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0. 10.

어디까지 비워야 할까, 비움과 불안

by 정이선


그래서, 나는 어디까지 비워야 만족할까?

연재 중인 글이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에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지만, 요사이의 내 비움은 종전과 같지 않다.


긴 연휴 동안 집을 정리하기로 했다. 특히 사용하고 있지 못한 서재방을 어떻게든 ‘건드려’ 보기로.


어디에 두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는 잡다한 물건들이 그 방에 있다.

내손으로 처음 만들어본 제일은행 통장, 첫 번째 체크카드, 몇 차례 비우고도 남겨진 수험서, 시험지와 답안지, 자료집, 기록과 메모, 사진들, 초등학교 때부터 모았던 우표책, 편지나 여행의 기록, 오래된 예쁜 광고, 엽서, 영화포스터, 일관성 없는 잡다한 필기구와 전선, 수십 권의 일기장, 계약서, 출력된 이력서, 자기소개서, 연결하지 않은 피씨와 모니터... 열었다가 닫았고, 비워야지 하고 모아두었다고 결국 비우지 못한 것들.


전자책을 읽기 시작한 이후로 새 책은 예외적인 경우에만 구입하기로 마음먹었으므로, 가장 비우기가 만만한 것은 역시 책이다. 이사하면서 책장(그 ‘보루네오’ 책장이다)을 창문의 왼쪽과 오른쪽에 마주 보게 배치했다. ‘이 작가의 책은 더 읽고 싶다’ 고 생각한 책들은 왼쪽 책장에 꽂았다. 읽고 나서 ‘무슨 이야기였지’ 하고 잊힌 책은 오른쪽에 꽂아두고 비우기로 했다.


책을 비우는 것은 쉽지만 어려운 일이다.

알라딘이나 예스24 같은 곳에서는 책을 우편으로 매입하기도 하는데, 구입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책을 두고 하자가 있다면서 매입거부를 당한 후론(나는 책표지도 꺾지 않을 만큼 공손히 읽는다) 중고서점에 책을 내놓는 대신 당근을 통해 정리하기로 했다.

물론 당근에 책을 내어놓는 것에도 상당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하다. 쓰다 보니 내가 이런데 에너지를 쓰고 있으니 정작 애쓰고 공들여야 할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건가 싶기도 한데... 아무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책은 묶음으로 와르르 내놓는 것이 아니라 ‘잘 묶어’ 팔아야만 한다.

주제와 테마를 정하고 그 주제와 테마에 맞게 책을 묶어서 내어놓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상문학상 작품집만 모아서 내어놓는다. 인물 평전만 일괄로 내어놓는다. 부동산과 주식투자, 부와 자산증식에 관한 주제의 책들만 모아서 판매한다.


이렇게 주제와 테마를 정해 내어놓았을 때 거래가 되지 않았던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다. 엊그제는 연휴 맞이 ‘쉽게 읽히는 가벼운 소설’을 테마로 해서 두 권의 책을 내어놓았고, 또 어제는 지적허영심에 구입했지만 재미가 없어 이고 지고 다니기만 했던.... 나이가 들면 재미있어질까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재미가 없는 ‘맹자, 맹자평전, 논어’ 같은 책을 한몫으로 내어놓았더니 누군가가 가져간다고 했다.


물론 결정적인 요소는 가격이다.

온라인 중고서점에서 매입하지 않는 종류의 책은 아무리 새것이라도 결단이 필요하다. 폐기물로 내보낼 것인가,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 한번이라도 더 읽히게 할 것인가. 만약 정가 18,000원짜리 책을 2,000원에 파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면, 가득 모아 고물상에 종이폐기물로 가져가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연휴 동안 나는,

책을 다섯 권 비웠다.

- 요란하게 이야기했지만 결국 비운 것은 고작 다섯 권이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서류는 파쇄하여 10리터 두 봉지를 비워냈다.

- 최근에 사무용 문서세단기를 구입했다. 아주 마음에 든다.

플러스펜 세 통은 사무실로 가지고 왔다.

- 손글씨를 쓸 일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올해도 입지 않았고, 지난해에도 입지 않았고 다음 해 봄에도 입지 않을 것 같은 옷 세벌을 꺼내놓았다.

- 이제는 정말 보낼 때가 되었다.

그리고 자잘한 잡화들을 당근에 내어놓았다.

- 누군가의 손에서 유용히 쓰이게 되기를 바라며.


언제 죽더라도 불태우면 되는 상자 딱 하나만 남기고 싶다.


집은 여전히 가득 차 있는 것 같고,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남김없이 모두 다 비우고 싶지만, 아무렇게 버리고 싶지는 않다.

이 모순 안에서 우왕좌왕하며 매일같이 갈등한다.


지금 나의 비움에는 만족이 없다.

집안을 종종걸음 치며 덜어낼 것을 찾는 지금의 나는 ‘불안’이다.


퇴근길에 문득 문을 열고 집에 들어서며, ‘음, 이제 저 거실조명은 떠나보내야겠군’ 결심하고 시간을 곱씹던 때의 비움과는 결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리정돈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 정리 못하는 사람을 위한 정리책: 와타나베 아야


집안을 두리번거리며 비우고 버릴 것을 찾는 대신, 나는 비워내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이 느껴지는 이 불안과 초조의 이유부터 발견해야 한다.


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몰아치고 있는지.

비움을 움켜쥐면서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지.

종국에 내가 다다르고 싶은 것이 대체 무엇이고 어디이기에,

이렇게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처럼’ 달음질치는지를. 그것을 알아차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