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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Sep 12. 2024

스티브스톤 게리포인트 공원, 어부 이야기

주마간산 여행기 (5)

스티브스톤 게리포인트 공원(Steveston Garry Point Park), 어부 이야기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


스티브스톤 어촌마을에 들어서면, 그래서 프레이져강과 태평양이 만나는 수평선을 보면, 어린 시절 흥얼거리던 동요가 아직도 입가에 맴돈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 갔느냐.’


 동요를 부르던 꿈 많던 아이는 성장하여 결혼하고, 다시 자기를 닮은 아이를 가진다. 아이에게 귀에 익은 노래를 가르치며 늙어 가다가 이제는 손주에게 그 노래를 가르칠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가끔 궁금했던 것은 왜 어부의 딸 클레멘타인이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디론가 가버렸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 지긋지긋한 어촌마을을 떠나려고 눈맞은 옆집 총각과 말만 듣던 대도시로 도망가 버렸나? 

 

 심청이는 아비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임당수에 몸을 날렸는데 클레멘타인은 세상에 눈뜨려고 아비를 버렸나? 영숙이나 순자가 아닌 서양이름인 클레멘타인이 딸이라서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동방예의지국의 딸들은 절대 아비를 버리고 떠날 리 없다. 그런 일은 개인주의가 강한 서양 딸내미에게는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혼자 클레멘타인은 대도시로 가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몸과 마음이 지쳐 마침내 아버지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아주 ‘솔베이지의 노래’와 엇비슷한 소설을 쓰던 문학소년 시절도 내겐 있었다. 

 

 수필시대에 스티브스톤 어촌마을을 주제로 쓰려고 자료를 찾아보던 중 클레멘타인은 어부의 딸이 아니라 광부의 딸이었고, 폐광 촌 동굴 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수해에 휩쓸려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원문 그대로 번역한다면 ‘깊고 깊은 협곡, 폐광 촌 작은 동굴 속에/1849년 캘리포니아에 금 캐러 간 광부아버지와 그의 딸 클레멘타인이 살고 있었네’ 뭐 이런 밋밋한 내용이 되어 버린다. 이를 번역한 소설가 박태원의 풍부한 예지와 감성이 엿보인다. 폐광 촌을 생각하며 이런 노래 부르면 맛이 나랴? 끝간 데 없이 아득한 바다를 보며 이 노래를 불러야 외롭고, 고독하고, 슬픈 아비의 심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지.


 문제는 딸과 아비가 뒤바뀐 것이다. 고기잡이 아비가 바다에 나가 실종되었다면 이야기가 되는 데 철모르는 딸이 도대체 왜 사라져버린 것인지 한국어 번역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조개를 캐다가 파도에 휩쓸렸나? 헤엄을 치다가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아 인어공주가 되었나? 설마 병든 아비 대신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린 것은 아니겠지.


 그럴지도 모른다. 서양 여자들은 자기 주장이 강하지만 생활력도 강하다. 물론 한국여인들도 이에 못지 않지만 개척시대 북미주 서양여자들은 낯설고 황량한 신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남녀 구분 없이 어려운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일을 했을 것이다.

풍랑에 목숨을 잃은 어부들을 기념하는 그물낚시바늘 비(Fishermen’s Memorial Needle). 


풍랑을 만나 침몰된 배와 타고 있던 어부들의 명단이 기록된 받침대.

실종자를 추모하는 꽃다발이 쓸쓸하게 놓여 있다.

 아비대신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렸을지도 모르는 클레멘타인을 떠올리면 스티브스톤 게리포인트 공원 서남단에 세워진 풍랑에 희생된 어부들을 추모하는 그물낚시바늘 기념비가 새삼스럽다. 프레이저 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입구에 자리 잡아 모든 고깃배들이 이를 지켜볼 수 있다. 희생된 어부들의 명복을 빌며, 살아서 다시 고기잡이 가는 어부들의 행운을 잠시 빌어본다. 


 스티브스톤은 메트로밴쿠버를 이루는 도시 중의 하나인 리치먼드의 남서쪽 끝에 있는 작은 어촌이다. 사실 이제는 어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어부들의 숫자가 줄었다. 1877년 뉴브런즈윜 주 클로버데일에 살던 농부 매노아 스티브스(Manoaj Steves)가 그의 아내 마사(Martha)와 여섯 아이들-윌리엄 허버트, 죠세핀, 죠셉, 메리, 아이다, 월터-과 함께 현재 스티브 스톤 하이웨이 주변 400에이커의 땅을 사서 정착한 것이 최초의 백인 거주기록으로 나타나 있다. 그전에는 인디안 원주민들이 프레이져강을 오르내리는 연어를 잡아먹고 움막에 사는 원시적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스티브스 가족은 밀가루, 소금, 비누, 양초, 난방용 석탄 등의 생필품을 17마일 정도 떨어진 강 상류의 뉴웨스트민스터(당시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수도)에서 작은 배를 타고 왔다 갔다 하며 구입했다. 스티브스톤이라는 마을 이름은 그들 가족이 사는 곳이라서 이름 지어진 것이다. 


