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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Sep 15. 2024

선창, 스티브스톤, 울려고 오지 않았네

주마간산 여행기 (6)

선창, 스티브스톤(Fisherman’s wharf, Steveston), 울려고 오지 않았네


몇 년 전, 미 서부를 여행했을 때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인 관광명소인 피셔맨스 워프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탈리아계 어부들의 선착장으로부터 시작된 피셔맨스 워프는 해안을 따라 길게 형성된 부두에 각종 기념품 가게와 해산물 레스토랑 등이 자리해 있는 곳이었다. 또한 영화 ‘더 록(The Rock)의 촬영지로 미 연방교도소가 있었다는 알카트라즈 섬으로 향하는 배와 크루즈 선착장이 있어 늘 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각각의 부두마다 번호가 매겨져 있는 데 피셔맨스 워프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39번 부두로 100여 개가 넘은 쇼핑 상점과 가족단위 여행자를 위한 위락시설,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는 곳이었다. 바다사자 떼가 선착장 위로 올라와 휴식을 취하는 색다른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다. 


 아내와 함께 간 한국인들의 단체 여행이었는데, 서로 ‘원조’(Original)라고 대문짝만하게 간판에 새겨진 해산물 레스트랑 중에서 진짜 맛있는 클램챠우다(Clam Chowder;조개스프)집을 찾는 방법은 단 한가지. 무조건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곳에 가는 것이었다. 겉은 딱딱한데 부드러운 속을 파서 밥공기처럼 보이는 둥근 빵에 조갯살, 감자, 햄 조각 등을 밀크 크림 속에 담궈 주는 그 맛은 일품이었다. 같은 맛을 밴쿠버에서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불가능했다. 집집마다 지역마다 담그는 김치나 된장 맛이 자르듯이 그 집의 레시피는 그들 고유의 것이었다. 


 즐거웠던 여행은 항상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법이다. 눈에 보이는 정경뿐 아니라 혀끝에 느껴지는 낯선 곳의 미각 또한 그러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그 맛을 밴쿠버에서도 느껴보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절대조건은 우선 선창이 있어야 한다. 분위기가 때로는 미각의 추억을 좌우한다. 열심히 찾은 곳이 스티브스톤 선창이었다. 그래서 다시 스티브스톤에 들었다.

해산물 식당가

스티브스톤 선창(Fisherman’s wharf) 표지판(좌)과 해산물 식당(우) 정경


그러나 도자기 그릇에 담겨 나오는 스티브스톤의 클램차우더는 아무래도 샌프란시스코의 미각 을 상기시켜 주지 못했다. 대신 스티브스톤 선창가에서는 다른 미각을 경험하였다. 해물 오무라이스. 겉으로 보기에는 계란부침을 밥에 올린 일반 오무라이스와 달라 보이지 않지만 내용물이 새우, 연어, 대구, 조갯살 등이 섞여 있어 독특한 해산물의 맛을 느끼게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으니 밥을 먹었으면 선창을 소요하며 구경을 할 일이다. 특히 선창가에 정박한 어선에서 직접 파는 싱싱한 해산물을 싼 값에 구입하는 것도 하나의 재미. 나중에 대형슈퍼매장 가격과 비교해 보니 그리 싼 편은 아니었지만 갓 잡은 것이라 신선도는 있었다. 특히 참 새우가 많이 들어오지만 계절에 따라 홍어, 대구, 가자미, 연어, 참지, 문어, 게, 상어 등을 흥정을 통해 구입할 수 있으니 한번쯤 방문해 볼만하다. 어선은 주중에도 들어오지만 생선의 종류가 한정되어 있어 수산물을 사려면 주말 오전 10시경에 방문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곳에 올 때마다 나는 자갈치시장을 떠올린다. 1989년 부산에 본점을 둔 동남은행의 창립요원으로 발령받았을 때 일이다. 안정적이던 국책은행의 차장 직을 버리고 아내와 어린 아들이 있는 서울을 떠나 생의 모험을 찾아 부산으로 갔다. 창립준비라는 것이 무척 많은 업무를 요구하는 일. 아침 8시부터 저녁 9시, 때로는 밤을 새우기도 하며 정신없이 일했다. 그러나 휴일이면 자갈치시장에 나가 ‘선창’ 이라는 옛 유행가를 흥얼거리며 외로움을 달랬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웃으려고 왔던가/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맞은 백일홍’


