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리듬 속에서...

어머니를 저세상으로 보내면서...

by 조원준 바람소리


이른 아침에 전화 벨소리... 셋째 형님이시다.

어머님이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간 밤 꿈에 오래전에 돌아가신 할머니의 고운 모습을 봤는데 선몽(先夢)이었나? 그 시간이 어머님이 별세한 시간이었나 보다.

예견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맞이한 죽음이라 충격은 크진 않았지만 어머님을 보내며 차분한 마음속에 생로병사(生老病死)를 거쳐 가는 길고도 짧은, 인간의 생애가 스치듯 지나간다.


다른 지방 富農의 외동딸로 태어나 곱게 자란 어머님이 타관의 장손 댁으로 시집을 와 가업을 물려받아 땀 흘려 일하셨고, 쉬지 않고 장사를 해서인지 1970년도에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3층짜리 건물도 세우셔서 주변에서 자수성가했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셨다.


4대째, 80년을 이어온 곰탕집...

할머니 때부터 시작하여 어머님이 국자를 잡았던 그 시절이 영업이 끝난 후에 돈 세기 바빴다고 하니 아마 우리 집 최고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세월이 흘러 시절이 변하고 사람들의 건강의식이 달라짐에 따라 식생활 문화가 바뀌고 그 영향에서인지 그전까지는 몸 보양식이었던 곰탕이 건강을 이유로 기름 섞인 육류 섭취를 덜하게 되다 보니 점점 사양길로 접어들고...


3대째 쇠락의 길을 걷다가 4대째 옛날을 떠올리며 분발을 해보지만 어머님 시절에 비해 노력이나 정성도 부족할뿐더러 세태의 변화나 시대의 흐름에 대체를 하지 못한 거 같다.

어쨌건, 어머님은 60 중반에 국자를 놓으시고 활동을 안 하시다 보니 아마 그때부터 늙어가는 속도가 더 빠르지 않나 생각이 든다.


그 후 선천적으로 안 좋은 심장 때문에 심근경색으로 대수술을 하셨고 오래 살지는 못 할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을 받고서 시골을 떠나 수도권에 살고 있는 몇몇 자식들의 공양을 받으셨다.


우리 집에 모실 적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작은 빌라여서 업고서 계단을 오르면서 몸무게의 가벼움을 느끼고, 퇴근 후에 인사드리러 작은 방 문을 살며시 열면서 누워계신 작은 모습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지곤 했었는데...

오래 살지는 못 할 거라는 의사 선생님의 진단과는 달리 자식들의 정성스러운 보살핌에 3년을 잘 지내시다가 시골 환경이 더 나으리라 생각하고 셋째 형님이 계시는 시골로 모셨는데 노화는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일까...


결국 지병과 다른 곳에서도 문제가 생겨 병원 치료를 마침과 동시에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던 요양병원으로 옮겨 간병인들의 손길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병원생활에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문안차 가서 누워계신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다행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송구한 마음이 일어나 여윈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발바닥을 만져보니 다리미판처럼 판판하다.

곰탕을 만들면서 서서 국자 질을 하는 동안 미끌거리는 바닥에서 중심을 잡으려고 발바닥에 힘을 주다 보니 편편해졌나 보다. 십수 년 동안 백만 그릇이 넘는 곰탕을 만들다 보니 말이다.


평소 불편하게 걷는 모습을 보며...

원인은 무릎관절이 좋지 않아서 그러시겠지만 평발이라서 더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5男 1女의 자식들을 낳으시고, 기르시면서 오로지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신 그 어머님이 봄 햇살 따스한 날에 87세의 일기로 소천하셨다.




이제 어머님은 이 세상에 안 계시지만 떠나시면서 남은 가족들에게 좋은 선물을 해주셨다.


장례를 치르면서 흩어져 사는 가족들을 모이게 하고 오랜만에 뵙는 어른, 형제들과 조카들, 새 식구가 된 조카사위, 며느리와 인사를 주고받으며 가족의 화합을 도모해 주시고...


3대 째는 돌보는 사람 없어 무연고 묘가 될 뻔했던 할아버지 할머니를 합장을 하고,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님 묘도 정리를 하여 한 곳으로 모시게 되었으니 한꺼번에 얼마나 큰 은혜를 주시고 가셨는지...

햇살을 온몸으로 받는 평화로운 산의 중턱...

南海 쪽빛 바다가 펼쳐지는, 명당자리로 어머님을 모시면서...

죽음을 마무리 짓는 시간도 소중한 삶의 일부임을 느낀다.


201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