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그림을 그리든 뭘 만들든 난 항상 반에서 눈에 띄던 아이였다. 그 손재주가 꽤나 아까웠던지 앞으로 미술을 전공하겠다고 한 번도 조른 적도 없던 어린 나에게 엄마는 미리 이렇게 못 박았다.
"미대는 돈 많아야 간다. 우린 돈 없다."
딸만 연달아 셋을 낳은 후에서야 겨우 원하던 아들을 얻은 엄마의 입장에서 자식 넷을 교육시킨다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배움도 짧고 고지식한 아버지는 무슨 계집애를 대학까지 보내냐고 큰언니를 실업계 고등학교에 보내라고 해서 당시 엄마랑 한동안 온 동네가 떠나가라 며칠을 아니 한 달 이상은 싸운 걸로 기억된다. 같이 배움의 끈이 짧은 건 아버지랑 똑같았지만 엄마는 자존심이 무척 센 사람이었다.
위로 오빠 둘, 밑으로 여동생 셋을 둔 엄마는 집에서 시키는 데로 고분고분 학업을 관두고 일찍 감치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엄마 바로 밑의 동생인 큰 이모는 달랐다. 가출하여 서울로 가 낮엔 사무실 경리로 밤엔 야간 학교의 학생으로서의 삶을 선택했다. 그리고 동생 둘을 거두어 악착같이 공부를 시켰다. 둘째 이모는 큰 이모 덕에 당시 일류 고등학교에 합격해 다녔지만 결국 재수 시절 지금의 이모부와 눈이 맞아 대학 진학마저 포기한 채 결혼을 선택했다. 그래서 두 이모는 아직 사이가 좋지 않다. 반면 막내 이모는 의대에 합격해서 의사로서의 삶을 살고 있으며 대학교수인 남편도 만나게 되었다. 엄마는 본인이 제일 큰 딸이면서도 동생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는 학벌과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항상 자존심 상해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예전에 엄마에게서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등록금을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굴리던 막내 이모가 혹시나 해서 우리 집을 찾아왔다고. 그러나 큰 언니의 사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 소리 못하고 오히려 있는 돈 다 털어 조카들 간식거리만 사다 주고 갔단다. 나도 그때가 기억난다. 이모가 신고 온 당시 서울 멋쟁이들이 신는 무릎까지 오는 긴 부츠를 직접 신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으니깐. 그렇게 이모들도 집에서 대어 주는 돈으로 공부한 게 아니라 각자 알아서 해야 되는 형편들이었기에 엄마는 누굴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본인의 딸들만큼은 여동생의 딸들과 비교조차 되지 않은 그런 자존심 상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악착같이 아버지와 싸웠다. 결국 그 싸움의 승자는 엄마였고 그 덕분에 작은 언니도 나도 인문계 고등학교를 별 소동 없이 진학할 수 있었다. 내가 아니 우리 자매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도 다 엄마의 자존심 때문일 줄도 모른다.
20년 후쯤 나와 남편의 뒷모습이 이러지 않을까...
당시 집안 형편을 뻔히 아는 나는 딸들에겐 유독 야박했던 엄마에게 학원 보내달라는 얘기는 차마 못했다. 하지만 수업 후 국민학교 바로 앞에 있던 피아노 교습소에 들어가는 친구들이 정말 얼마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어린 나에게 교습소 앞을 지나면 들리는 피아노 소리는 나와 그 안에 있는 친구들의 보이지 않는 신분의 차이 같은 걸 느끼게 해주는 것 같았다. 엄마 닮아 기죽기 싫고 자존심이 센 나는 나중에 긴 은행 달력 두장을 이어 붙어 뒷면에다 검정 크레파스로 건반을 그린 후 손가락으로 그 위를 두드리며 입으로 흥얼거리곤 했다. 그게 얼마나 한이 되었던지 결혼 후 아들이 7살이 되던 해 피아노 매장에 가서 중고도 디지털도 아닌 새 클래식 피아노를 거금을 주고 샀다. 그리고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바로 등록시켰다. 내 새끼들만큼은 피아노를 잘 치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공도 하지 않을 거면서 남자애를 중학교 마칠 때까지 피아노 학원을 다니게 했다. 요즘도 피아노 치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면 어릴 적 종이 건반을 두드리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조용히 오버랩된다.
