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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an 13. 2023

나의 소심한 복수, 육수대신 맹물로


언젠가 딸아이 친구 엄마로부터 저녁을 대접하겠으니 집으로 오라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항상 밥을 차리는 입장이다 보니 남이 차려주는 밥은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하지만 전화가 걸려온 시간이 좀 당황스러웠다. 다 늦은 오후라 나 역시 가족들 저녁 준비가 한참이었기에 다음으로 미루자 하니 한사코 남편과 큰애 밥을 차려준 뒤 딸애를 데리고 오라고 한다. 더 이상 거절은 힘들어 급히 저녁을 차려놓은 후 딸아이 손을 이끌고 그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그 메뉴라는 게 야채 볶음밥이었다. 우리 집에서 몇 번 식사를 한 적이 있었기에 자기 딴엔 신세를 갚을 요량으로 준비한 것 같았다.



볶음밥을 너무나 맛있게 먹는 그 집 아이와는 달리 나와 딸아이는 주어진 할당량을 비우기에 급급했다. 사실 볶음밥이란 게 여간해선 맛없긴 힘들고 집집마다 대체로 맛도 다 비슷하다. 별다른 수고도 필요치 않아 나 역시 마땅한 찬거리가 없을 때 간혹 만들곤 한다. 하지만 우리 집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비주얼에 그 맛이 어떠하든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다양한 색상의 갖은 야채들을 일정한 크기로 잘게 썰어야 하는데 크기가 전혀 균일하지 않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그 사이즈가 커도 너무 컸다. 약간 작게 썬 카레용 야채 크기라 해도 무방했다. 가만 보니 저녁으로 볶음밥을 준비하려다 하는 김에 조금 양을 늘려 급히 날 부른 것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 손님을 불러 대접할 거면 조금 품을 들여 재료들을 정성스레 썰었음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볶음밥이란 메뉴에 실망했다기보단 사실 다소 부족한 듯한 그 정성에 아쉬움을 느꼈다.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특히 줄 서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도 내켜하지 않지만 아주 가끔 그런 곳에 들릴 때가 있다. 잔뜩 기대하고선 사진까지 한 컷 찍고 드디어 한 입 맛을 보는 순간 그러나 나도 모르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냥 그런 평범한 맛일 뿐 굳이 맛집이란 수식어를 달 정도는 아닌데. 하지만 그 의구심은 격한 공감을 자아낸 맛집에 대한 어느 기사를 읽은 후 이내 떨쳐 버릴 수 있었다. 물론 아주 특별한 맛으로 손님의 입맛을 사로잡는 곳도 있긴 하나 사실 음식점마다 대체로 다 비슷비슷한 맛을 가지고 있다. 맛보단 오히려 그 집만의 남다른 정성에 손님들이 이끌려 몰리게 되는 것이고 그런 곳만이 맛집이란 타이틀을 얻는다 했다. 그러니깐 핵심은 바로 정성이라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맛집이라 여기는 곳들도 역시 그러했다. 맛있긴 하지만 그 맛에 달리 특별함은 없다. 그럼에도 다음에 누군가를 데리고 또다시 방문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돈을 지불하고 받은 것들이지만 그 가게에서 대접받았다고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그건 다음 방문으로 이어지게 만든다.



다양한 정성들이 있을 수 있다. 아주 미묘한 맛의 차이를 위해 단순히 조미료가 아닌 본인만의 품이 들어간 비법 조리법을 이용해 수고로움을 한 스푼 더한 정성이 있다. 조미료가 딱히 나쁜 건 아니지만 어찌 보면 정면승부가 아닌 편법을 쓰는 듯해 다소 비겁한 느낌이 든다. 손님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제공할 목적으로 시각적인 효과를 더한 정성에는 보다 후한 가산점이 주어지기도 한다. 푸짐한 양이나 남다른 친절로 손님을 대하는 곳도 맛집이란 이름을 붙이기에 전혀 어색하지 않다. 우리 동네에 항상 대기줄이 끊이지 않는 돈가스 집이 있는데 실제 맛은 그저 그렇다. 그러나 '왕돈가스'란 가게명에 딱 맞는 남다른 크기의 돈가스와 친절한 직원분들 덕에 동네 유명 맛집으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다. 그렇담 우리 집 부엌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여느 맛집 못지않다 자부한다. 친절면에선 다소 떨어지긴 해도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든 만큼 나만의 특별한 정성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그런 요리들을 가족들에게 해 먹인다는 것에 나름 뿌듯함도 느낀다. 비록 먹는 인간들은 정작 그 수고로움을 잘 못 느끼지만.



하지만 매번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분명 내 몸이고 내 마음이건만 그것들이 쉽게 다뤄지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특히 작년처럼 한동안 무기력에 빠질 때면 손끝하나 까딱하기 싫다. 밥 하는 일이 정말 지긋지긋하다 못해 뭐 하나 요리할 줄도 모르고 밥때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남편이 꼴도 보기 싫게 느껴진다. 사실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일중 하나가 밥 하는 것이다. 진작부터 사표를 내고 싶었지만 받아주는 이가 없어 이날 이때까지 그냥 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매사 귀찮아질 때면 음식을 만드는 몇몇 과정이나 재료들을 일부 생략하게 된다.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정성은 쏙 빼놓은 채 전업주부의 막중한 소임을 끝내지 못했다는 중압감에 마지못해 부엌으로 출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맛이 제법 괜찮을 때도 아주 간혹 있지만 대부분 그 정성에 비례한 정직한 맛이 탄생하게 된다.




