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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Feb 13. 2023

생일날의 풍경

습관이란 참 무섭다. 알람을 맞춰 놓지 않아도 몸이 시간을 기억하여 눈을 뜨게 만든다. 기다리고 있는 게 따로 있는 듯 이불속에 파묻혀 바깥소리에 집중한다. 곧 기대하는 것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간간이 들리는 자동차 바퀴의 미끄러지는 소리가 평소와는 다르다. 바퀴와 땅사이에 무언가가 하나 더 있다. 어제 일기예보대로 반가운 비가 내리고 있다. 덕분에 오늘 아침은 합법적으로 산에 가지 않고 간만에 늦잠을 즐길 수 있다. 누가 강요하는 것도 그렇다고 그렇게 운동이 될 만큼 높은 산도 아니지만 하루라도 건너뛰면 종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런 날씨엔 시시 탐탐 기회를 엿보며 본색을 숨기고 있는 게으름에 대한 합리화가 가능하다.

 '난 결코 순간의 달콤함에 쉽게 무너져버리는 그런 사람은 아냐. 그저 비가 오니 어쩔 수 없이 그냥 이렇게 이불속에 파묻혀 있는 거지'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다시 잠이 드는 것도 잠시 휴대폰 알림 소리에 놀라 눈을 뜬다. 분명 알람을 껐는데 게다가 처음 듣는 벨소리다. 허겁지겁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언제 나 몰래 해두었는지는 모르나 딸아이가 설정해 놓은 것임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본인의 생일을 알리는 알림이기에.



아이가 일 년 중 가장 좋아하는 날은 크리스마스와 본인의 생일이다. 물론 모두 의미 있는 날이기도 하지만 더더욱 손꼽아 기다리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이때만큼은 아이도 아무런 죄책감에 빠지지 않고 합법적으로 하루 종일 공부에서 손을 놓을 수 있다. 나와 달리 내리는 비가 반갑지 않은 아이는 계속 창밖을 주시한다. 모처럼 친구와 만나기로 했는데 이 비가 꽤나 성가실 것이다. 다행히 빗방울은 점점 가늘어져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오히려 눈부신 해가 나오기 시작한다. 아이의 기분은 지금 최고조에 달해 있다.



아이는 꽃단장에 여념 없다. 고도 근시라 3번을 압축해도 여전히 두꺼운 안경을 벗어던지고 대신 렌즈를 착용한다. 거울을 코앞까지 들여다보며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겨우 눈에 집어넣길 성공하는데 오늘따라 쉽게 렌즈를 착용했다며 아이는 기분 좋아한다.

"엄마, 뭐 입고 갈까?"

사실 이 순간이 제일 두렵다. 나갈 때마다 몇 벌씩 갈아입고는 입을 옷이 없다며 날 달달 볶는다. 그렇다고 옷을 안 사주는 것도 아닌데. 보아하니 얼마 전에 장만한 내 니트 상의를 입고 싶어 하는 눈치다. 바지까지 내 것을 빌려 입어 보고는 꽤나 만족해한다. 화장까진 하지 않지만 내 립글로스를 바르고 귀걸이까지 빌려 착용한 후 생일이라 특별히 주는 점심값 2만 원을 들고는 신이 나서 집을 나선다.



아이가 나가자 이젠 내가 바빠질 차례다. 요즘 공부 때문에 지쳐있는 아이 기분을 업 시켜주기 위한 무언가를 준비해주고 싶었다. 선물은 이미 아이가 갖고 싶은 걸로 사줬기에 생일 분위기를 확실히 낼 만한 가랜드를 만들기로 했다. 아이방을 뒤져 찾은 금박지와 검정 매직을 이용해 완성하고 나니 제법 그럴싸하다. 쓸데없이 꼼꼼한 성격 탓에 풍선과 함께 벽장식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꽤나 흘렸다. 이젠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아 있다. 부엌으로 출근해 생일 음식을 마련해야 한다.



별 다른 종교도 없고 점집을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 아이들 생일 땐 정성스레 상을 차려 삼신할머니께 절을 올렸다. 처음엔 지인이 하는 걸 보고 신기해서 그저 따라 흉내 냈지만 점점 나만의 의식에 마음을 다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남들보다 더 새끼들에게 정성을 쏟고 싶었다. 어느 신이든 누군가는 이 어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고. 가족들이 식사를 하기 전 안방에 상을 차려두고 지금도 횟수가 헷갈리는 절을 올린 후 간절히 빌었다. 아이들을 내게 보내줘서 감사하며 그저 건강하게만 해달라고. 지금도 그 마음엔 변함이 없지만 다 큰 아이에겐 굳이 필요 없다 하여 더 이상 상을 차려 절을 올리진 않는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그저 내 맘 편하자고 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대신 아이들이 좋아하는 걸 주문받아 장만한다. 이번엔 고기요리, 잡채, 무말랭이 김치를 주문받았다. 작년까진 식혜와 튀김류도 매번 주문하더니 올해는 굳이 안 해도 된단다. 제일 손이 많이 가는 두 요리가 빠지니 좀 수월한 느낌이다. 무 말랭이는 며칠 전 미리 만들어 익혀 두었고 일찍 감치 물에 담겨 핏물을 뺀 갈비는 양념을 만들어 절여둔다. 잡채 거리도 준비하고 찰밥을 위한 팥도 삶고 밤도 남편에게 깎아달라 부탁한다. 보통 때보다 소고기와 굴을 듬뿍 더 넣어 미역국도 끓인다. 생선도 한 마리 구워야 하지만 나와 달리 생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아이라 대신 생선 전을 준비한다.



