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긴 참 치열하게 산다"
생각도 못한 소리에 순간 내 귀를 의심한다. 듣기에 따라 달리 들릴순 있겠지만 그녀의 말투로 봐서 날 안쓰럽게 여김이 분명하다. 어째 살짝 초라해지는 기분이다.
"가진 게 없으니 몸이라도 부지런해야죠. 언니처럼 머리가 좋아서 좋은 직장을 가진 적도 없는데"
분위기를 바꾸고자 엉겁결에 뱉은 말이지만 하고 나니 나도 좀 어색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 맞는 것도 아니다.
가진 게 없진 않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아니다. 투자에 대한 정보도 지식도 심지어 배짱까지 모두 빵점에 가까운 부부라 남들처럼 큰돈을 쥐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열심히 아끼고 저축하며 산 덕에 노후 걱정 따윈 안 하고 산다. 한 번씩 서로 툴툴대긴 하지만 같은 추억을 쌓아가고 있는 남편도 있다. 게다가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는 아들 딸이 있다. 다른 부모들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히 지원하지 못한 게 좀 미안하긴 하지만 돈이 다는 아니다.
하지만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남들보다 피곤하게 살아온 건 분명하다. 돈 몇 푼 아끼려고 날 너무 막 써버렸다. 시간과 열정, 감정 심지어 몸뚱아리까지. 요즘 모든 게 고갈되고 있다는 걸 새록새록 느낀다. 정작 아껴야 하는 건 돈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었는데. 이제라도 그 사실을 깨달아 소중히 아끼고 살려고 노력한다. 따지고 보면 그렇게 살아온 데는 나름의 핑계가 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그리고 학교에 보내주는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는 집안에 태어났다. 게다가 부모 입장에선 지긋지긋한 셋째 딸의 신분이다. 절약과 궁상 그리고 눈치는 아주 오래전부터 몸에 배였다. 그게 믿을 곳 하나 없이 험한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3명의 형제자매들은 또 달랐던 걸 보면 그게 다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하필 나보다 더 한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40대까진 그녀의 말처럼 치열하게 살아온 게 분명하다. 특별히 와닿는 게 없는 요즘과 달리 그땐 하고 싶은 것도 많았고 의욕도 넘쳤다. 남들이 하는 걸 나도 다 하고 싶었다. 주위에서 해외여행을 가면 그 예산의 반도 안 되는 돈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배낭여행을 떠났다. 외식에 인색한 아빠를 둔 새끼들을 위해 밖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시간과 품을 들여 직접 만들어 먹였다. 또래 엄마들이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면 난 집에서 따로 공부까지 해가며 직접 아이들을 가르쳤다. 다른 사람들이 돈을 들인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힘든지도 몰랐고 오히려 그런 나 자신을 대견해 여겼다. 아마 다른 여편네들은 이렇게 하지 못할 거라 착각하며. 사실 못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어 안 하는 건데.
어느 대목에서 그녀가 나에게 그런 소릴 했는지 가물가물하다. 치열하게 산다는 말이 너무 강하게 와닿는 바람에 앞 뒤 말들은 반쯤 지워졌다. 내 말을 듣고 그리 대꾸했을 텐데 내가 무슨 소릴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 '부지런하다, 참 열심이다' 이런 소릴 들을 수 있을 거라 또 착각했을 것이다.
사실 더 이상 부족한 건 없다. 게다가 요즘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내가 좋아서 하는 것들이지 남들 쫓아하는 게 아니다. 치열해질 까닭이 전혀 없다. 물론 그리 사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젊어서는 어느 정도 치열하고 절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못한 큰애를 보면 언제쯤 철이 들려나 혼자 속앓이를 하곤 한다. 하지만 이젠 많은 걸 내려놓고 좀 더 편하게 인생을 바라볼 나이에도 그런 소릴 들으니 뭔가 제대로 잘못된 듯하다. 분명 모든 원인은 내게 있을 것이다.
가만 보니 예나 지금이나 헛물투성인 내가 역시 가장 큰 문제다. 나 자신보단 남들의 시선과 잣대에 온 신경을 다 쓰고 있다. 남들이 하면 나도 따라 흉내라도 내야 한다. 만약 도저히 따라 할 수 없는 것들이 생기면 주눅이 들고 뭔지 모를 열등감이 생긴다. 타고난 부모복이나 형제복, 다정한 남편 얘기들을 들으면 특히 더 그렇다. 나도 뭔가 자랑거리를 갖고 싶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더 많이 다그쳤고 남들 눈에 있어 보이고 싶어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심지어 남들한테 보이고 싶은 맘에 집도 더 깨끗하게 청소하고 손이 많이 가는 요리들을 준비해 종종 초대하곤 했다.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보다 남들 눈에 비친 내 모습을 위하여.
어느덧 스스로의 만족보단 남들에게 잘 보이고 자랑질하고 싶은 맘이 더 깊은 본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누가 잘한다고 하면 신이 나서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더 열심히 달린다. 하지만 봐주는 이가 없으면 별 의미도 없을 뿐 아니라 흥도 잘 나지 않는다. 아마 그녀에게도 나 이렇게 부지런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산다는 걸 무의식으로 또 어필하고 있었을게다.
"저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산에 갔다 와요"
"전 우리 아이들 학원 안 보내고 전부 직접 가르쳤어요"
"저는 매일 영어 단어 200개씩 복습해요"
그냥 묵묵히 있어도 남들 눈에 보일 것은 다 보일 텐데 왜 그리 말을 못 해서 안달일까. 제 살을 갉아먹는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이다.
치열하게 산다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아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처음엔 다소 심기가 불편해 얼굴이 불그락 달아올랐지만 지금은 지난 내 모습이 너무도 부끄러워 달아오른다. 사실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만 해도 치열하게 사는 게 아니라 열심히 사는 거라 우기려 했다.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제목만 몇 번을 수정했나 모른다. 그렇게 조금씩 누그러지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항상 감사히 여기는 게 글에는 묘한 힘이 있다. 생각을 정리해 써 내려가다 보면 나 자신도 잘 몰랐던 숨겨진 또 다른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영혼이 된 친구들 손에 이끌려 자신의 과거와 미래의 모습을 보게 되는 스크루지처럼 나 역시 글이란 친구를 통해 지난날의 내 모습을 보게 된다. 안쓰럽고 부끄럽고 답답하기도 한 그 모습에 누군가 호통을 치면 오히려 역정을 내며 마음의 문을 성급히 닫을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글을 써 내려가다 보면 누가 일깨워주는 것보다 더 강하고 호소력 있게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난 조금씩 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치열하게 사는 게 어쩜 나의 본성일 수 있다. 누구의 탓을 할 필요는 없다. 그리 살아왔다고 남에게 피해 준 것도 전혀 없다. 부끄러운 일도 얼굴 붉힐 일도 아니다. 게다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결코 아니다. 열정, 성실, 부지런함이 모두 갖추어져야 가능한 것들이다. 하지만 글 친구의 손에 이끌려 부끄러운 내 모습을 바라보고 깨달은 귀한 것이 있다. 치열히 살든 열심히 살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진정 나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