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리듬 속에서...

김 스토리...

by 조원준 바람소리


'김밥'으로 K-푸드 선봉에서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우리들의 식탁에서는 다양한 조리로 만나는 김은 바다에서 자라는 갈조류의 해초이며 포자로 번식하여 대량으로 양식이 가능하므로 서남해안 곳곳에서 겨울철 어민들의 수익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또 해태(海苔), 우리 동네에서는 해의(海衣)로 부르는 김이 김으로 명명된 유래가 기이하기도 하다. 조선 16대 임금 인조가 어느 날 수라상에 올라온 새까맣고 종이 같은 반찬을 신기하게 여기며 한번 먹어보고 무엇인지 물었다.


아무도 이름을 몰랐는데 한 신하가 "광양 땅에 사는 김 아무개가 만든 음식입니다."라고 아뢰자 인조가 "그럼 이 바다풀을 그 사람 성을 따서 '김'으로 부르도록 하라"라고 해 김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 아무개라고 했다지만 그는 1636년에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청과 굴욕적인 화의를 맺었다는 소식에 통탄하며 고향 광양 태인도에서 은둔하던 김여익이란 지조 있는 무신로서 은둔 생활 중에 해변에 표류해 온 참나무 가지에 김이 붙은 것을 보고 양식하기 시작하여 그 양식법을 널리 보급하였다.




김은 어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이자 우리들의 식탁에 빠질 수 없는 귀한 식품으로 한 장에 함유되어 있는 비타민 A는 달걀 두 개와 맞먹을 정도 영양가가 높을 뿐만 아니라 맥주 에 궁합 좋은 안주이기도 하고 밥맛이 없을 때 요긴한 반찬으로 국민대표 음식이 된 지가 꽤 오래됐다.


1960년대에는 남해안에서 주로 양식을 하였는데 겨울철 차가운 바다에서 수작업으로 채취하여 산등성이 양지바른 덕장에서 자연광에 말려서 소량의 제품을 만들던 그때에는 국내 생산량의 70%가 완도에서 나왔고 대부분을 일본으로 수출하여 일반 시중에서는 가격도 만만치가 않음으로 서민들은 즐겨이 먹지도 못한 음식이었다.


세월이 흘러 현재의 김이 나오기까지 김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변화의 주된 요인은 남해 바다의 환경이 황폐해진 후 김을 생산하는 기술자들이 서해안의 해안선을 따라서 이주하면서부터이다. 진도에서 시작하여 신안, 위로는 광천, 태안, 화성, 안산에서 백령도에 이르기까지 서해안 곳곳에서 생산이 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산지에서 원초를 공급받아서 대량생산을 할 수 있는 공장들이 들어서고 국내 해산물 가공식품 회사들(사조, 동원, CJ, 선경)이 산지에서 납품받아 전국적으로 유통하여 시장에 나옴으로써 식당과 가정집에 여러 형태의 김들이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김에 대한 추억은 아련하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직전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60년 전의 이야기다. 당시 김 한 톳(100장) 가격이 보통 500원이고 상품(上品)은 700원 정도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아주 잘 사는 집은 아니었으나 겨울철이 되면 연탄불에 구운 김은 늘 저녁상에 올랐는데 아이들의 할당량은 한 사람 당 두 장씩이었다.


어른들 상에는 참기름 바른 김이 번질거리며 눈에 아른거렸지만 이미 우리들 것은 아니었고 한 장을 사등분하여 여덟 장의 조각을 만들어서 수(壽) 자가 새겨진 사기 밥그릇에 담긴 밥을 수저로 퍼서 김에 담아 간장을 찍어서 싼 여덟 개의 작은 주먹밥이 맛있는 저녁 한 끼였고 지금도 잊을 수가 없는 맛으로 머리에 남아 있다.

중학교 땐가?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들었다. 일본으로 수출한 김은 일본에서도 빼놓을 수가 없는 식탁의 감초 역할을 하는데 일본 사람들은 김 한 장을 팔등분하여 공깃밥 한 그릇을 비웠다는데 얼마나 아껴서 먹었는지 짐작이 갔다. 아무리 食 문화가 그렇다 해도 당시에는 김도 그렇고 공깃밥도 그렇고 하여 참 쩨쩨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지금은 내가 공깃밥에 그렇게 먹고 있다.




