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

다시 나를 키우는 일

by 정이선


어느 연예인이 TV에 나와서 “내가 나의 엄마라고 생각하면 나를 잘 돌보고 잘 보호하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다.


새로웠고 무슨 말인 지 알 것 같았지만 이질적이고 어색했다. 대체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더니 결국 “엄마”라는 단어는 결국 진짜 나를 낳아준 사람, 나의 핏줄인 실재하는 “내 엄마”의 상(像)으로 돌아오기 때문인 듯했다.


그녀는 또 “(엄마는)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해 주므로, 나를 위한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 엄마”라고 했으나 거기에 대해서도 “내 엄마”의 상을 덧씌우자 어쩐지 불편해졌다. 그러나 이 불편함은 나의 엄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거나, 내가 잘못되길 바란다거나 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어떤 부모는 자녀의 ‘최소한’ 이 되고 어떤 부모는 자녀의 ‘최대한’ 이 된다.
부모의 모든 말을 잘 듣는 아이는 아무리 잘 자라도 부모를 넘을 수 없다.
@palhosqure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선생님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던 어른인 나는, “내가 나의 엄마라면”이라고 가정해 보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내가 나의 엄마라고 생각하면 내가 결정하는 모든 것들은 엄마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므로.

엄마 또는 아빠의 불안이나 무지에 뿌리를 둔 어떠한 선, 한계, 선과 가치가 모두 내 것이 되어버리므로.


나는 그래서 나를,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은근하고 느슨한,

친밀하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은, 적당한 거리에 있는 어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그 어른은 내게,

‘위험하니 하지 말라’고 하는 대신, 위험하지 않게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줄 것이다.

‘흰 피부에 흉이 져서 어쩌니’라고 말하는 대신, ‘정말로 재미있었구나!’ 하고 덤덤히 약을 발라줄 것이다.


그 어른은 ‘나도 모르는 것이 많다’ 고 할 것이다.

그 어른은 ‘괜찮지 않을까?’라고 할 것이다.

그 어른은 ‘해보고 싶으면 해야지’라고 할 것이다.

그 어른은 ‘네 안에는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 어른은 ‘너는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지만, 어떤 것은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 어른은

그 어른은

그 어른은...


나는 그렇게

‘나’ 이면서 동시에 나의 보호자인 ‘적당한 거리의 어른’ 이 되어 나를 다시 키워내야 한다.


“이선 씨 안에는 이선 씨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텅 비었어. 지금 이선 씨 안에 있는 건 다 엄마한테서 온 거고, 아빠한테서 온 거야.”
“지금 말한 그거, 이선 씨 불안 아니에요. 그건 아빠의 불안이지.”


3년 전 상담 선생님은 내게 그렇게 말했었다.

이론적으로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래서 실제로, 내가 받은 것들이 내 삶을 식으로 조형했는지, 받은 것들로만 채워진 나는 어떠한 ‘나’ 인지는 도무지 닿지가 않았다.


그런데 ‘내가 나의 엄마’라고 가정했을 때의 불편함,

나의 불안이 아닌 ‘아빠의 불안’이라고 했을 때의 알 듯 모를 듯한 느낌.


그것은 ‘나였다면 하지 않았을 일, 엄마라면, 아빠라면 권하지 않았을 일’ 하고 나서야 선명해졌다.

나는 처음으로, 부모가 그어놓은 나의 최대한을 넘어본 것 같았다.


벽은 나를 여전히 가로막고 있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은 한계가 아닌 경계일 지도 모른다. 경계라면 잠시 열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다.

어려서는 두려워하지 못했던 것, 망설이고 주저했던 것들을 하나씩 느끼고, 맛보고, 경험하는 것은 곧, 벽인 줄 알았던 경계의 문을 스스로 열고 나아가는 일.


그때 내가 해야 할 일은 ‘위험하니 돌아오라’ 고 소리를 지르며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 아니다.

느슨한 거리의 보호자, 어른인 나는, 경계 안에 서서 문을 열어둔 채, 애정을 가지고 그저 지켜보면 된다.

그렇게 한계를 너머 경계를 오가는 나를 바라보며, 어른인 내가 다시 나를 키워가면 되는 것이다.


나에 대한 따듯한 애정과, 온건한 사랑과,

그보다 더 큰 존중의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