방학이라 오랜만에 집에 와 며칠 머문 큰애는 점심을 먹고 나면 고속버스를 타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갈 것이다. 아이가 갈 때 챙겨줄 음식들을 준비하느라 혼자 아침부터 바쁘다. 깍두기와 배추 겉절이까지 만들고 나니 점심을 준비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다. 집에만 오면 손 하나 까닥 않는 이놈은 2주 지나 설날에 또다시 올 거란다. 그냥 설날에 와서 좀 길게 있음 될 것을 굳이 이번에 온 이유를 모르겠다. 집까지 거리가 제법 있어 걸리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차비도 만만치 않은데. 게다가 직장 다니는 놈도 아닌데 굳이 연휴 첫째 날 밤늦게 집에 도착할 거란다. 늦은 밤까지 잠도 못 자고 기다리고 있을 부모 생각은 전혀 않고. 도로가 많이 막힐 거라 하루 일찍 오라 하니 그제서야 하는 말이 설연휴 바로 전날이 여자친구 생일이라 같이 있을 거란다. 토요일 오전은 도로가 더 많이 막힐 테니 차라리 밤늦게 집에 오겠단다. 가족들 생일은 미꾸라지 담 넘어가듯 매번 그냥 넘어가면서 여자 친구 생일은 대놓고 챙기는 게 어째 좀 얄밉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집에 올 때 과자 봉지 하나 사들고 오지 않으면서 데이트할 땐 펑펑 쓰는 것도 점점 눈에 거슬린다. 올해부턴 아르바이트하지 말고 그냥 임용공부만 하라고 용돈도 인상해 줬는데 어찌 괜한 짓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점심메뉴는 아이가 좋아하는 꽃게 된장찌개다. 집에 오면 혼자 쉽게 해 먹을 수 없거나 사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을 주로 해준다. 그런데 다른 건 다 준비되었건만 중요한 육수가 마침 똑 떨어졌다. 어제 미리 잔뜩 만들어 놓았지만 소고기 전골과 어묵탕을 만든다고 몽땅 다 써버렸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선 우선 다시용 멸치와 일명 디포리라 불리는 마른 밴댕이 그리고 마른 새우를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지 않고 볶아야 한다. 약간 그을리는 정도까지 볶아 온 집안에 맛있는 냄새가 쫙 퍼질 때쯤 무, 다시마, 파등과 함께 냄비에 넣고 푹 끓이면 정말 기가 막힌 육수가 탄생한다. 비린내라고는 전혀 없이 그걸로 뭘 끓여도 깊은 맛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김치를 담그는 일만으로도 이미 내가 가진 오전분의 에너지는 다 소진되었다. 이걸 다시 만들기엔 슬슬 만사가 귀찮아져 오기 시작한다. 가족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는 아들놈 챙겨 먹인다고 이미 며칠간 피로도 누적되어 있다. 게다가 저놈 하는 짓도 좀 얄밉고. 나름 소심한 복수를 하자 마음먹은 게 육수 없이 그냥 맹물로 된장찌개를 끓이는 것이다. 단순히 육수만 뺀 게 아니다. 정성이란 특제 소스가 빠진 것이다.



어차피 꽃게가 들어가니 국물이 맛없진 않을 테고 된장맛이 강하니 그냥 물로 끓이더라도 그리 큰 차이는 없을 듯했다. 냉동이긴 하지만 실한 암게를 넉넉히 넣고 평소처럼 된장을 끓였다. 꽃게 된장찌개에 갓 담은 배추 겉절이정도면 아마 충분히 맛있는 점심이 될 수 있을 게다. 그러나 간을 보기 위해 국물을 한 입 떠먹는 순간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무언가가 빠져 있는 그러나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아리까리한 맛. 이제껏 육수로 끓여 온 된장찌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럴 때 조미료를 살짝 넣으면 마술처럼 맛이 살아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반칙 무기 따윈 집에 두지 않을뿐더러 태어나 한 번도 사 본 적이 없다. 어떻게든 수습은 해야 하는데. 아, 마침 냉장고에 캠핑 때 쓰고 남은 시판 된장이 있다. 분명 그 속엔 갖은 조미료가 녹아 있을 테니 한 스푼만 살짝 섞어보면 약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게다.



급하게 한 스푼 떠서 된장찌개에 섞어 후드득 끓인 후 맛을 보니 아까보단 낫긴 하다. 그러나 들큼한 조미료 맛이 혀 끝에 남는 게 매번 먹던 그 맛엔 분명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여기까지. 더 이상 욕심은 내지 않기로 했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아이가 가져갈 먹거리들을 아이스 박스에 포장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식사를 마친 식탁을 보니 평소 같으면 냄비 바닥이 훤히 보였을 된장찌개에 역시 국물이 제법 남아 있다. 음식점이면 바로 고발이 들어가겠지만 싹싹 긁어 내일 한 끼에 보태기로 한다.



다음날 점심, 냉장고에 있던 남은 된장찌개를 꺼내 약간의 물과 두부를 첨가한 후 다시 끓여 식탁의 중앙에 내놓았다. 딸아이와 남편은 새콤달콤 오징어 야채 무침과 마늘종볶음을 집중 공략한다. 하지만 난 된장찌개부터 한 스푼 뜬다. 그런데 , 세상에... 그래, 이맛이다. 밥도둑처럼 밥 한 공기를 게눈 감추듯 후딱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맛. 정성이란 조미료가 빠져도 가끔 운 좋게 나타나신다는 바로 그 괜찮은 맛이다. 어쩜 혹시 그 자리를 인공 조미료가 대신한건 아닐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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