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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Feb 26. 2023

베토벤에게 보내는 택배

맛있는 걸 먹게 되면 항상 누군가가 떠오른다. 국물이 진국인 칼국수집을 알게 되면 면류를 유독 좋아하는 J가,  젊은 손님들로 북적대는 핫한 맛집을 발견하게 되면 이런 곳에 가본 적이 없을 T가 생각난다. 너무나 착한 가격에 나름 맛도 괜찮은 음식점을 들르게 되면 나보다 가성비를 더 따지는 P가 떠오른다. 그리고 속으로 조용히 다짐한다. 다음에 꼭 같이 와봐야지 하고. 떠올릴 수 있는 누군가가 내게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생각이 유독 간절해질 때가 있다. 특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음식이 눈앞에 펼쳐져 있을 땐 더욱 그렇다. 먹는 게 차고 넘쳐나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상하게 새끼들 생각에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지 않는다. 집에 가서 가족들이랑 나눠먹으라고 넉넉히 챙겨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맛만 보라고 누가 조금 들고 온 것도 마찬가지다. 달달한 팥앙금이 든 떡 한 조각을 줘도, 유명한 제과점의 빵이라고 한 봉지를 내밀어도, 제주도 여행 갔다 사 왔다며 유달리 맛있는 한라봉을 하나 맛보라고 줘도 항상 똑같은 소리를 하게 된다.

"이거 들고 가서 우리 애 줘도 되지?"

나야 그걸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지라 싸 올 수 있는 것이면 따로 챙겨 와 아이들 입에 넣어준다. 그저 새끼들 입이 오물거리는 것만 봐도 흐뭇하다. 아무리 다 큰 새끼라 할지라도.




"엄마, 지금 택배 받았어"

기다리던 아들의 전화다.

"혹시 뭐 터진 건 없어? 녹아내린 건 없고? 쿠키는 안 부서졌어?"

어제 아이에게 택배로 국이며 김치, 반찬등을 보내놓고 혹시 내용물이 새어 나오진 않았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던 참이었다. 다행히 아이스박스에 꾹꾹 눌러 보낸 음식들은 모두 무사한가 보다. 뚜껑이 채 닫히지도 않아 남편이 내가 만든 쿠키를 몇 개 빼자고 했을 때 기어이 빈틈을 만들어 어떻게든 준비한 모든 걸 다 집어넣었다. 그래도 일부는 부서질 거라 예상했었는데 온전한 모습으로 도착했다니 고맙기 그지없다. 택배를 부치고 온 남편의 말이 우체국에서 취급주의 스티커를 박스에 두 군데나 붙여 주더라 했다.  



며칠 전 마트에서 찜용 갈비를 평소의 절반 가격으로 할인 행사 하기에 딸아이에게 먹일 요량으로 한 팩을 샀다. 오랜만에 맛보는 갈비찜을 맛있게 먹는 다른 식구들과 달리 난 자취하는 아들 생각에 잘 넘어가지가 않았다. 아들도 무척 좋아하는 건데 그러고 보니 집을 떠나 있는 몇 년 동안 먹이지 못한 것 같았다. 분명 지난 명절 때 담아준 김치도 다 떨어졌을 테니 갈비찜과 김치를 만들어 택배로 보내야겠단 생각이 순간 떠올랐다. 사실 아이가 2년 가까이 자취 중이라도 먹거리를 택배로 보낸 건 지난 12월에 김장을 해서 보낸 게 유일하다. 아이가 한 번씩 집에 오면 그때 해달라는 것들을 준비해서 돌아가는 두 손에 들려 보내게 했을 뿐이다. 하지만 왠지 지금 택배를 꼭 보내야 될 것 같았다. 그것도 엄마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것들로 가득 채워서.



