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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an 26. 2023

이 나이에 입덧을?

지난밤 너무 일찍 잠자리에 든 탓에 아침에 일어나니 정신이 약간 멍해지려고까지 한다. 병원에서 당분간 운동은 하지 말라고 하니 일단 오늘 하루는 아침 숲산책을 건너뛸 생각이다. 이른 시간이라 달리 할 일은 없고 아직 자고 있는 딸아이의 방에 들어가 본다. 여자 아이의 책상이라 도저히 믿기지 않을 만큼 어질러진 책상 위로 펼쳐진 학습 플래이너가 눈에 띈다. 가지런히 적힌 어제 날짜의 학습 계획들 옆엔 실천여부에 따라 빨간색 동그라미들이 표시되어 있으나 그러지 못한 것도 여럿이다. 아무리 혼자 알아서 잘하는 아이라도 내가 영어공부를 하든 글을 쓰든 옆에 있는 거랑 혼자 먼저 자러 들어가는 거랑은 다를 수밖에 없다. 오늘부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심해 보이나 실은 날카로울 만큼 예리한 감시자의 역할에 충실할 생각이다. 하지만 어제 그리 많이 잔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속이 울렁거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면 이 괴로움이 사라지려나 그래서 잤을 뿐이다.



음식물 냄새 특히 김치 냄새만 맡으면 속이 뒤집어져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어제 낮엔 김치를 접시에 덜어내다 도저히 못 참고 그대로 화장실로 뛰어들어가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속을 개어냈다. 결국 남편에게 각자의 점심 해결을 부탁하고 그대로 자리에 누워 정신없이 3시간을 내리 잤다. 푹 자고 일어나면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저녁때가 되어 돼지고기와 잘 익은 김장 김치로 가족들 모두 좋아하는 김치찜을 만들려는 순간 또다시 미친 듯이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평소 타이밍 하나는 참 기가 막히게 못 맞추는 남편이 때마침 고맙게도 도와주려 나왔다. 얼른 모든 걸 위임하고 한 걸음 물러나 이것저것 말만 거들었다. 그래봤자 정말 한 발치 옆이다. 자극적인 김치 냄새가 내 후각을 후비파고 텅 빈 위까지 스멀스멀 다가오자 또다시 속이 미친 듯 울렁이기 시작했다. 결국 이 모든 고통을 잊기 위해 딸아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른 저녁부터 다시 잠자리에 들어가 내리 11시간을 자고 난 후이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 내 인생에 이와 비슷한 시기가 두 번 더 있었다.



아이 둘을 임신하고 남다른 입덧으로 너무나 힘든 몇 달을 보내야 했다. 음식 냄새가 역해 아예 아무것도 못 먹거나 아님 한두 가지 입에 맞는 것만 겨우 먹을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입덧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위는 약간의 빈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속이 조금 허하다 싶으면 그때부터 울렁임이 시작되어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이 어떠한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잡초같이 질긴 생존 의지는 나름의 처방전을 터득하게 만들었으니 그건 바로 끊임없이 무언가를 먹어 그 빈틈을 메꾸는 것이었다. 희한한 게 그리 먹으면 훨씬 나아졌고 살기 위해 단지 살기 위해 열심히 먹었다. 당시 아이를 낳으러 병원에 갔을 때 최종 몸무게가 바로 오늘 아침 몸무게보다 정확하게 29kg이 많았으니 그게 내 인생 유일무이의 70kg대의 몸무게였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올라가는 체중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숫자는 20년도 더 전 결혼식을 앞둔 당시의 것이었으며 보다 거슬려 실연의 아픔으로 식음을 전폐하던 꽃다운 시절의 그것과 똑같았다. 반가움도 잠시 어제 속이 그리 울렁거린 것에 대한 이유가 정확히 파악되었다. 텅텅 빈 뱃속 탓에 평소 몸무게보다 2kg이 빠져 있다. 사실 그리 많이 먹진 않아도 배고픈 건 도저히 못 참는다. 배가 고파 짜증을 내고 주위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단순한 정도가 아니다. 맨 먼저 손이 덜덜 떨리는 것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식은땀이 다. 다음 순서로 온몸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는다. 이걸 해결하려면 엄청난 양의 음식물을 무엇이든 속에 욱여넣어 짧은 시간 내에 위를 가득 채워야 한다. 위가 이젠 그 정도면 됐다고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 벌벌 떨면서 미친 듯이 먹는 내 모습은 가히 섬뜩할 정도다.




작년 9월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대장에 특이한 모양의 용종이 하나 발견되었다. 쉽게 제거가 불가능한 거라 따로 수술을 받아야 된다고 했다. 그러나 검사를 받았던 대학병원은 대기가 너무 많아 꼬박 4달을 기다려 바로 어제 수술을 받고 집으로 왔다. 다행히 우려했던 천공의 위험도 없었고 내시경실에 들어간 지 40분 만에 내 발로 걸어 나왔으니 큰 시름은 일단 놓았지만 문제는 바로 그다음이었다.



