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말할 게 있는데...

by 코니

바다가 있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실상 바다를 찾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바다가 가까이 없는 곳에 산다면 상황은 아마 조금 달라질 게다. 짭조름한 냄새가 섞인, 대지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바람의 감촉과 내 마음속 불안마저 산산이 부서 줄 것만 같은 파도가 못내 그리울 테다. 부재에 대한 갈망이겠지. 분명 따로 시간을 내어서 그 푸른 정경을 기어이 보러 가고 말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맘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든 그 정겨운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기에 간절함은 줄어든다. 직접 보지 않아도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그런 존재라 할까. 하지만 큰애는 집에 오면 꼭 바다를 찾는다. 아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내륙도시라서 바다를 보려면 제법 수고를 들여야 한다. 이번 바다 동행엔 아이는 친구가 아닌 나와 남편과 함께 했다. 모두들 모처럼의 바다 산책에 날씨마저 따뜻하여 기분 좋은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한동안 계속 집에만 있다 깨끗하고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니 어느새 마음속 쌓여있던 긴장들이 사르르 녹아내림이 느껴졌다. 덕분에 그동안 미뤘던 많은 대화를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남편은 언제나 그렇듯 몇 걸음 앞서 걸으며 대화에 끼어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그저 우리의 대화를 무심한 듯 엿듣고만 있었다. 그 뒤를 나와 아이가 팔짱을 끼고 따르며 이런저런 얘기를 한창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가 갑자기 뜻밖의 얘기를 한다.

"엄마, 말할 게 있어. 사실 나 여자 친구 생겼어."






다른 도시에서 자취를 하는 아이는 설 연휴가 한주 지나서야 집에 왔다. 가장 친한 친구의 군대 첫 휴가를 맞춰서 온다기에 그러라고 했다. 굳이 명절을 같이 할 이유도 없고 앞으로도 아이들에게 명절을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냥 서로 부담 없이 어떤 의무감도 느끼지 않은 채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오히려 지속 가능한 좋은 관계가 될 수 있다는 걸 우리 부모세대와의 관계에서 충분히 깨달았다.

"다른 친구들은 다 집으로 갈 텐데 너는 거기서 혼자 뭐하게?"

어차피 방학이고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기에 언제든 집에 오고 싶으면 오면 된다. 그렇다고 집에 와도 달리 할 일은 없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다르다. 아이가 집에 오면 그동안 그리웠을 엄마 밥을 해먹이기 위해 끼니때마다 신경 써서 밥을 차려야 한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챙겨준다고 혼자 바쁘고 힘들기에 안 온다면 더 반가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내색을 비추면 속으로 섭섭해할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아르바이트나 해야지."

어라, 어쩐 일로. 살짝 놀라기도 했지만 흐뭇했다. 드디어 이 놈이 정신을 차리는구나 하고.




아이는 원체 게으르다. 나하고는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같이 지내려면 나에게 많은 인내가 요구된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아침에 일찍 학교에 갔다 밤이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오니 같이 부딪힐 일이 적었다. 또한 모든 게 그저 너무 안쓰럽게만 보여 어지간한 건 내가 다 알아서 해줬다. 이불도 펴주고 개어주고 허물 벗어 놓은 듯한 옷들도 정리해주고 아무렇게나 놓아둔 음식의 잔해들과 비염 때문에 책상을 다 뒤덮은 코 푼 휴지까지 매일 싹 치워줬다. 뭐든 필요한 게 있겠다 싶으면 먼저 알아서 챙겨줬다. 본인은 내가 이렇게 말하면 무슨 그렇게까지라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하녀도 그런 하녀가 없었다. 그저 집에 있는 시간만큼은 아이를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사실 아이들 키우면서 가장 힘든 게 지들 비위 맞춰주는 거다. 그런데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곧 내 곁을 떠날 줄 알았던 아이는 코로나 때문에 1년 이상을 집에 더 머물려야 했다. 고3이었기에 제공되었던 그 모든 서비스들은 기간이 만료되어 더 이상 제공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건지 아님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지 여전히 수험생 같은 게으름을 집에서 피우고 있었다. 결국 내가 버릇을 잘 못 들인 셈이 되었다. 게으르고 꼼짝을 않던 아이의 모습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릴 것 같은 순간이 왔을 때쯤 아이는 방을 구해 부리나케 내 곁을 떠났다. 그게 작년 5월의 이야기이다. 어찌나 속이 후련하던지 아직까지 그립고 보고 싶고 그런 건 잘 못 느끼고 산다.




