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니 Jan 16. 2023

완벽한 맛을 위한 순서


아침 숲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 잠시의 지체도 없이 부엌으로 출근해 하루의 첫 임무를 완벽히 수행해야 하기 위해선 허투루 보낼 시간이 전혀 없다. 수시로 벽시계를 힐끔거리며 한 번에 일어나는 법이 결코 없는 아이를 5분 간격으로 그 이름을 부른다. 본인이 일어나든 말든 30분 안에 모든 아침 식사 준비를 끝내 나야 딸아이의 잔소리를 피할 수 있다. 그리 부족한 시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 있는 시간도 아니다. 학기 중 아이에게 있어서 아침밥은 늘 잠이나 거울 보는 시간에 밀리기 마련이다. 등교 시간에 쫓겨 딱 새 모이만큼만 먹고 등교하는 아이에게 방학 때만이라도 든든히 먹이고 싶은 게 바로 어미의 마음이다. 따끈한 수프와 샐러드, 샌드위치나 토스트 같은 빵종류, 간단한 달걀요리와 몇 종류의 과일 그리고 나를 위한 커피까지 이 모두를 준비하려면 항상 빠듯하다.



그렇다고 좀 더 일찍 일어나 산으로 가는 건 나 같은 겁보에겐 다소 무리다. 그리 이른 시간은 아니지만 겨울에는 태양도 늦잠을 잔다. 산입구에 도착하면 그야말로 온 세상이 암흑천지다. 그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을 때면 마치 속을 알 수 없는 시커먼 괴물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 종종 든다. 그래도 어느덧 햇수로 4년 차라 이젠 새벽 산의 어둠이 그리 낯설거나 두렵지는 않다. 달을 벗 삼아 휴대폰 불빛 하나에 의지해 조심조심 산을 오르다 보면 그제야 주위가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한다.



얼른 옷을 갈아입고 식사 준비를 서두르지만 가끔 그 순서가 꼬여 머뭇거릴 때가 있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 갑자기 버퍼링에 걸린 듯 한 손엔 달걀 다른 한 손에 우유를 든 채 그대로 얼어붙어 서 있는다.

'가만, 지금 스크램블을 만들면 먹을 땐 다 식어 있을 텐데. 빵부터 준비할까? 아냐, 그것도 지금 구워놓으면 눅눅해질 거야. 그럼 뭐부터 하지? 커피부터? 그것부터 하다간 다른 게 늦어질 수도 있는데'

아이의 방학이 시작되고 아침마다 겪는 일상이다.



만약 아침에 한식을 먹는다면 순서에 있어 그리 신경 쓸 건 없다. 아침부터 거하게 먹진 않으니 따뜻한 국과 간단한 밑반찬만 있으면 된다.(하긴 매번 다른 국을 끓이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불이 아이를 놓지 않는 건지 아이가 이불을 부여잡고 있는 건지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평소보다 아이가 다소 늦게 식탁에 앉더라도 얼른 국만 다시 데우면 된다. 하지만 딸아이는 밥과 국으로 이루어진 한식을 아침 식사로는 부담스러워한다. 덕분에 언제부턴가 우리 가족의 아침 식사는 언제나 아메리칸 블랙퍼스트이다. 그런데 요게 약간의 순서를 필요로 한다.



자고로 음식에는 그에 딱 맞는 온도가 있기 마련이다. 뜨겁게 먹어야 하는 건 뜨겁게 차갑게 먹어야 하는 건 또 차갑게 먹어야 음식의 맛을 가장 풍부히 느낄 수 있다. 가급적 그 궁합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정해진 시간에 아침을 차려 놓는다는 건 순서에 있어 꽤나 고민스럽다. 그렇다고 내가 딸아이와 남편 옆에 붙어 서서 그들이 하나씩 그릇을 비울 때를 지켜보다 얼른 다음 요리를 식지 않게 내어놓는 그런 짓까진 하고 싶지 않다. 나도 밥 먹는 순간만큼은 엉덩이를 자리에서 뜨기 싫어할 뿐 아니라 아침 운동을 마친 후라 허기진 배를 가까스로 움켜 잡고 있다.