한때 내 청춘을 바치고 꿈을 키워가던 직장을 한 순간에 버린 후회는 없었다. 서른 아홉나이. 변화를 시도하고 싶었다.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10년 후, 날개는 꺾어지고 이카루스(Icarus;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 아버지가 만든 날개를 가지고 크레타 섬 감옥을 탈출하다 떨어져 죽음)처럼 추락하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많은 이들이 함께 추락하는 것이었다고 할까? IMF가 몰고 온 참담함이었다.


 그로부터 또 5여년 후. 나는 이국의 선창에서 태평양으로 향하는 바닷길 목을 보며 또 다른 외로움을 달래고 있었다. 내 운명은 야누스처럼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동남은행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그럭저럭 국책은행에서 정년을 맞았을 것이고, 밴쿠버에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보람있는 삶도 없었을 것이다. 운명의 신은 한쪽 문을 닫는 동시에 다른 쪽 문을 열어 두었던 것이다.


여기 너 올 데 아니야

여기 너 올 데 아니야

 

포구에서 밀려나 길 잃은

재 갈매기 한 마리

센트랄 공원 연못 주변에서

방황하고 있다

어쩌다 사람들이 던져 주는

부스러기 빵은 어느새

터줏대감인 청둥오리와

갈가마귀 레이븐 패거리들이

가로 채 버리고

 

허기진 삶 움켜 쥐며

힘겨이 올라온 목조 저층

임대아파트 옥상 굴뚝 위에서

잠시 숨 돌리는 그는

잃어버린 조나단 갈매기의

꿈을 꾼다

 

태평양을 볼 수 있을 때까지

더 높이 더 멀리

날아오르고 싶은 나날들이

비안개 속에 묻혀

속절없이 흐르고 있다.

(‘갈매기의 꿈’ 필자의 시집 이방인 향단이’ 중에서)


이 시(詩)를 쓸 때는 이주 초기였다. 말도 통하지 않고 인심은 낯설기만 한데 세월은 무심히 흐르기만 하고. 어쩌다 만나는 잘 난 사람들은 ‘여기 그대 같은 분이 올 곳이 못됩니다.’하며 법정의 판사처럼 내 선택에 유죄판결을 내렸다. 그러나 다시 10여 년이 흐른 지금. 신(神)의 짓궂은 시험을 통과한 나는 밴쿠버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회봉사로, 학문(무역학)으로, 문학으로, 그리고 대인관계가 잦은 생업(비즈니스 컨설팅)으로. 평소 존경하는 신협은행의 ㅊ행장이 지인에게 나를 소개하며 ‘밴쿠버에서 이사람 모르면 간첩’이러고 할 때 ‘과찬의 말씀’이라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은근히 속으로는 그러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엉큼함이 몸에 배어가고 있었다. 착각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다.


그래서 40~50대의 소위 ‘낀 세대’이민자들에게 조언한다. 한국에서의 지위와 체면과 자존심 같은 것은 잠시 책상서랍에 보관해 두세요. 밑바닥부터 시작하세요. 그대의 활동연령에서 10년을 차감하세요. 캐나다에서는 일하는 데 규정된 정년은 차츰 철폐되어가고 있고 실질적 정년은 한국보다 10년 많은 70대이니, 지금 40대인 당신은 여기서는 30대입니다. 서바이벌 잡(survival job; 기초생활비를 벌기 위한 노동 등의 직업)에 종사하되 꿈을 버리지 마세요. 그대가 한국에서 하던 일과 관련한 공부를 여기서도 하세요. 각종 자격증에 도전하세요. 그러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추락합니다. 열심히 그대를 위해 투자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보상이 돌아온다는 것을 믿으세요.

