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참깨

by 코니

폐쇄공포증이 딱히 있는 건 아니지만 좁고 갑갑한 건 싫어한다. 집안의 문이란 문은 모조리 심지어 화장실 문까지 활짝 열어두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이상하리만큼 닫혀진 문을 보면 타박 고구마에 삶은 달걀까지 몇 개나 꾸역꾸역 먹은 거 마냥 답답해진다. 딱 한 군데 예외인 곳이 있긴 하다. 1년 전 큰애가 자취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방은 지금 남편의 방으로 바뀌었다. 하루 종일 그가 끼고 살던 거실의 텔레비전도 그 방으로 옮기게 했다. 남편은 텔레비전까지 옮기는 것에 좀 어색해했다.

"다른 사람들도 텔레비전을 볼 건데..."

아니, 우리 집에서 텔레비전을 즐겨 보는 사람은 남편 혼자밖에 없다. 남편도 그 사실을 잘 안다. 물론 1주일에 단 한번 딸아이와 내가 찾아보는 방송이 있긴 하지만 그때만 잠시 거실로 들고 나오면 된다. 덕분에 집에 있음 대낮에도 거실에 이불을 펴고 누워 텔레비전을 보던 남편의 그 거슬리던 모습을 더 이상 안 볼 수 있게 되었다. 방안이 어떤 상황이든 문을 닫음으로써 나의 시선에서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아울려 내가 듣는 음악 소리와 상충되던 텔레비전의 소리까지도. 그렇게 남편은 그 방에서 감금 아닌 감금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거실도 본래의 기능을 회복하게 되었다. 큰애가 집을 떠남으로써 내 눈에 성가신 두 사람이 동시에 해결된 기분이었다.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엄마표 방식으로 공부시킨 나는 이제껏 애들 공부에 적잖은 신경을 써왔다. 지금 큰애는 교대 3학년에 재학 중이라 더 이상 나의 손길이 필요치 않다. 하지만 한글 익히기부터 시작하여 알파벳, 천자문, 기본 연산에서 미적분까지 오랜 시간 동안 나란히 앉아 함께 공부했었다. 아이는 비교적 잘 따라와 주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 되자 많은 게 달라졌다. 뒤늦게 그분이 찾아오시어 중2병 같은 증상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이 뜻대로 했다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뻔히 보이는데 질풍 노조의 시기라 내 말이 귀에 들릴 리도 없었다. 날을 세워 사사건건 트집 잡고 엄마 말이라면 무조건 반대부터 하기 시작하는 아이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정말 막막했다. 나 역시 고등학생 학부모는 처음이라 모든 면에서 서툴고 부족하며 심지어 불안하기까지 한데. 아이의 느긋한 성격과 불같은 나의 성격이 수시로 충돌하여 둘 사이는 항상 살얼음을 걷는 듯한 긴장감의 연속이었다. 결국 뚝뚝 떨어지는 성적표가 그 모든 걸 말해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런 아이를 대응하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져주는 게 이기는 거라 생각하고 살살 달래 가며 비위를 맞춰주는 것이 아이에겐 최선의 방법이었다. 동시에 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진학을 실패하더라도 둘 사이의 관계까지 망치는 어리석은 일은 저지르지 말자 나 자신을 열심히 다독거렸다. 비록 내 속은 썩어 문드러지더라도.




아이와 함께 하는 공부는 언제나 식탁에서였다. 처음엔 마땅한 큰 책상이 없어 식탁을 이용하긴 했지만 계속 그 방식을 유지할만한 계기도 있었다. 언젠가 일본 도쿄대에 합격한 학생들을 조사해보니 74%가 자기 방이 아닌 거실에서 공부를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게 대단한 학생들도 본인 스스로를 믿지 못하여 개방된 곳에서 공부하는데 하물며 의지가 약한 큰애를 자기 방에 혼자 놔두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기는 격이었다. 그러나 고등학생이 되자 혼자 공부할 땐 자기 방에서 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기에 아이말을 들어주기로 했지만 조건을 내걸었다. 문을 완전히 다 닫지는 말고 조금이라도 열어두자고. 아이는 내가 자기를 믿지 못해서 기분이 나쁘다며 화를 냈지만 나 역시 그것까지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결국 그 선에서 타협을 봤고 아이는 식탁에서 같이 공부한 후 자기 방으로 들어가 겨우 5센티 정도의 문만 열어둔 채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5센티의 열린 문틈... 그 좁은 틈으로도 나는 모든 걸 다 볼 수 있었다. 비록 사각지대가 존재하고 내가 홈즈처럼 예리한 추리 능력이 있는 건 아니지만 내 눈엔 다 보였다. 왜냐하면 내가 없으면 저 게으른 놈은 대학에 갈 수조차 없다는 투철한 사명감이 있었기에. 처음엔 아이도 그걸 의식해서인지 열심히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단순한 놈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본인 눈에 당장 내가 보이지 않으니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었다. 놈의 뒤통수를 수시로 지켜보는 매의 눈이 있다는 걸. 결국 몇 번의 거듭된 일탈 행동이 들통난 이후 다시 거실로 끌려 나오게 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정신을 차려 정시로 대학에 합격했다. 지금은 아이와 나 둘 다 결과에 만족하며 각자의 인생을 즐기고 있다.






