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 위 작은 공간은 나만의 갤러리다. 그림이 완성되면 그곳에 종이를 세워두곤 오며 가며 쳐다본다. 물론 액자라는 옷을 걸치면 좀 더 그럴싸하게 보일순 있겠지만 꼭 이럴 때만 미니멀리즘을 부르짖는다. 어차피 혼자 보고 즐길 건데. 게다가 나야 저것들의 속살까지 모두 들여다본 유일한 이가 아닌가. 아무리 좋은 옷을 입혀놓은들 내 눈엔 숨겨진 상처가 다 보이고 아무렇게 벗겨놓아도 나에겐 애정 가득한 것들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남들은 알아채지도 못하는 사소한 실수에 발목이 잡힐 때가 종종 있다. 빨리 털어버리고 다른 부분으로 넘어가야 하는데 계속 마음에 두게 된다. 결국 그냥 놔둬도 될 것을 괜히 손을 대어 오히려 더 망치는 경우까지 생긴다. 그림이 완성되어도 전체는 보이지 않고 유독 그 부분만 눈에 들어와 이번 그림도 망쳤구나 낙담하게 된다.
그런데 신기한 게 며칠이 지나 다시 들여다보면 느낌이 또 다르다. 시간이 나를 그림에서 한발 떨어지게 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붓을 집어던지고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게 만들던 자잘한 실수들은 이젠 눈에 잘 띄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일부러 의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애먹이던 것이 실은 별 거 아니었다는 걸 아는 순간 허무함에 쓴 미소가 떠오른다. 어째 이 작은 그림 하나에 찌질한 내 삶이 다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전체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감정과 열정, 시간들을 낭비해 왔는지 모른다. 물론 지금도 일관성 있게 그런 삶을 살고 있지만.
겨우 이 정도밖에 못 그렸는지 자책하던 처음과 달리 지금은 볼 때마다 꽤나 만족스럽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날 격려한다. 가만히 그림을 들여다보며 정지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 마치 애니메이션처럼 살아 움직이는 상상을 해본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줍은 미소를 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와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시고 가라 내 손을 잡아 끈다. 낯선 이의 방문이 부끄러운 한 소녀는 창문뒤에 숨어 조용히 날 지켜보고 있다. 저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면 혹시 빨간 머리 앤과 하이디가 사는 곳도 나오진 않을까.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적엔 그저 나 자신을 다그치기에 급급했다. 작은 성취감에 만족하기보단 당근하나 입에 물려주지 않고 더 달려라 채찍질을 해댔다. 돌아보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은 짠한 시간들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들이 나란 존재가 보다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밑천을 마련해 주었다. 참 고마운 게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마인드임에도 예나 지금이나 나름 바람직한 신념은 가지고 있다. 가진 게 없으면 노력이라도 더 하자고. 채찍질은 나름 효과적인 연료였다.
예전에 비해 요즘은 스스로에게 많이 관대해졌다. 나 자신을 격려하고 토닥이는 방법을 조금씩 터득해 가고 있는 중이다.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포기 않고 끝까지 해냈을 때 심지어 그 결과물이 매우 흡족스럽다면 나 자신이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 없다. 이럴 땐 모양새가 좀 이상하긴 하지만 손을 뻗어 내 어깨를 토닥이거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에게 한마디 건넨다.
'잘했어'
마흔이 넘어 취미로 시작해 쉬었다 다시 하다를 반복하며 지금까지 그림과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덕분에 만년 초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물기를 머금은 종이 위로 물감이 서서히 퍼져 나가는 모습을 정말 사랑한다. 한동안 사그라들었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요즘 어반 스케치를 시작하면서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사진에 담긴 멋진 풍경을 잘 그리든 못 그리든 종이에 옮겨 자신만의 느낌대로 풀어낸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그림을 그려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그려보고 싶은 것들이 생겼다. 보고 있음 마음 한편이 따뜻하고 평화로워지는 작은 마을 풍경들을. 겉모습은 볼품없이 늙고 쪼그라들고 있지만 부끄럽게도 내 속엔 아직 순수한 감성들이 그득하다. 어릴 적 TV에서 즐겨 보았던 일본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이 모여 살 것만 같은 그런 마을의 모습을 그림에 담고 싶다. 이 집엔 앤이 살고 저 집엔 하이디가 살고 저기 뒷동산에 네로와 아로아가 뛰어노는 그런 동화 같은 마을. 부지런히 그려서 개수가 좀 쌓이면 집에서 조촐한 전시회도 가져볼까 한다. 그림을 좋아하는 이들을 초대하여 차와 직접 구운 케이크와 쿠키들로 대접하며 함께 따뜻한 시간들을 나누고 싶다. 전시회 제목도 생각해 보았다. '앤의 초대'. 이 날만큼은 동네 구석구석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기 위해 잠시 앤이 되어도 그리 민망스러운 일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