그러나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워진다. 조금만 버티면 복지제도가 잘 된 캐나다가 노후를 책임져 줄 터인데. 한국에서도 낀 세대를 위한 번듯한 자리는 없고, 방황하다가 다시 밴쿠버로 오는 사람들을 보면 결실 없이 소비해버린 그들의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선창을 소요하다 게리 포인트 공원이 보이는 동쪽으로 몇 걸음 더 가면 지금은 어업기념관으로 변한 죠지아만 통조림공장(Gulf of Georgia Cannery)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1894년에 스티브스톤 어촌마을에 세워진 당시로서는 제일 큰 공장이었고 BC 주의 참치통조림공장 중 으뜸이었다. 현재는 국가유적지(National Historic Site)로 옛 시절을 말해주는 관광명소로 바뀌어있다. 통조림 제조공정이 당시 그대로 재현되어 있는 데 어른 입장료 7불 80전을 내면 시간당 진행하는 안내인의 인도에 따라 설명도 듣고 전시물과 필름 등을 보면서 그 시절의 장소와 사람들의 편린을 체험할 수 있다. 출입구에는 각종 기념품과 책자 등을 파는 상점이 있어 방문을 추억할 수 있는 소품등을 구입할 수 있게 하였다.


 통조림공장 앞에는 ‘스티브스톤의 전설(Steveston’s Legacy)’이라는 동상을 볼 수 있다. 2009년 8월에 제막식을 가진 이 동상은 세 명의 어업관련종사자들을 표현하고 있다. 한때는 잘나가던 어부였으나 지금은 은퇴하고 그물수선을 업으로 살아가는 늙은이는 거룻배어선의 포획생선하역작업을 마악 마치고 미쳐 치우지도 않은 삽을 손에 쥐고 있는 젊은 남자와 커피한잔으로 휴식시간을 즐기는 인근 통조림공장의 여성근로자에게 지나간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노인의 이야기에 흥미로워하는 것을 보면 입담이 대단한 모양. 늙으면 기운이 입으로 간다고 했던가? 그들의 동상을 보고 있노라면 1930년대 어업의 전성시대였던 스티브스톤으로 돌아가 함께 이야기를 듣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 동상의 조각가는 노만 윌리엄스(Norman Williams). 동상을 만들려는 발상은 1960년 노만 윌리엄즈와 키쓰 루이스라는 두명의 학생이 로워메인랜드의 타 지역에서 스티브스톤 고등학교로 전학 오면서 비롯되었다. 스티브스톤 커뮤니티의 독특한 점에 놀랐고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해 보자고 의견을 나누었다. “정말 다채로운 커뮤니티다. 난 이 지역에 대한 소설을 쓰겠어”라고 키쓰는 말했다는 것을 윌리엄은 회상했다. 30년 후 1992년 고등학교 모교방문행사에서 다시 만난 둘은 그 일을 생각해냈고, 직업조각가가 되어 있던 윌리엄은 스티브스톤의 활력적인 면과 다양성을 표현하기 위한 조각물을 만들 것을 생각했다. 정부와 많은 지역단체와 개인 후원을 받아 내었다. 노만 윌리엄의 다른 작품은 밴쿠버 다운타운에 있는 로저스 경기장 3번 출구 앞에 서 있는 밴쿠버 커눅스(아이스학키 팀)의 코치인 로저 닐슨(캐나다 아이스하키 경기의 발전에 기여함. 2003년 사망)의 동상이다. 2011년 4월 7일 세워졌다.


‘스티브스톤의 전설’ 동상


 스티브스톤 어촌마을은 또한 각종 영화 및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다. 선창가 풍경이 이색적이라서 헐리웃 영화제작자들의 촬영장소 헌팅이 잦다. 미국드라마 스몰빌, 원스어폰어타임 등이 여기서 촬영된 부분이 많다고 한다. 미국영화보다는 중국드라마가 인상에 남는다. 


