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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May 17. 2024

풋내 나는 망고 말고


지갑을 열 때면 언제나 가성비부터 들먹이는 내가 지난겨울 별 주저 없이 망고를 장바구니에 담는 일이 종종 생겼다. 아이들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야 평소엔 그쪽으로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 짠순이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일 만만하던 귤을 비롯한 모든 국내산 과일이 고공행진 중이고 특히 몸값 비싼 사과에 비하면 오히려 상대적으로 덜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게다가 어차피 아이는 사과보단 망고를 훨씬 더 좋아한다. 어른 입은 패스하고 아이 입에만 조금씩 넣어준다면 가성비가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그렇다 해도 착한 가격 또한 아니기에 마트 행사 전단지에 망고의 탐스러운 모습이 올라오기를 조용히 기다린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마트는 내 머리보다 한 수 아니 몇 배 수 위다. 아무리 정부가 안정적인 과일 수급을 위해 수입 과일에 대한 관세를 낮추니 뭐니 해도 달랑 한 두 개 팔자고 그런 일에 동참하진 않는다. 기회를 이용해 나의 얄팍한 지갑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그 가격 혜택이란 걸 받기 위해선 정해진 수량만큼 여러 개를 사야 한다. 나 또한 마트의 술수에 그저 호락호락 당할 수만은 없는 일, 최대한 눈을 부릅뜨고 신중에 신중을 기해 망고를 고르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비슷비슷한 크기들 중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큰 걸 찾아내려 부지런히 눈을 굴린다. 희한한 게 이쪽 편에 서 있으면 저쪽 편의 것들이 더 커 보이고 자리를 옮기고 나면 다시 좀 전 있던 쪽의 것들이 더 좋아 보이는 수수께끼 같은 일이 매번 일어난다. 그렇다고 무조건 크기만 따지는 건 아니다. 숙성의 정도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이내 먹을 것은 노랗게 잘 익은 걸로 고르지만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익혀가며 먹을 요량에 일부러 숙성이 덜 된 걸 집어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가끔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일이 생기기도 한다. 아무리 기다려도 익기는커녕 어느 순간 까만 점이 생기더니 그냥 그대로 썩어버리는 것이 있다. 아까워 상한 부분만 칼로 도려내고 나머지를 먹어보려 하지만 어째 칼 끝에 와닿는 느낌부터 다르다. 잘 익은 망고를 깎을 때 느껴지는 말랑말랑함이 아니다. 살짝 쪼그라진 겉모습에 비해 속은 여전히 고집스레 단단하니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간다. 맛 또한 풋내 머금은 텁텁함이 달콤함을 가리고 있다. 아이가 반길 맛이 아니다. 어쩔 수 없다.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내 입으로 고스란히 향할 수밖에.



돈도 돈이지만 지금까지 기다린 걸 생각하면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망고 입장에서도 분명 할 말은 있을게다. 머나먼 이국 땅이 아닌 따뜻한 고향집이었다면 별 수고 없이 기대했던 달달한 맛을 얻을 수 있었을 테니. 그깟 온도 하나 제대로 신경 써주지 못한 주제에 자신만 탓한다고 만약 따지기라도 한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다.



사실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겨울의 우리 집 뒷 베란다는 망고를 숙성시키기엔 그리 적당한 곳은 아니다. 물론 그런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잘 익어준 기특한 것들이 다수이긴 하다. 특별히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온도에 다소 민감한 탓에 같은 조건임에도 풋내 나는 그대로 썩어가는 망고를 보니 불현듯 떠 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시간만 흐르면 모든 게 저절로 잘 숙성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느새 50이 넘은 지금의 나 자신을 보면 슬프게도 나이가 든다고 모두 성숙한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여전히 손에서 놓지 못하는 많은 것들로 인해 겉만 쪼그라든 채 속은 독선과 아집으로 단단히 뭉쳐져 있다. 문득문득 이런 내 모습이 정 떨어질 만큼 꼴 보기 싫을 때가 있다. 머릿속에 그려왔던 50대의 모습은 이게 아닌데. 딱딱하게 굳어만 가는 난 언제쯤 말랑말랑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리 될 수는 있기나 할까.



마음 여기저기 남아 있는 그리고 여전히 새로 생기고 있는 까만 상처들을 보면 나도 망고처럼 할 말은 있다.

'... 때문에, 만약 나도... 였다면, 그래서 내가 지금...'

누군가는 내 얘기에 고개를 끄덕여 줄지도 또 누군가는 그리 살아오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된다고 유난을 부리느냐 역정을 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말로는 다 하지 못할 지난날이란 게 있다. 그 상황이 돼 보지 않고서는 감히 뭐라 말할 순 없다.



여럿이 같이 모여 김장을 하면 처음엔 김치 맛이 똑같다. 하지만 나눠서 각자의 집으로 가져가면 그곳의 환경에 따라 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김치 냉장고 속이냐 일반 냉장고 속이냐 아님 그저 차가운 실외에 보관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천차만별이 된다. 물론 김치 장인이라면 어느 곳에 보관하든 훌륭한 맛을 얻어 낼 수 있겠지만 우리 모두 장인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김치 냉장고가 없음을 탓할 수 또한 없다. 적합한 환경은 아니었기에 나름 합법적인 변명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더 이상 나 자신을 궁상맞은 인과관계에 끌려다니게 놔두고 싶진 않다.



그렇게 시작된 '잘 익어가는 어른'이 되기 위한 프로젝트는 아직까진 순항 중이다. 먼저 한 해 동안 1주일에 한 권씩 총 50권의 책을 읽기로 계획을 세웠고 지금 그 18번째 책을 펼치고 있다.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나에겐 도중 포기 없이 실천하기 딱 좋은 만큼의 독서량이다. 하지만 단순히 읽기에 그치지 않고 독서록을 만들어 마음에 와닿는 글귀들을 따로 메모를 해 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종종 그걸 꺼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



그 외 남 탓하지 않기, 상대가 불편해하는 과거는 들추어내지 않기, 가끔 날 불안과 우울로 몰고 가는 것들과 거리두기 등등 하나씩 노력하고 있다. 요즘 유행하고 있는 원영적 사고도 부지런히 따라 해보고 있다. 배울 게 있음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나의 스승이다. 내가 부족한 탓에 보다 많은 스승을 둘 수 있으니 얼마나 럭키한 일인지.



주위를 둘러보면 충분히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풋내를 머금은 채 쪼그라져 가는 사람이 있다. 반면 달달한 향기를 내뿜으며 잘 익어가는 사람도 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어떤지 그리고 달라지지 않으면 10년 후 어떤 모습으로 남게 될지 나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더 이상 늦추진 않을 테다. 언젠가 나도 예민과 까칠에서 벗어나 보다 단순해진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그냥 상황에 맞춰 노랗게 잘 익어가는 향기 진한 망고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가져본다. 가만 생각해 보면 이 나이에도 이런 멋진 삶의 목표를 가질 수 있다니 역시 난 럭키한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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