둘째인 딸아이는 달랐다. 큰애와는 다섯 살이나 터울이 있어 항상 큰애 위주로 맞춰왔지만 딸아이는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엄마의 말을 그대로 믿고 따라와 주었다. 야무지고 차분하고 속이 깊은 아이다. 공부하는 것도 오빠와는 달랐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인강이란 게 있어 좋은 강의를 비교적 저렴하고 편리하게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똑같은 강사에 똑같은 수업인데도 많은 학부모와 학생들이 시간과 돈을 들여 굳이 현장 강의를 선호하는 까닭이 있다. 그만큼 인강을 듣는다는 게 본인 의지가 없음 힘든 것이다. 그래서 난 아이들과 같이 듣는 방법을 택했다. 큰애와 인강을 들을 때면 열심히 수업을 듣는 나와 달리 시도 때도 없이 졸고 있는 고 놈을 깨운다고 얼마나 속이 뒤집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딸애는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필기까지 해가며 내가 시키는 대로 수업을 들었다. 오히려 옆에서 엄마가 조는지 안 조는지 간간히 확인까지 하였다. 내가 조금만 방향을 잡아주면 아이는 잘 따라와 주었고 노력과 성적에 대한 성취감도 가지고 있었다.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집 가족 누구도 받지 못했던 성적을 딸아이는 받아온다.




그러나 어느 순간 딸아이도 나와 함께 공부하는 것에 대해 불편함을 가지기 시작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큰애와는 전혀 다른 그 이유를 나는 잘 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아이 능력에 비해 옆에서 도와주는 내가 따라가지 못했다. 5년 전 큰애랑 공부할 때와는 머리 돌아가는 속도며 이해력, 집중력 모든 게 비교가 안되게 떨어져 있다. 큰애 때는 어려운 미적분 문제도 답지를 보지 않고 풀어졌는데 지금은 답지의 도움이 절실해졌다. 게다가 인강을 듣다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내가 오히려 딸아이에게 수시로 묻곤 했다. 물론 그렇게 날 이해시켜 주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학습법이라 생각되지만 딸아이는 그런 내가 성가셨다. 이래서 공부는 다 때가 있다는 말이 나오는 가 싶다. 아이는 슬슬 한 과목씩 방에 들어가 혼자 공부하기 원했고 자기가 도와 달라는 것만 해달라 했다. 인강도 필요한 건 다 들었으니 더 이상의 것은 혼자 듣겠다 했다.