지난 설날 집에 온 아이는 그동안 가슴에 담아 두었던 나를 향한 원망들을 모질게 내뱉었다. 모든 게 다 본인을 위해서였지만 나도 미숙한 부모인지라 당시 아이맘을 잘 헤아리질 못했다. 지금의 아이가 있기 위해선 그 과정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생각되나 지나고 나니 아쉬운 것도 후회되는 것도 많다. 세상 여느 부모들처럼 못해준 것만 떠올라 항상 미안하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이가 그리 까지 생각할 줄은 전혀 몰랐다. 너무나 충격적이었기에 한동안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참 신기하다. 다른 누군가가 내게 그리 말을 했음 아마 두 번 다시 볼 생각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이가 내게 퍼붓던 날카로운 비난의 화살들은 시간이 지나자 벌써 그 끝이 무뎌다. 분명한 건 나랑 싸우자고 그 말을 꺼낸 것은 아닐 테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고 엄마의 진심 어린 사과가 듣고 싶었기 때문일 거라 생각한다. 상처받았던 아이맘을 달래기 위해 사과도 하고 변명도 했지만 사실 그게 얼마나 와닿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더 이상 언급은 안 하고 있지만 그 일이 있은 후 아이도 나도 아직 서로 좀 어색해하고 있다. 물론 시간이 더 지나면 이럴 때 유용한 망각의 힘을 빌릴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이번에 오롯이 나만의 노력으로 그 어색함을 묽게 만들고 싶다. 엄마가 만든 음식을 좋아하는 아이니 내가 뭘 해야 할지는 이미 정해졌다.




마트에서 일주일 내내 할인하던 갈비가 막상 사려고 하니 행사가 끝나버렸다. 아예 갈비를 갖다 놓지도 않는다. 이미 갈비찜을 해서 보내겠다 큰 소리를 쳤는데 낭패다. 아무래도 갈비찜은 다음 달 아이 졸업 연주회 때 직접 들고 가는 게 나을 것 같고 이번엔 다른 메뉴로 변경하기로 했다. 오랜 시간 정성을 쏟아야 하는 음식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보니 뜨근한 곰국에 밥을 말아 갓 담은 김치와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게다가 곰국은 냉동시켜 뒀다가 마땅한 게 없을 때 꺼내 먹으면 딱이다. 하지만 곰국을 한 번이라도 끓여본 사람은 이게 그리 만만치 않은 일이란 걸 잘 알 터이다.



곰국을 끓이는 이틀 동안 온 집 안의 유리란 유리는 속살을 숨길 수 있는 불투명옷을 덧입게 된다. 딸아이는 나이가 그리 들어도 아직 손가락으로 베란다 유리창에 낙서하고 싶은 욕구를 종종 내 비친다. 이 모든 걸 막기 위해선 추운 날씨에도 베란다 문을 열어 집안에 김이 서리지 않게 해야 된다. 게다가 곰국을 비롯한 뼈째 푹 고은 국물류를 전혀 먹지 않는 내겐 그 냄새가 참으로 곤욕스럽다. 곰국은 그래도 자주 안 만들지만 가족들이 좋아하는 감자탕을 준비하는 날이면 끓이는 내내 울렁이는 속을 달래야 하다. 다행히 이번엔 잡뼈 없이 사골만 끓여서인지 냄새가 참을만하다. 곰국을 끓이다 보면 그 무거운 들통을 몇 번씩 들어야 한다. 아직 테니스 엘보가 완치되지 않아 팔이 부실한 관계로 남편과 딸아이에게 한 번씩 도움을 요청하긴 했다. 딸아이가 곰국과 뼈로 가득한 들통을 들어보고는 이걸 혼자 어떻게 들었냐고 깜짝 놀랐다. 하지만 매번 부르기도 그래서 나중엔 될 대로 되란 식으로 혼자 감당했다. 핏물을 뺀 후 끓이고 식혀 기름을 걷어내는 일을 3번 반복하여 이틀이란 시간을 고스란히 투자한 끝에 깔끔한 곰국이 만들어졌다. 아이가 먹기 좋게 일인분씩 소분하여 사태까지 삶아 넣은 후 냉동실에 얼려 둔다.