2년에 한 번 는 검사에서 매번 반갑지 않은 용종이 하나씩 발견되어 제거를 해왔던지라 그때처럼 이번에도 집으로 돌아가면 바로 밥을 먹어도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반쯤 정신이 없는 상태로 잠에서 깨어나 간호사분의 청천벽력 같은 주의사항을 듣고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8시간 동안 무조건 금식이란다. 그 시간이 지나야 겨우 물을 마실 수 있고 그리고 별 탈 없으면 또다시 한 시간 뒤인 그러니깐 정확히 저녁 7시에서야 겨우 흰 죽을 먹을 수 있단다. 전날 오후 6시부터 비위 거슬리는 약을 먹어가며 뱃속의 모든 것을 텅텅 비워놨는데 여전히 그 고통스런 공허의 상태를 유지해야 된다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이랑 뜨근한 칼국수로 한동안 허했을 내 위를 살살 달래주려 했는데 실망도 이런 실망이 없다.



잠도 제대로 깨지 않은 상태로 비몽사몽 남편의 손에 이끌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그러나 내 몸 하나 쉴 시간도 없이 정작 나 자신은 먹지도 못할 점심을 남편과 딸아이를 위해 준비해야 했다. 그들이 먼저 '오늘 점심은 우리가 알아서 해 먹을 테니 부엌으로 출근할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말고 쉬어' 이런 소리를 하길 기대했건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럴 기색이 없다. 하긴 딸애를 낳고 퇴원 후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산모를 위해 미역국을 준비해 놓기는커녕 오히려 내가 자신의 밥을 차려 줄거라 기대하고 날 가만 바라만 보던 남편이다. 산후 도우미는 그다음 날부터 오기로 되어 있어 결국 퇴원하자마자 내 손으로 직접 미역국을 끓여야 했다. 서럽던 그 기억은 다시 마음속 어딘가에 쑤셔 넣고 서둘러 점심을 준비했다. 그러나 빈 속에 김치 냄새를 맡았더니 입덧처럼 속이 울렁대고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저녁이 되자 이젠 약간씩 손까지 떨려왔다. 7시가 되자마자 아주 묽게 끓인 흰 죽을 몇 스푼 겨우 뜨고 남편에게 설거지를 부탁한 후 바로 잠자리로 들었다. 몸이라도 덜 움직이면 반드시 먹어야만 상황이 종료되는 그런 증상들은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서.




드디어 무언가 먹을 수 있는 날이 밝자 살짝 흥분되기까지 한다. 1주일 정도는 여전히 부드러운 것과 푹 익힌 것만 먹어야 하기에 아침은 촉촉한 프렌치토스트와 커피로 간단히 하기로 했다. 이틀 만에 커피가 내 안으로 들어오고 카페인들이 제 집마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자 드디어 온몸에 전기가 들어온 듯하다. 점심은 두부와 무 그리고 소고기와 굴을 넣어 시원하고 맑게 끓인 탕국을 준비했다. 물론 내 국그릇에는 두부와 무만 가득 담은 채. 탕국을 끓일 때 제일 중요한 점은  재료에서 우러나오는 지저분한 불순물을 남김없이 깨끗하게 걷어내어야 맑디 맑은 국물을 맛볼 수 있다. 당분간 자극적인 건 먹으면 안 되기에 식단에 조금 신경을 써본다. 냉장고에서 어느새 시들해지고 있는 오이를 꺼내 양파랑 달달 볶아 나물을 만들고 약간 심심한 듯 간장으로 조린 어묵으로 나를 위한 밥상을 차려본다. 냉동실에 있던 밥을 전자레인지에 데워 국과 간단한 반찬만으로 며칠 만에 밥다운 밥을 먹는데 그리 만족스러울 수가 없다. 이미 지난밤의 괴로움은 새까맣게 잊은 지 오래고 나도 모르게 두 번째 국을 푸려 간다.



며칠 만에 가루가 아닌 쌀 알 그대로의 밥을 꼭꼭 씹을 수 있게 되자 마치 귀양 떠나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지향하는 선비가 된 듯하다. 밥 한 공기에 흐뭇해져 세상 남 부러울 없다. 며칠 동안 성실하지 못한 주방장덕에 덩달아 변변찮은 밥상을 마주해야 했던 딸애가 내가 푸념처럼 뱉은 소리에 낄낄대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독립 운동가는 절대 될 수 없어. 다른 고문 하나 없이 그냥 하루 이틀만 굶겨놔도 내가 무슨 소릴 할지 나도 몰라. 그때 안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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