명절에 고향에 방문하여 오래간만에 죽마고우를 만났다. 친구는 오래전부터 완도에서 김 공장을 하는데 생산량의 대다수를 일본으로 수출하고 국내는 CJ에만 납품을 하는 유수의 업체 대표이다. 차 한 잔을 차분하게 마실 시간도 없이 명절에도 공장을 가동한다고 오래 있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김 30여 톳을 차에 실어준다.


김 박사로 통하는 친구가 말하기를 김은 김 낱장의 두께가 얇아야 좋은 김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이와 달리 일본으로 수출하는 김은 초밥용으로 두꺼워야 하고 특히 파래가 섞이지 않아야 하는 것은 파래가 섞이면 구울 때 파래가 먼저 타버려서 군데군데 검은 자국이 보기에도 안 좋고 타서 쌉싸름해진 식감을 싫어한다면서 수출용과 내수용 김이 다른 이유를 말한다.


어릴 적 기억으로 좋은 김의 기준은 겉보기에는 검었다. 사철 수출하기 위해 여름에도 화입 창고에 보관한 김을 개봉해서 보더라도 흑마(黑馬)의 엉덩이처럼 검정 윤기가 좔좔 흘렀다.(자세히 들여다보면 갈조류라서 붉은 기를 띠고 있음.) 솔직히 파래가 섞인 김보다 맛이 없었는데 시각(視角)을 중시하는 게다짝의 미각(味覺)이 참 유별나기도 하다.

오로지 검은색 김만을 찾는 일본 사람들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국민성을 나타내는 것 같고, 김과 파래가 섞임으로써 어우러지는 화합과 조화의 맛이 우리 국민들의 심성이라면 너무 억지스러운 해석일까?




아주 오래전에 들은 이야기다. 어민들은 겨울철에 주 소득원이 되는 김의 병해를 예방하고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해 널따란 바다에 펼쳐진 김 양식장의 발에 농도를 묽게 한 염산(무기산)을 뿌린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바다의 밑은 석회화로 황폐해지고 김발에는 김 외의 해초(파래)는 붙질 않으니 이후 김의 생산량을 늘리는 데는 성공을 했으나 파래가 섞인 김은 먹기 어렵게 되었다.(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수출 김의 영향이 아닌가? 한다.)


양식장에는 염산을 뿌려서 생존력이 강한 김만 남아 생산량이 늘어나자 내수용 물량이 부족하지 않게 되었고 그런 연유로 나중에 김은 시중에 흔한 식품이 되었으나 검은 색깔의 김만으로는 맛을 느끼기에는 뭔가 부족하여 나온 상품이 조미김이다.

조미김은 참기름과 맛소금이 첨가되어 고소함과 김의 향이 어우러져서 풍미(風味)를 더해주지만 나중에는 소금기가 혀를 마비시켜서 솔직히 김 고유의 맛을 느낄 수가 없다.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파래김을 찾는 소비자들이 많아지고 수요가 늘어나자 생산자들은 파래를 별도로 채취하여 김의 원초와 섞여 파래김을 만들었다.

무늬만 파래김이 얼마나 맛이 있었을까? 나중에는 기존의 김과 차별화로 무공해 김을 양식한 어민들이 김과 파래를 동시에 채취하여 만든 오리지널 파래김이 가격은 비싸지만 시중에서 잘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김과 파래, 두 해초는 떼어놓을 수 없는 궁합의 연계성이 있다. 파래가 안 섞인 김은 때깔은 좋고, 비릿한 바다향은 있지만 감칠맛이 덜 나는 느낌이고 오로지 파래만은 구울 때 잘 타버리고 뒷맛이 몹시 쓰다. 적절한 비율로 김과 파래가 섞인 김을 구워서 먹어보면 혀 끝에 닿는 바다향이 입 안에 스민다.




바다가 고향이고 고향 앞바다에서 자라나는 김을 생각하면 싸잡아서 떠오르는 고향의 향수를 느껴서 그랬을까? 시대의 흐름에 맞춰 달라진 김 스토리를 두서없이 적어보았다.


지금도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면서 바다에 깔려있는 김 양식장을 인공위성에서 보면 태양광 패널처럼 보이고 길이가 남서 해안선을 따라서 깔려 있다고 하니 그 규모가 방대하기도 하여 K-푸드의 기세를 몰아 김으로 지구를 감쌀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2024. 2


사진 출처 : Daum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