작은애가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드디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나는 평생 숙원이었던 그림을 배우러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여러 번 덧칠로 수정이 가능한 유화보단 맑고 깨끗한 그래서 수정이 힘든 수채화가 더 멋있게 느껴져 모대학 평생교육원 수채화 과정에 수강신청을 하기로 했다. 사실 유화물감이 비싼 것도 수채화를 선택한 큰 이유 중 하나였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난생처음으로 나를 위해 산 미술용품들... 파브리아노 스케치북에 톰보우 4B연필과 지우개, 그리고 다양한 붓들. 무엇보다 전문가용 신한 36색 수채화 물감을 팔레트에 하나씩 짜 넣던 그 가슴 벅찬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이제 정말 나도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림이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걸 지켜보는 건 언제나 내겐 너무 흥분되는 일이다
그렇게 평생 염원과도 같았던 나의 그림 공부는 시작되었지만 여러 이유들로 특히 애들 때문에 계속 이어가지는 못했다. 그러다 다시 혼자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림이든 다른 공부든 뭐든 혼자서 하는 건 참 외롭고 힘들다. 누군가 피드백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과연 제대로 잘하고 있는지, 막히는 부분은 어떡하면 풀어 나갈 수 있는지 모두 스스로 생각하고 정해야 한다. 게다가 입시 학원에서부터 데생이나 선긋기 등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차곡차곡 배운 전공자들과 달라서 기본기 또한 많이 부족하다. 하지만 일단 시작한 그림은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어떻게라도 완성해보자 마음먹었다.
생각보다 잘 그려지는 그림도 있고 무언가 약간 아쉬운데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그런 그림도 있다. 그럴 때면 한 번에 모든 걸 완성시킬 생각은 접어두고 잠시 붓을 내려놓은 후 오며 가며 그림을 계속 쳐다본다. 그러면 조금씩 그 아쉬운 이유들이 객관적으로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유화와 달리 수채화는 수정이 거의 불가능해 한번 잘 못하면 돌이킬 수 없어 안 그래도 소심한 나는 작은 작품 하나 완성시키는데 며칠이 심지어 몇 주까지 걸린다. 나이가 들수록 눈이 쉽게 피곤해져 그리 오랫동안 그리지도 못한다.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완성시킨 그림이 뭔가 맘에 안 들 때, 게다가 사진 속 풍경은 그림과 달리 여전히 너무 멋있을 때, 나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똑같은 사진을 손에 든다.
왼쪽 그림은 처음 그린 그림이고 오른쪽은 다시 그린 것들이다. 노력에 비해 안타깝게도 별 차이가 안난다
하지만 반드시 다시 그린 그림이 더 나으리란 법은 없는 것 같다. 심지어 별 차이가 안 날 때도 있다. 똑같은 그림을 두 번씩 그린다는 건 꽤나 재미없고 지루한 과정임에도 분명히 더 잘하고자 다시 그리는 건데 별 발전이 없으면 순간 힘이 빠지면서 의욕이 상실된다. 당장 그 그림이 꼴도 보기 싫어 한동안 파일 속에 꽂아 놓고 쳐다도 안 본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두 번 그린다고 하지만 사실 두 번째 그림은 완전히 새롭게 그리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앞서 그린 것을 자꾸 커닝을 하게 된다. 똑같은 잘못을 나도 모르게 따라 하고 있다. 게다가 더 잘하고 싶은 맘에 필요 이상의 기교를 넣어 오히려 더 지저 분하게 만들기도 하고. 결국 나는 같은 그림을 두 번씩 그리는 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그저 모지스 할머니처럼 그림 그리며 우아하게 늙고 싶을 뿐이다. 그녀는 76세에 그림을 시작하여 80세에 개인전을 열고 93세에는 타임지의 표지 장식까지 오르며 101세에 생을 마감했다. 그림을 시작한 동기도 거창한 게 아니었고 꼭 이걸로 성공하겠단 그런 생각 또한 없었다.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힘든 시절을 겪었던 그저 평범한 시골 할머니였다. 하지만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아주 행복하게 그림을 그렸을 게 확실하다. 나도 모지스 할머니처럼 그저 행복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을 뿐이다. 그래, 필요 이상의 열정은 지속성을 떨어지게 할 뿐 아니라 그만큼 빨리 마음을 식게 만드는 것 같다. 마치 냄비 근성 같은. 내 그림에 유독 눈이 많은 이유는 지난겨울부터 시작해서 올봄까지 너무 뜨거운 열정으로 열심히 그린 탓에 지금은 제 풀에 지쳐 몇 달째 아예 손을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 계절이 계속 겨울에 머물려 있다.
같은 그림을 두 번씩 그린 후 다짐했다. 적당히 하기로. 너무 뜨겁지 않게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며 식지 않을 정도로만 꾸준하게. 내 안에 그림을 그리는 행위만으로 행복이 샘솟을 정도까지만.
얼마전 마카롱 가게를 오픈 한 지인에게 선물한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