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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Apr 14. 2023

봄을 맛보는 방식

이른 아침 숲 산책길, 이상하게도 내 눈엔 쑥만 자꾸 들어온다. 숲은 이미 사람 맘을 괜시리 설레게 만드는 봄꽃들로 풍성하다. 하지만 아까부터 계속 발아래를 두리번거리며 꽃구경이 아닌 쑥구경에 흠뻑 빠져 있다. 햇빛 잘 드는 곳이면 아무 데나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있는 흔하디 흔한 쑥이건만 유독 맘이 가는 이유를 가만 추측해 본다. 그건 아마 내 속엔 수렵과 채집 생활에 익숙한 머나먼 조상들의 피가 그 누구보다 뜨겁게 흐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제법 통통하게 살이 오른 쑥을 보자 마음이 다급해진다. 더 자라 세어지기 전에 빨리 쑥을 캐러 봄소풍을 가야 한다. 쑥을 캐기 위해 소풍을 가는 건지 소풍을 간 김에 쑥을 캐는 건지 그건 좀 헷갈리지만 하여튼 빨리 서둘려야 1년 내내 먹을 보드라운 쑥을 얻을 수 있다. 이곳은 쑥이며 봄나물의 채취가 금지되어 있다. 진입로에 위치한 가야 고분들이 두더지 때문에 여기저기 몸살을 앓고 있단다. 지자체에서 많은 돈을 들여 가꿔놨기에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두더지 퇴치용 약이 곳곳에 뿌려졌음을 알리는 플랫카드가 눈에 띈다. 물론 숲 깊숙이까진 약이 닿지 않았겠지만 그런들 이곳에서 쑥을 캘 맘은 전혀 없다. 나름 채집 활동을 할 때 누군가 다가와 말을 건네오는 순간이 성향상 무척 부담스럽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쑥을 캐는 건 질색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용두산 타워가 한눈에 보이는 도심 한복판이었다. 쑥을 캐기 위해선 버스를 타고 어디든 가야 했고 그곳은 언제나 태종대였다. 당시 태종대 입구 근처에 땅주인이 누군지도 모르는 이 있었다. 워낙 작은 규모라 엄마와 함께 남의 밭두렁에 자리 잡고 앉아 그곳의 쑥을 몽땅 다 캐와도 기껏해야 한 두 번 국 끓일 양밖에 나오지 않았다. 두 명의 버스 왕복비를 감안하면 차라리 그냥 시장에서 사는 게 더 경제적일 수 있겠지만 그게 엄마와 나만의 봄소풍이었다. 오래전 여인들이 봄이 되면 먹거리와 조리도구를 챙겨 화전놀이를 가듯 엄마와 나도 도시락을 싸서 우리 식의 봄을 만끽하러 가곤 했다. 지금처럼 차가 있었더라면 더 나은 소풍 장소를 찾을 수 있었을 테고 죄지은 거마냥 남의 밭에서 눈치 보며 쑥을 캐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 모든 기억들은 서서히 스며들어 봄이 되면 몸에 익은 대로 도시락을 준비해 쑥을 찾아 길을 나선다. 때가 되면 살랑살랑 봄바람이 내 귀에 대고 속삭인다. 쑥 캐러 갈 시간이 되었으니 늦기 전에 서두르라고.



결혼 후 봄소풍의 짝지는 엄마에서 남편으로 바꿨다. 태어나 한 번도 쑥을 캐러 간 적이 없었을 심지어 쑥국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남편은 지금껏 묵묵히 동행해주고 있다. 그는 아마 알지도 모른다. 내게 있어 쑥을 캔다는 건 단순히 쑥을 맛보기 위함이 아닌 나만의 방식으로 봄을 음미하는 거란 걸. 따뜻한 햇살아래 봄바람을 느끼며 쑥을 캐고 도시락을 까먹는 그런 소박한 일들이 나에겐 꽃구경보다 더 좋은 봄놀이다. 하지만 내가 쑥을 캐러 간다면 왜 그런 수고를 사서 하냐며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거기다 약간 얄미운 듯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참 부지런도 하다"

이제껏 돈을 주고 쑥을 사 본 적은 없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틀린 소리도 아니다.



엄마 옆에 군소리 없이 쪼그려 앉아 쑥을 캐던 국민학생은 어느새 50대 초반이 되었다. 한동안 신이 나서 쑥을 캐다 보면 일어설 때 '에구구'하는 소리가 절로 다. 게다가 앞으로 굽힌 자세로 장시간 있다 보니 나중엔 허리와 등이 한 번에 쫙 펴지지도 않는다. 스로모션으로 서서히 펴야만 그제야 일직선으로 똑바로 설 수 있다. 허리가 좋지 않은 남편은 쪼그려 앉는 행동 자체를 피해야 하니 수시로 일어나서 몸을 펴줘야 한다. 해가 갈수록 남편 몫의 비닐봉지는 그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 내다 팔 것도 아니고 우리 먹자고 하는 일이니 무리하지 말고 쉬어 쉬어하라 서로를 챙긴다. 하지만 쑥을 캐는 것으로 일이 다 끝나는 건 아니다.