처음엔 달걀 요리로 오믈렛을 메뉴로 선택했지만 그 탐스러운 모양을 다듬기 위해선 시간과 정성이 좀 요구된다. 하지만 그걸 먹는 사람들이 전혀 알아주지 않으니 굳이 바쁜 아침에 공을 들여 만들 필요까지는 없는 듯했다. 간편히 조리되고 들어가는 재료와 맛 역시 똑같은 스크램블로 바꾼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수도. 우리 집만의  차별성이 있다면 우유양을 조금 늘려 부드러움을 한결 더하고 톡톡 씹히는 재미가 있게 캔 옥수수를 첨가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슬라이스 치즈를 찢어 넣어 모든 걸 어우러지게 만든다. 그러나 프라이팬에서 차가운 접시로 옮겨지고 조금만 시간을 지체해도 그 풍부한 맛을 제대로 느끼긴 힘들다. 사실 뜨거운 프라이팬 로 먹는 게 제일 맛있다. 물론 식어도 그리 나쁘진 않지만 일본식 달걀찜처럼 부드럽던 스크램블이 다소 단단해진다. 살포시 녹아 달걀에 푹 안겨 그 부드러움과 윤기에 한몫 기여한 치즈도 굳어버린다. 그리고 나처럼 약간 예민한 후각을 가진 사람에겐 달걀 비린내가 보너스로 주어진다.



빵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아침엔 누가 뭐래도 토스트기에 갓 구운 바삭한 빵에 잼과 버터를 발라 먹는 것만큼 이상적인 것은 없다. 살짝 그을려 구수한 맛이 더해진 식빵 위에 직접 만든 너무 달지 않은 오렌지 마멀레이드나 딸기잼, 무화과잼등을 약간의 버터와 함께 할 때면 흡족한 미소가 저절로 내 입가에 걸린다. 약간 퍽퍽하다 느껴질 때 커피까지 홀짝이면 여느 호텔의 브런치가 전혀 부럽지 않다. 게다가 아이가 식탁에 앉기 1분 전 재빨리 토스트기에 빵만 넣으면 되기에 간편하기도 하고. 하지만 언제부턴가 가만 앉아 자기가 먹을 빵에 버터와 잼을 바르는 그 단순한 일을 모두 귀찮아한다. 말랑말랑한 모닝빵에 칼집을 내어 그것들을 미리 숨겨 두는 수고를 거쳐야 겨우 먹어준다. 하긴 잠에서 막 깨 비몽사몽 아무런 의지도 없는 그들에게 그런 중노동(?)을 시키는 건 무리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우유를 넉넉히 부은 달걀물에 식빵을 푹 담가 촉촉하게 구운 프렌치토스트를 좋아한다.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때때로 바나나까지 얇게 썰어 올리고 초코시럽을 무심한 듯 지그재그로 뿌린 후 마지막에 슈가 파우더나 시나몬 가루로 장식한다. 그렇게 만든 프렌치토스트는 비주얼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양학적으로도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다. 하지만 역시 핵심은 프라이팬에서 접시로 옮기자마자 바로 먹는 것이다. 달걀에 의해 보기 좋게 살짝 부풀어 오른 모습이 푹 꺼지기 전에. 그리고 그 따뜻한 촉촉함이 어느새 차가운 축축함으로 다가와 다소 질겨진 식감까지 얻기 전에.



따뜻한 수프를 끓이는 날이면 빵은 오히려 좀 더 바삭한 걸로 준비한다. 버터를 살짝 발라 프라이팬에서 노릇노릇 구운 후 슈가 파우더를 솔솔 뿌린 식빵은 단순하지만 기대이상이다. 한 입 베어 물면 미각과 청각을 동시에 만족시켜 주는 경쾌한 바삭함, 후각을 자극하는 은은한 버터의 향미 게다가 약간 짭조름한 식빵에(생각보다 식빵엔 나트륨 함량이 높다) 달달한 슈가 파우더를 더하여 누구나 만족할 수 있는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단짠의 조화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뜨거울 때 먹어야 가능한 것들이다.