드디어 때가 왔음이 직감되었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출발점에서 시작하여 종착점까지 3분의 2는 지났다. 이제 페이스 메이커로서의 나의 역할은 거의 끝났고 딸아이 혼자 달릴 시간이 된 것이다. 당연히 맞닥뜨릴 시간이긴 하나 왠지 서운함과 허전함이 밀려왔다. 게다가 큰애에 비해 그 시기가 좀 빨리 온 것 같아 약간 불안하기도 했다. 그런 복잡한 엄마의 마음을 본인도 느꼈는지 아이는 오히려 더 나와 벽을 쌓으려는 것 같았다. 항상 활짝 열어 둬 모습을 숨기고 있던 딸아이 방의 문이 점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결국 어느 순간 문은 완전히 닫혀 버렸다. 오빠와는 달리 딴 짓은 안 하겠지만 그 안에서 아이가 오롯이 자신만의 의지로 모든 걸 잘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다. 단순히 물리적인 문만 닫힌 게 아니었다. 딸아이와 나사이의 소통의 문도 마찬가지였다. 큰애처럼 딸아이 역시 올 3월 고등학생이 되자마자 중학생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나에게 보이기 시작했다. 불과 두세 달 전 나에게 응석 부리고 뽀뽀해달라 졸라대던 막내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그 서운함이란... 뭔가 아주 소중한 하나가 내 몸에서 뚝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상실감이 느껴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다 큰 내 새끼들에게 받는 상처는 훨씬 더 깊고 예리하다. 그 쓰라림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써 스스로를 토닥여야 했다. 그나마 고등학생 학부모는 이번이 두 번째라 내가 어떤 자세를 취해야 서로에게 도움이 될지 조금은 알고 있기에 다행이다 싶었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본인이 원하는 대로 내버려 두자 오히려 생각도 안 한 뜻밖의 일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딸아이는 내가 이것저것 묻고 말 시키는 자체가 싫어진 것 같았다. 본인이 알아서 잘하고 있는데 내가 확인 차원에서 말을 꺼내거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학교 생활에 대해 물어보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답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음 적극적으로 요청하는 걸로 봐서 그냥 자기가 알아서 하게 가만 내버려 두는 게 최선일 것 같았다. 가급적 먼저 말을 안 붙이고 적당한 거리두기에 나섰다. 딸아이의 방은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식탁 바로 옆이다. 아이가 백일 무렵 이 집으로 이사 온 이후 16년 만에 처음 그 문이 닫히는 걸 본 순간 가슴이 턱 하니 막힌 듯 답답해졌다. 아이와 나사이에 벽이 하나 생긴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고.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편한 점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유튜브를 보며 영어 듣기 공부를 할 때 소리만 좀 줄이면 굳이 이어폰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낮은 소리로 음악을 틀어놔도 피곤할 때 의자에 앉아 졸아도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남편과 얘기할 때면 무슨 목소리가 그리 크냐고 한 마디씩 하더니 문을 닫으니 그런 잔소리도 하지 않는다. 혼자 공부를 알아서 잘하니 나로선 그 남는 시간에 그림도 그리고 글도 더 쓸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 뿐 아니라 나 역시 혼자 달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항상 옆에서 같이 조잘대던 엄마가 자기와 거리두기에 들어가자 딸아이는 뭔가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자기가 주도하는 거리두기와 달리 내가 주도하는 것에는 오히려 낯설어했다. 가만 보니 엄마와 사이가 서먹해지는 건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 거리감을 좁히기 위해 딸아이는 조금씩 예전의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자기 몸에 손도 대지 못하게 하더니 다시 나에게 무릎베개를 해달라, 안아달라 심지어 뽀뽀도 해달라 응석을 부린다. 그러더니 어느새 문도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을 닫아 주려 하자 그냥 놔두란다.

"이제 문을 열어 두고 공부할까 봐"

결국 닫힌 문은 다시 활짝 열리게 되었고 나는 예전처럼 아이 공부에 방해되지 않도록 최대한 조용히 식탁에서 내 일을 한다.




방학 때 집에 온 큰애는 동생이 거실이 아닌 자기 방에서 혼자 공부하고 인강을 듣는 걸 보더니 좀 의아해했다. 심지어 딸아이가 수학 문제를 풀 때 음악까지 틀어 놓고 따라 부르자 큰애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거실에서 공부하라고 해. 방에서 혼자 공부하면 안 돼 그리고 노래 틀어 놓고 수학 문제 못 풀게 하고"

수학 문제를 풀 땐 꼭 음악을 틀어놓고 온갖 랩을 다 따라 하던 놈이 동생은 못하게 하란다. 오빠도 그랬다며 딸아이 역시 그렇게 하는 건데. 너는 그렇게 해도 잘하지 않았냐 하자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렇긴 하지만 음악을 끄고 하면 더 잘 된단다. 내 말을 끔찍이도 듣지 않던 놈이 시간이 지나자 엄마의 말이 맞다는 걸 깨달았나 싶어 웃음이 났다. 아니, 아마 그때도 알고 있었지만 그냥 반항한 거겠지. 하지만 아이들에겐 각자의 성향에 맞는 교육법이 따로 있다. 큰 아이에겐 항상 감시의 눈초리가 필요했던 반면 딸아이는 알아서 하게 가만 놔두는 게 최선의 방법이다.






지금 딸애는 예전 응석꾸러기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와 있다. 가만 생각해보면 성적에 예민한 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얼마 동안 너무 긴장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쌓인 긴장감은 뾰족한 가시를 만들어 냈고 다른 사람에겐 차마 보이지도 못할 그 가시를 세상 제일 만만한 나에게만 드러냈을 것이다. 다행히 첫 모의고사와 중간고사에서 나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고 나니 다시 마음의 여유를 찾은 듯하다. 사실 이 글은 한 달 전에 쓰다만 글로 당시 가제는 '굳게 닫혀진 문'이었다. 그사이 아이 마음에 찾아온 변화만큼 문의 열린 정도도 달라졌다. 그래서 후반부는 처음 의도와 전혀 다르게 이야기가 전개되었다.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아이의 고등학교 생활에서 그 문이 또 언제 닫힐 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옆에서 묵묵히 아이를 기다려주고 끝없는 지지를 보내는 게 나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혼자 달리다 넘어지면 아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옆에서 힘껏 응원해주는 게 페이스 메이커에서 은퇴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걸 잊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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