셨다. 테니스, 검도, 수영, 헬스... 더운 여름날에 어머니 손을 잡고 테니스장에 아버지를 검거하러(?) 간 기억도 어렴풋이 있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중학생 때도 방학만 되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내내 테니스를 칠 정도로 과몰입했었다고.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테니스 치러 다니던 남편 딸이 고3이 되던 해에, 어머니는 학교 체육관을 수시로 검문해야 했다. 왜냐면 그 딸이 맨날 허구한 날 공부는 안 하고 배드민턴을 세네 시간씩 쳤기 때문이다. 데자뷰 같았을 테다. 독서실 간다면서 여기서 뭐 하냐는 어머니의 다그침에 내가 벌게진 얼굴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아 방금 왔다고, 얼마 안쳤다고 말하더라는 이야기는 아직도 가족 모임에서 회자된다. 아버지가 아무 말도 없으셨던 이유가 있었다. 집안 내력이었던 거지.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께서 스포츠를 안 좋아하시는 분은 아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시절 체육 선생님에게 서울대학교 체육교육과를 준비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권유를 들었다. 할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여자가 무슨 체육을... 떼잉 쯧' 하면서 어머니를 여자대학에 보내셨고.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 어이없게도 그랬다. 물론 어머니는 교생실습을 나가서 교사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셨지만. 그래도 충분히 다른 대학이나 다른 학과를 가실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지 않을까 생각하곤 한다. 본인은 별 미련 없어 보이시기 때문에 괜찮지만 말이다. 지금도 집안에서는 누가 뭘 떨어뜨려서 깨뜨리는 일은 많이 없다. 뭔가 떨어지려고 하면 다들 잽싸게 잡든지 아니면 발로 한 번 툭 받아서 충격을 완화시킨다. 이상한 집안이다.
그러니까, 운동이 당연하게 일상의 한 부분에 자리 잡은 것은 어머니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냥 밥을 매일 먹듯이, 정말로 자연스러웠다. 요즈음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일주일에 세 번은 꼭 운동을 하는 일이 나에게는 당연한 일상인 것도 그 영향이다. 어느날 뿅! 하고 아 운동을 해야겠다 마음 먹은 것이 아니었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학교 점심시간에, 학원이 끝난 후에 동네 아이들과 몰려다니면서 축구하고 자전거 타고 농구하는 것을 즐겼다. 그래도 아버지 어머니는 여자애가 무슨 축구를 그리 좋아하느냐, 농구는 왜 하느냐 다그치는 법이 없었다. (물론 놀다가 다치면 혼나긴 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청 격려를 하신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못하게 한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내가 어렸을 때 '또래 남자애들 기죽인다'라는 이유로 거절 당해 축구팀에 못 넣어준 것에 대한 미안함을 이야기하시곤 한다. 대신 남동생과 같이 할 수 있는 체육활동에는 항상 나를 같이 보내주셨다. 태권도, 체조, 수영... 가릴 종목 없이 나는 신나서 그 시간만을 기다렸던 것 같다. 그래도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뛰는 남동생을 볼 땐 내심 질투 나는 마음을 숨기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6학년, 캐나다로 유학을 가서야 처음으로 또래 여자아이들과 팀을 이뤄 농구와 배구를 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물론 운동을 해보라고 유학을 보내주신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다니게 된 학교에서 진행하던 지극히 평범한 방과 후 프로그램 중 하나에 참여한 것이었다. 일 년 중 상반기에는 농구, 하반기에는 배구 시즌이 있었다. 한 학년에 스무 명 남짓한 여자아이들이 있었는데 기억 상 그 중 열명 이상은 방과 후 스포츠 팀에 소속되어있었고 6,7학년을 모아서 한 팀을 이뤘던 것 같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에 모여서 연습을 하고 가끔은 남자 팀과 섞여서 게임을 하기도 했다. 토너먼트 시즌에는 타 학교로 원정 경기를 가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어떤 옛 기억의 편린은 정말 선명하게 남아 아직도 나의 일부를 이룬다고 느끼기도 한다. 어쩌다 상대편의 공을 가로채 혼자 골대에 달려가는 순간의 기억이 그렇다. 멈칫한 나에게 그대로 멈추지 말고 뛰어가라고 손짓하던 코치님, 막는 사람이 없던 오픈된 골대. 그리고 너무나도 떨리던 레이업 순간. 하지만 결국 골은 못 넣었던 것 같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이었겠지. 그래도 그 순간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이후에는 혼자 집에서 공을 튀기고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부대끼며 열심히 연습을 했다. 어머니 아버지는 영어 공부하라고 보내주시긴 했지만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오라는 그 의도에는 충분히 부합하는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쩌면 나의 큰 결핍을 채워주고 성장시켜준 영향력 있는 경험 중 하나가 되었다.
직후 한국으로 들어와 나는 팀 스포츠의 존재를 단지 유년시절의 어떤 꿈같았던 일로만 남겨두고 살았다. 교육 시스템이 어쩔 수 없었다. 중학생 때는 축구를 했지만 점점 벌어지는 체급 차이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다행스럽게도 고등학교는 여자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우리 학교 애들은 배드민턴을 자주 쳤다. 유별나게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방과 후에 남아서 열심히 배드민턴을 치는게 너무 좋았다. 학교 체육관을 같이 쓰는 동호회 사람들과도 섞여서 치고, 배우고, 실력이 나날이 늘고... 공원에 나가서 치는 핑퐁 배드민턴이 아니라, 정말로 다들… 진심이었고 잘했다. 몇몇 아이들은 학기 중에 대회에도 몇 번 나갔고 졸업 후에도 근처 동호회에 들어가 배드민턴을 꾸준히 쳤다. (덕분에 나는 그때 쌓은 실력으로 전국 한의과대학 배드민턴 대회에서 2등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이 원래 체육을 싫어한다는 헛소리를 믿지 않은 지는 꽤 됐다.
그러다가 스물세 살이 되던 해가 되어서야 생각했다. 여성 농구 팀도 찾아보면 분명히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시기는 예과 2학년, 한창 아프고 사람을 마주하기 힘들었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