집에서 다듬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다. 사람 맘이 참 간사한 게 집으로 돌아올 땐 너무 적게 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더니 손질하다 보면 지겹고 귀찮아 이번엔 또 뭘 이리 많이 캤나 싶다. 본격적인 후유증은 그다음 날부터 시작된다. 생전 하지도 않던 일을 2시간 가까이 쪼그려 앉아하다 보니 자고 일어나면 허리, 골반, 다리등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하반신뿐 아니라 온 전신이 다 아픈 게 제대로 몸살이 난다. 예전엔 하루 이틀 정도 지나면 괜찮아졌지만 이젠 며칠은 꼼짝 말고 쉬어야 몸이 다시 회복된다. 그럼에도 비용대비 너무나 비효율적인 쑥 캐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다.



항상 가족들 위주로 식사를 준비하지만 가끔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모두들 그리 반기지 않는 쑥국을 오직 나만을 위해 끓인다. 냉동실엔 항상 얼린 쑥이 준비되어 있다. 그게 다 떨어지면 다음 해 봄까지 마냥 기다려야 하니 남은 봉지를 계산해 가며 최대한 아껴 먹는다. 쑥국은 언제 먹어도 맛있긴 하지만 특히 여름 장마철이나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 끓여 먹으면 정말 제격이다. 밥까지 말아 김치를 얹어 먹다 보면 내겐 밥도둑이 따로 없다. 이번에 캐 온 걸 다듬어 소분해 보니 8 봉지가 나온다. 올 한 해 내가 쑥국을 맛볼 수 있는 기회는 딱 8번이다. 예년에 비해 많이 부족하지만 아껴먹는 수밖에. 그리고 오늘 저녁 그 첫 국을 끓인다.



우선 재료들을 아끼지 않고 특별히 신경 써서 육수를 준비한다. 그다음 된장과 들깻가루, 찹쌀가루, 마늘 간 것 그리고 약간의 육수를 블라인더에 같이 넣고 돌려 모두 잘 어울려지게 한 후 준비한 육수에 풀어준다. 이때 된장을 너무 많이 넣으면 상대적으로 쑥향이 약해지므로 된장은 조금 적게 넣고 부족한 간은 국간장으로 대신한다. 찹쌀가루는 굳이 안 넣어도 되지만 개인적으로 다소 걸쭉하게 끓인 걸 좋아해서 약간 첨가한다. 비싼 들깻가루로만 그 농도를 맞추려면 감당이 안된다. 국물이 팔팔 끓기 시작하면 이제 깨끗이 씻어둔 쑥을 넣어 국물에 쑥향이 가득 우러나게 한다. 국이 다 끓여지고 드디어 올해 첫 쑥국을 맛볼 차례다. 그런데... 살짝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맛이다. 뭐든 너무 잘하려고 하면 오히려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곤 하는 게 바로 우리네 인생이다. 너무 힘을 줬나 보다. 사실 많이 먹을 욕심에 처음부터 육수를 너무 많이 붓고 끓인 게 화근이었다. 그래도 내게 너무 반가운 맛이지만 보아하니 남편의 입맛엔 별로 인 것 같다.



다음날 남은 국에 밥을 말아먹으며 아직 내 마음에 채 도달하지 않은 봄을 천천히 느껴본다. 요즘 이사 문제로 마음이 뒤숭숭하여 봄을 제대로 만끽하지 못하고 있는 터이다. 게다가 며칠 변덕스러운 쌀쌀한 날씨로 한동안 몸을 잔뜩 웅크리고 다녔다. 그릇 가득 따뜻한 국을 먹고 나니 어... 이게 뭐라고 온몸에 온기가 쫙 퍼지면서 촉촉하게 땀까지 밴다. 집 보러 다닌다 고생 많다며 이것 먹고 힘내 쑥국이 내게 위로를 건네는 듯하다. 이제껏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혹시 내 영혼의 국은 쑥국이 아닐까. 가끔 누군가의 온기가 담긴 위로나 격려가 절실히 그리운 순간이 있다. 그때 나만을 위한 쑥국을 끓여 먹으며 스스로를 토닥여 야겠단 생각이 든다. 이 따뜻한 쑥국 한 그릇을 시작으로 이젠 내 마음에도 본격적인 화사한 봄이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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