전화를 해서 뭐가 먹고 싶은지 물어보니 아들 입에서 제일 먼저 나온 소리가 잡채였다. 그러고 보니 아이는 어릴 때부터 잡채를 좋아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금방 해서 먹는 잡채는 좋아하지만 식은 걸 다시 데워먹는 건 싫어한다. 그래서 항상 먹을 만큼만 만들어 먹는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아이도 역시 그렇긴 하단다. 사실 재료준비가 귀찮지 만들기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기에 아이에게 직접 잡채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어차피 잡채 속 야채는 손도 대지 않고 고기와 당면만 쏙쏙 골라 먹는 아이다. 일단 소고기를 불고기 양념한 후 역시 한번 먹을 만큼 소분해서 냉동했다. 어느 정도 넣어야 할지 가름이 안될게 분명한 당면도 일인분씩 랩에 싸두고 삶는 요령을 일러두었다.


   

아이는 내가 구워주는 오트밀 쿠키를 좋아한다. 고3 때는 매일 바닐라 라테가 담긴 보온병과 함께 쿠키를 가방에 넣어주었다. 버터대신 카놀라유와 우유를 사용하고 밀가루양을 줄여 오트밀을 더 많이 넣는다. 아이의 취향을 고려해 초코칩도 한 움큼 넣어주고 반죽의 반은 코코아 가루를 첨가해 2가지 색깔의 쿠키로 만든다. 견과류와 말린 크린 베리도 듬뿍 다져 넣고 설탕량까지 줄여 구우면 정말 맛있고 영양만점의 오트밀 쿠키가 완성된다. 2개씩 넣어 포장해 보내면 아마 먹기도 보관도 편할 것이다.



아이가 먹는 김치의 종류는 딱 3가지이다. 배추김치와 깍두기 그리고 무말랭이 김치 그 외의 것은 손도 안된다. 배추김치도 갓 담은 것이어야 하고 일단 익으면 주로 찌개나 볶음용으로만 사용한다. 최대한 많이 보내주면 좋다 하여 알배추를 3개 사 와 김치를 담그고 무말랭이 김치도 준비했다. 자취하면 제일 먹기 힘든 요리가 생선일 것 같아 생선조림을 좀 만들어 보낼까 물으니 아이는 좋아라 했다.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김치찜과 멸치볶음, 동태 전, 함박 스테이크까지 만든 후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났다.



너무 무거우면 박스가 터질 수도 있고 그래서 내용물이 훼손된다 하더라도 보상은 힘들다 하여 아이스박스를 중간걸로 준비했다. 눈대중으로 박스를 재활용장에서 들고 왔지만 아무래도 좀 작은 듯하다. 천혜향까지 2개 집어넣고 싶은데 아무리 남편이 위에서 뚜껑을 눌러도 꽉 닫히지가 않는다. 하지만 애써 준비한 걸 빼고 싶진 않다. 결국 몇 번의 테트리스 쌓기를 시도한 끝에 불안하게나마 박스 밴딩 작업이 마무리되고 내 손에서 떠나보냈다.




택배 상자를 열어보는 아들에게 일일이 먹는 방법과 보관법을 다시 한번 설명했다. 아마 한 달은 그런대로 잘 먹을 수 있을 거다. 전화말미에 공부는 열심히 하고 있냐고 습관처럼 물으려다 피아노 연습은 잘되고 있냐고 얼른 바꿔 물었다. 4학년인 아이에게 더 이상 공부로 부담 주고 싶지도 않지만 이미 고등학생 이후로 내가 하란다고 하는 아이도 아니다. 다음날 말 졸업 연주회에서 아이는 베토벤의 곡을 연주할 거라 한다. 초등학교 시절 자그마한 몸을 버겁게 움직여 가며 다소 결렬하게 연주하던 베토벤이 떠올랐다. 아이에겐 쇼팽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왔는데 또 내 생각이 달랐다. 23살의 아이가 연주할 베토벤은 또 어떤 느낌일지 한 달 후가 기대된다. 아마 내 눈엔 초등학교 시절 엄마등쌀에 못 이겨 마지못해 피아노를 열심히 치던 아이의 모습이 조용히 오버랩될지도 모른다.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궁상맞게 훌쩍이지나 말아야 될 건데. 그나저나 그땐 정말 갈비찜을 꼭 해서 들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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