수능이 막 끝났을 땐 아이는 교대 면접 준비도 소홀히 한채 왕복 두 시간 거리의 건어물 가공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찌나 열심히 다니던지 만약 저 마음가짐으로 재수를 한다면 서울대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에어 팟도 사고 옷도 사고 여행도 가고 하더니만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는 몸을 쓸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동생 친구 엄마가 부탁하여 넉 달 정도 과외를 한 게 다였다. 공장 월급 받은 것도 남아있고 대학생이라고 용돈도 좀 올랐겠다 거기다 과외로 번 돈도 가족들에겐 단돈 10원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모아 두었으니 수중에 돈이 좀 있었던 게다. 더구나 생전 안 해보던 일들이라 제 딴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힘들었는지 더 이상의 어떤 알바도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생활비를 넉넉히 주는 것도 결코 아니다. 하지만 집에 올 때면 이것저것 싸가고 남편이 아이한테 연락해 나 몰래 필요한 걸 한 번씩 따로 챙겨주고 하니 그렇게 궁핍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남편과 나는 대학 시절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인데 이 놈은 내가 아르바이트는 좀 안 하냐고 물으면 이해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아주 짧은 대답을 한다.

"굳이"




내가 부족한 환경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 없이 살아와서 그런지 이왕이면 아이들도 자립심이 강하길 바라는 편이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필요 이상의 도움은 오히려 부모만 믿고 스스로 별 노력 없이 주위 사람만 피곤하게 만드는 걸 많이 봐왔다. 학생이라도 직접 땀을 흘려 돈을 벌어봐야 스스로의 경제관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가 그냥 준 돈과 본인이 일해서 번 돈은 분명 확실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그를 통해 노동과 돈의 소중함도 깨달았음 한다. 그렇다고 생활비나 학비에 보태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 정도의 지원은 나도 충분히 능력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게으르고 어딘가에 매이는 게 싫어 과외도 안 한다는 녀석이 어쩐 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기에 그저 철이 든 줄 알았다. 집에 온 아이에게 그동안 무슨 알바를 했는지 물어봤다. 생선가게와 카페에서 일을 했단다. 생선 가게? 집에서는 구운 생선도 엄마, 아빠가 뼈를 다 발라주면 먹는데 무슨 그런 일까지 했는지 의아해하면서도 어쨌든 잘했다 했다. 그렇게 힘들게 일해봐야 임용 시험 합격해서 선생님 되는 게 얼마나 좋은 지도 깨닫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할 것 같았다.




아이 친구 중 내가 알고 있는 한 명은 항상 전단지 알바를 한다. 그런데 그 친구 집이 굉장히 잘 산다. 할아버지가 건물이 몇 채나 있고 세뱃돈도 백만 원 단위로 받는다 했다. 게다가 나이도 어린놈이 다른 친구들 보고 골프 배우러 함께 다니자고 하고 고급 회초밥도 먹으러 가자는 녀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주일에 몇 번씩 그 일을 2년이나 하고 있다. 한 번은 우리 아파트에도 전단지를 붙이려 왔는데 그때는 우리 아이도 함께 그 일을 했었다. 일을 마치고 온 아이는 너무 힘들어서 두 번 다신 못하겠단 소리를 했다. 그렇담 부잣집 아들인 친구는 도대체 그 힘든 일을 왜 그리 공부보다 열심히 하는지 물어봤다. 아이의 대답을 듣는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여자 친구가 있잖아. 그것도 서울에 있는 여자 친구"

그렇게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는 이유가 데이트 비용이랑 서울까지 왔다 갔다 하는 경비를 보태기 위해서였단다.




바다를 향하는 차 안에서 아이에게 여자 친구는 없는지 물었다. 모든 게 푸릇푸릇한 20대 때 연애도 많이 해보고 이름답든 가슴 시리든 추억도 많이 쌓았으면 하는 게 인생 선배로 바라는 바이다. 게다가 입학과 동시에 코로나가 유행하는 바람에 비대면 수업이 많아 동기들과 어울릴 기회도 많이 없었지만 이왕이면 같은 학교 여자 친구를 사귀면 훨씬 좋을 것 같았다.

"아니, 여자 친구는 없는데"

속으로 그럴 줄 알았다 싶었다.