 우연히 “별료, 온가화”(別了, 溫哥華; 중국어로 ‘안녕, 밴쿠버’라는 뜻)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중국 여류소설가 ‘상림’의 소설 ‘눈 온 뒤의 토론토’를 각색한 드라마인데, 춥고 눈이 많이 오는 토론토보다, 비가 많지만 중국인도 많이 살고 촬영하기에 온화한 날씨와 수려한 풍광 등을 감안해서 밴쿠버에서 거의 대부분을 촬영하였다. 특히 여자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양석(극중 이름)이 아르바이트 하던 중국식당이 스티브스톤에 있어 그곳을 지나칠 때 마다 본국에 약혼자가 있는 육대홍(극중 이름)과의 불안정한 사랑의 행각이 생각나게 한다.


 저마다 희망을 안고 캐나다 밴쿠버에 이민이나 유학을 오고, 나름대로 낯선 이국에서 적응해 가며 열심히 살아가려 노력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꿈과 희망은 현실 속에서 사라진다. 그나마 낯선 곳에서 만난 소중한 사랑이 위안이 되지만 결국 행복을 찾는 곳은 자신이 태어난 나라, 중국이라고 이 드라마는 강조한다. 좀 웃긴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캐나다로 오기 위해 이민신청을 해 놓고 5년 이상을 기다린다고 한다. 심지어는 과거에 우리가 하던 부끄러운 행동, 즉 캐나다에 와서 출산하고 아이가 시민권을 자동적으로 획득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고 한다. 모르는 곳에서 만난 젊은이들의 사랑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생뚱맞게 마지막에는 한국 시골바닥보다 후지게 보이는 그네들의 고향에서 정착하면서 역시 타향보다 고향이 낫다고 하는 대사에 아이러니를 느낀다. 


 해외에 와서 사는 것은 이제는 모국을 버리고 자기만 잘 살겠다는 개념의 발로가 아님을 확신한다. 특히 한국 같은 좁은 국토에서 벗어나 오대양 육대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은 국토를 넓히는 것과 같다. 스티브스톤이 속한 리치먼드는 마치 홍콩을 방불케 하고, 상점간판이 아예 중국어로 쓰여진 곳이 많아 비 중국인들이 영어를 병행해 달라고 시청에 청원을 낼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 지역은 이미 백인들이 사는 캐나다가 아니다. 

밴쿠버에서 한인 상가 밀집지역인 노스로드(North Road)도 마찬가지다. 대형 한인몰이 2개가 서로 길 하나를 마주하고 있는 그곳에는 한글간판이 많이 눈에 뜨인다. 들리는 말도 온통 한국어다. 그래도 외국인들이 국적을 알고 싶을 때 우선 ‘중국인이냐?’고 묻는다.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면 영락없다. 다행인 것은 예전에는 깔끔하게 차려입고 다니면 ‘일본인이냐?’라고 물었지만 지금은 바로 ‘한국인 맞지요’ 라고 한다. 커진 한국의 위상을 실감한다. 


 한국에서는 돈 좀 있다면 너도나도 외제차 사기에 급급하지만 밴쿠버에는 오히려 현대 차의 숫자가 증가한다. 우리 집 차도 지금은 현대 차다. 가끔 시가지를 운행할 때 전후 좌우가 현대, 기아차이면 한국에서 운전하는 듯한 착각을 느낀다.

정치인도 그러하다. 종신직인 연방상원의원이 밴쿠버 출신 연아마틴(한국명 김연아)이다. 그리고 주의회, 연방의회 하의원 선거에 속속 한국인이 출마한다. 이러다가 수십 년이 지나면 적어도 밴쿠버에서는 백인들이 소수민족이 될 것이다. 많이들 오세요. 한국인 여러분. 한국도 우리땅이고 밴쿠버도 우리땅이 될 것입니다. 많이들 만 오세요. 스티브스톤 선창에서 태평양을 보며 한번 고함을 질러 본다. 아직 외로움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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