실컷 놀다 집에 돌아온 아이는 벽에 장식된 가랜드를 보더니 '뭐야, 뭐야'를 반복하며 좋아한다. 작년 아빠 생일 때 본인이 직접 만든 고깔모자를 재활용해서 쓰고는 사진 찍기에 바쁘다. 딸을 키우는 재미는 바로 이런데 있다. 만약 아들인 큰 애였음 아마 별 반응이 없었을 테고 나도 굳이 이런 걸 준비하지 않았을 게다. 엄마의 정성을 알아준 딸아이의 맘이 고맙다. 서둔다고 서둘렸지만 평소보다 저녁 식사가 좀 늦어졌다. 아이에게 양해를 구하자 너그러이 이해해 준다. 아이는 기분이 좋은지 잡채가 약간 싱겁다는 내 말을 부정하며 맛있게 잘 먹는다. 행복해하는 딸아이를 보니 흐뭇하지만 왠지 마음 한 편이 살짝 시려온다.



식탁에 놓여진 음식들을 보니 자취하는 큰 애 생각이 난다. 소고기 미역국에 팥이 들어간 찰밥, 갈비찜, 잡채, 동태 전, 무 말랭이 김치까지 모두 큰 애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같이 있음 아마 제일 잘 먹었을 텐데 지금쯤 저녁이나 먹었나 모르겠다. 한 번씩 밤늦게 전화가 올 때면 그 시간에서야 저녁 먹을 준비를 한다 했는데. 사실 오전에 딸아이가 외출할 때부터 계속 큰 애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큰 애가 고등학생땐 생일이라고 친구들과 놀아라 용돈을 줘 내 보낸 적이 한 번도 없다. 생일이면 책상 근처도 안 가는 딸아이와 달리 아마 그날도 어느 정도 공부를 하게 했던 것 같다. 노는 걸 유독 좋아하는 놈인데 그저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앞선다. 그땐 뭐가 그리 항상 불안하기만 했는지.



식사 후 어제 오후 아이가 만들어 둔 케이크를 꺼내 초를 꽂아 불을 붙인다. 맘에 드는 케이크 사진을 골라 내게 보여주며 이대로 만들 테니 알아서 모든 재료를 준비를 해달라고 했었다. 아이는 생각만큼 만족스럽게 지 않는지 케이크 만들다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며 씩씩거렸고 나는 엉망진창인 된 부엌을 보고 속으로 삭여야만 했다. 그런데 하루 지나고 보니 어제보다 훨씬 그럴싸해 보인다. 게다가 그리 달지 않은 게 촉촉하고 부드러워 저녁을 이미 많은 먹은 후라도 자꾸 당긴다.



남편은 이제껏 한 번도 아이들 생일에 따로 선물을 준비한 적이 없다. 이번엔 아이가 좋아하는 초콜릿 몇 개를 일러주며 선물로 좀 사다 놔라 했다. 남편이 아이에게 건넨 쇼핑백 안에는 몇 개의 초콜릿과 함께 용돈이 든 빨간 봉투가 있다. 따로 말하지 않았는데 어쩐 일로 돈봉투를 준비하는 센스까지 발휘했는지 좀 대견스럽다. 아빠에게 항상 냉랭한 딸아이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게 내 눈엔 보인다. 당연히 없겠지만 큰 애 생일 때 혹시 따로 용돈 준 적이 있냐고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의 표정엔 예상했던 답변이 담겨 있다. 아이가 우리에게 서운해하는 이유를 알겠다며 하루 종일 큰애 생각이 많이 났다고 남편에게 얘기했다. 그러자 딸아이가 오늘은 자기에게 집중하란 말을 한다. 잠시 후 오빠로부터 초콜릿 쿠폰이 왔다는 딸애의 말에 왜 그리 반가운지 얼른 아이의 휴대폰을 확인해 본다.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마친 후 다음 일정으로 들어간다. 가족 해외여행에서 다 같이 마사지를 받은 후 생일 때마다 서로에게 발마사지를 해준다. 숍에서 받는 것처럼 정성을 다해하기에 아이는 무척 좋아한다. 나 역시 내 생일에만 누릴 수 있는 호사이므로 아이들이 해주는 마사지가 반갑다. 아이의 몸을 구석구석 손으로 꾹꾹 눌러가며 끈끈한 교감을 나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나와 딸아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어떤 건지 서로 잘 안다. 밤에 나란히 누워 딸아이가 좋아하는 스무고개 수수께끼까지 해주고 나서야 드디어 나의 모든 업무가 끝났다.(18살인 딸아이는 아직도 밤마다 나보고 스무고개 수수께끼를 하자 조른다) 아이의 기분을 보니 오늘의 평가는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평소보단 다소 과중한 업무로 이미 나의 모든 에너지는 소진되어 눈이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다. 다음 주엔 큰 애가 좋아하는 쿠키와 밑반찬, 김치를 만들어서 택배로 보내야지 이런 생각을 하며 어느새 스르르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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