수프도 사실 국처럼 그리 간단히 데우기만 하면 되는 건 아니다. 수프를 끓일 때 주로 사용하는 옥수수, 단호박, 고구마등은 뜨거울 땐 그 농도가 적당해 보이더라도 재료 자체가 가진 녹말성분 때문에 식으면 다소 뻑뻑해진다. 뷔페처럼 일정한 온도를 계속 유지할 용기가 가정집에 있긴 만무하니 그릇에 담기 직전 다시 우유를 첨가하여 농도를 맞춰 데워야 한다.



이렇듯 식으면 맛이 반감이 되는 것들이 그날 아침 메뉴에 겹칠 때면 순서를 잘 정해 조리해야 한다. 사실 일어나자마자 눈도 제대로 못 뜬 채 입을 벌려야 하는 저 두 사람은 내가 식은 걸 주나 뜨거운 걸 주나 별 생각이 없다. 보다 완벽한 아침을 먹을 욕심에 나 혼자 음식 온도를 예민하게 따질 뿐이지. 가끔 상상하는 아주 이상적인 아침 풍경이 있다.



산책에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은 후 부엌으로 들어선다. 내가 즐겨 듣는 FM 라디오의 주파수가 미리 맞춰져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 깔끔한 매트가 놓여진 식탁에 앉으면 누군가 제일 먼저 고소한 옥수수 수프를 가져다준다. 따끈한 수프가 산에서 얼었던 몸을 사르르 녹게 만들어 준다. 작은 그릇이라 몇 스푼 뜨니 이내 바닥이 보이는 게 조금 아쉽기만 하다. 이번엔 샐러드를 가져다준다. 요즘 포장되어 나오는 닭가슴살은 어떻게 조리되는 건지 그냥 데워 먹기만 해도 참 맛있다. 야채와 함께 소스에 버무려 먹으면 숙제 같은 하루 단백질 섭취량을 조금이나마 채운 것 같아 만족스럽다. 샐러드를 다 먹고 나니 커피와 스크램블을 가져다준다. 바쁜 아침에 수동 그라인더로 원두를 분쇄하고 핸드 드립으로 내리는 건 사실 좀 번거로운 일이다. 집에서 원두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나밖에 없기에 언제까지 이걸 직접 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허나 이렇게 아침부터 누군가 내려준 커피를 그냥 마실 수 있다니 소소한 행복감에 어깨가 들썩인다. 마지막으로 버터를 살짝 발라 구운 식빵을 가져다준다. 바삭바삭한 빵과 커피의 조화는 달리 어떤 설명도 필요 없다. 모든 식사를 마친 후 브런치 맛집인 이 집 부엌을 향해 엄지 손가락을 척하니 들어 올려준다. 그러나 현실은...



수프를 데우면서 농도를 확인한다는 핑계로 한 스푼 두 스푼 떠먹다 보면 3인분이던  어느새 2인분밖에 남아있지 않다. 프라이팬 속의 몽글몽글 따끈한 스크램블은 나도 모르게 자꾸 손이 가 결국 그릇에 담기도 전에 선채로 내 몫만큼 다 먹어버린다. 이렇게 먹는 게 좀 처량해 보일진 모르나 대신 가장 맛있을 때 먹을  있으니 그걸 위안으로 삼는다. 가족들 식사를 모두 차리고 그제야 엉덩이를 자리에 붙이고 먹다 보면 대부분 싸늘히 식어있기 마련이다. 그래도 오늘은 사진 한 컷을 위해 맛은 포기하고 모두 그릇에 담아 자리에 앉아 하나씩 먹어본다.



누군가 날 위해 아주 가끔씩이라도 이렇게 차려준다면 참 행복할 텐데 라는 생각도 잠시 아직 이불을 부여잡고 있는 아이를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이젠 진짜 일어나야지. 지금 몇 시인줄 알아"

아기 대하듯 살살 달래는 어투로 깨워야지 아님 하루종일 딸아이한테 들볶이게 된다.

'제발 나도 아침밥 좀 편하게 먹어보자, 이것아. 도대체 몇 시에 깨우면 일어날건지 정확히 좀 알려주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이렇게 속으로만 삼킨 채.

매거진의 이전글 나의 소심한 복수, 육수대신 맹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