"사실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아까 엄마가 갑자기 차 안에서 여자 친구 얘길 물어보니깐..."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물어본 말에 거짓으로 답하려니 여자 친구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사귄 지 얼마 되었냐고 물어보니 이제 겨우 한 달이 넘었단다. 1년이면 몰라도 한 달밖에 안 된 놈이 무슨 여자 친구가 있다고 내게 이리 이른 고백을 하는지. 이런 말은 좀 미안하지만 이제 막 시작 단계라 솔직히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아마 바다가 주는 어떤 푸근함이 아이로 하여금 나에게 고백하게끔 했는지 모른다. 설레이는 아이의 맘을 파도가 더 요동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고. 그냥 친구로 만난 지는 좀 되었는데 고백하고 본격적으로 사귄 지는 한 달쯤 되었다 했다. 대뜸 학교는 어디냐고 물었더니 다행히 같은 학교란다. 음 그건 괜찮군. 얘기하는 걸 들어보니 둘이서 서울이랑 강릉도 여행 다녀왔고 자취방에서 서로 한 번씩 밥도 해주고 한 것 같았다. 엄마 생일 때는 선물하나 없는 빈손으로 아무것도 안 하는 놈이 얼마 전 여자 친구 생일 때는 미역국까지 끓여 줬단다. 그리고 그 친구도 자기에게 밀키트 닭갈비를 한번 해줬는데 맛있었다고 했다. 친구가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지 궁금해졌다.

"세상에 요리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냥 하는 거지"

그걸 아는 놈이 엄마가 밥하는 건 한 번도 도와주지도 않고 빈말이라도 설거지해준다는 소리도 안 하다니. 들을수록 조금씩 괘씸해진다. 부아가 나기 전 얼른 화제를 바꿔 너보다는 좀 부지런하겠지 하고 물어보았다. 과외 아르바이트는 하는데 일상은 아이보다 더 게으르단다. 듣고 싶지도 바라지도 않던 소리다. 이것저것 묻고 듣다 보니 이놈이 어쩐 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는지 생선가게에서 하루 12시간이나 일해야 될 만큼 돈이 왜 필요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리고 한동안 전화가 왜 뜸했는지도.




집에 돌아와서 아이에게 혹시 여자 친구 사진을 볼 수 있는지 물어봤다. 어떤 모습의 친구인지 궁금했다.

'우리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가 이렇게 생겼구나'

마스크 때문에 정확하게 알아보긴 힘들었지만 왠지 낯선 모습이다. 사진상에는 잘 안 보이는데 아이 말로는 쌍꺼풀이 아주 짙단다. 쌍꺼풀이 있든 없든 본인만 좋으면 되지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단지 아이가 좋아하는 친구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궁금했을 뿐이지. 그 후 더 이상 아이에게 여자 친구에 대해서는 일절 물어보지 않고 있다. 아니, 다시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간 지 2주가 다되어가는데 이놈에게서 전화 한 통 오지 않고 있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첫사랑의 추억은 대게 아픔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목석같은 남편 역시 그러했다. 결혼 전 살살 꼬드겨가며 그의 첫사랑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눈치 없는 남편은 내가 편한 분위기를 만들자 술술 잘도 얘기했다. 듣자 하니 헤어지고 난 뒤 술 마시고 울고 찾아가고 나만큼 가관이었다. 하지만... 그게 바로 첫사랑이지. 그만큼 순수했다는 거고 그렇기에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가슴에 남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내가 너무 어리고 어설펐기에 그냥 기억에만 남는 걸로.




22살 그리 빠르지 않은 나이에 아이에게 드디어 첫 여자 친구가 생겼다. 그 모든 걸 겪어본 나이라서 왠지 이래저래 쓸데없는 걱정이 많이 된다. 그리 야무지지 못한 놈이라 혹시 상처를 받고 힘들어 하진 않을지 첫 정이라 혼자 너무 진지하고 들떠있는 건 아닌지 별 생각이 다 든다. 집에 연락이 뜸한 게 혹시 좋지 않은 결과로 혼자 방구석에서 슬픔을 삭힌다고 그런 건 아닌지 오히려 내가 더 두렵다. 한편으론 부모에게 감정 표현을 잘하지 않는 아이가 바다에 떠밀려 내게 여자 친구의 존재까지 얘기해준 게 고맙기도 하다. 하지만 본인이 먼저 얘기를 하면 몰라도 이것저것 물어보지는 않을 생각이다. 친구도 아닌 아들의 연애사에 엄마가 너무 관심을 보이면 본인이 너무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게다가 집에서 하는 거랑 밖에서 하는 거랑 똑같지는 않을 테니 어쩌면 아이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더 성숙해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군대도 갔다 오지 않은 아이 인생에 앞으로 어떤 만남이 이어지고 멈춰지고 또 새로 생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나 또한 뜨겁고 가슴 시린 그 시절을 겪어보지 않았나. 그저 모든 걸 꿋꿋이 잘 헤쳐 나가고 지금 사랑할 때 누구보다 더 열심히 사랑하기 바라는 게 그저 나의, 엄마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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