 그물낚시바늘 기념비 뒤편에 보면 손바닥만한 일본식 정원이 조성되어 있다. 요즘도 독도를 자기 땅으로 우기는 일본인들은 우리 입장에서는 영원한 가해자이지만 침략 욕에 눈이 먼 정부 때문에 순진무구한 일본인들이 캐나다에서는 피해자가 된 적이 있었다. 


 2차 대전 전범 국인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폭격하자 인접국인 캐나다는 크게 놀랐다. 캐나다는 이튿날인 12월 8일 즉각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캐나다에 사는 일본인들이 본국과 협조하여 스파이 짓을 할 지 모른다고 생각한 캐나다 정부는 1942년 1월 14일 태평양에 인접한 서부해안지역에 사는 21,460명의 일본인들을 내륙지역으로 쫓아버렸다. 당시 스티브스톤 인구와 비즈니스의 삼분지 일을 차지하던 2,600여명의 일본인들도 예외없이 캐나다 정부소속 외국인재산 관리단체(Custodian of Alien Property)에 집과 가구 등 소유재산을 헌납하고, 달랑 1인당 두 개의 여행용가방(suitcase)에 옷가지나 필요 상비품 등만 챙겨가지고 추운 내륙인 알버타나 마니토바주로 강제 이주되어 난방도 되지 않은 창고 등에서 거주했다. 


 처음에는 남자들만 이주명령을 받았으나 나중에야 여자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합류하게 되었다. 캐나다 정부는 1943년 1월 19일 몰수한 일본인들의 재산을 그들의 동의 없이 임의적으로 경매 처분할 수 있도록 하여 강제이주 일본인들은 기회의 땅 캐나다로 와서 50여 년 동안 쌓아온 집, 가게, 토지, 공장 등 모든 재산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래도 전쟁말기에 캐나다 정부가 뱃삯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그들을 일본으로 돌아가게끔 종용하였으나 불과 4,000명만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종전 후 1948년 6월 15일 캐나다정부는 일본인들에게 참정권을 주고, 1949년 3월 31일에는 그들이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아 가는 것을 허락했다.


 게리포인트 공원 남쪽에 위치한 공야정원(Kuno Garden). 작은 공간에 흰 자작나무와 관목, 석등, 분재처럼 잘 다듬어진 흑송 등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일본식 정원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스티브스톤의 일본인 거주 역사는 1877년에 비롯되었다. 만조 나가노라는 어부가 뉴웨스트민스터에 거주하면서 프레이저 강에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1882년 스티브스톤에 피닉스연어통조림공장이 세워지자 그 숫자는 여섯 명으로 늘어났고, 1887년 와카야먀현 미오 촌락에서 스티브스톤에 정착한 기헤이 쿠노(Gihei Kuno)라는 어부가 고향마을 사람들을 불러 들이면서 일본인들의 수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소문이 고향마을에 퍼지자 젊은이들도 부모로부터 물려받을 수 있는 재산을 포기하면서 새로운 희망을 찾아 스티브스톤으로 몰렸다. 1888년부터 1988년까지 약 5,000여명의 일본인들이 스티브스톤에 거주하였는데 결국 그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한 기헤이 쿠노를 기념해서 후손들이 1998년에 일본식 정원을 조성한 것이다.


연어 통조림 공장 외부,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약 15여 곳의 연어 통조림공장(cannery)들이 세워져 세계에서 가장 바쁜 어촌 중 하나였던 스티브스톤은 1905년의 홍수피해를 비롯, 잇단 화재, 대륙횡단 철도공사에 따른 영향으로 연어 이동경로인 브리티시컬럼비아의 헬스게이트(Hello’s Gate) 수로 협소화로 프레이저강으로의 연어유입이 감소되는가 하면, 1940년 무절제한 포획방지를 선언한 국제태평양연어보존위원회의 영향, 그리고 1960년대 이후 통조림가공기술과 어업기술의 발달 등으로 수작업에 의존하던 통조림공장 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또한 교통 및 운송수단의 발달은 구태여 스티브스톤에 통조림공장을 잔존시킬 의미를 상실하여 마침내 1997년에는 스티브스톤에서 모든 통조림공장은 사라지게 되었다. 어업으로 발생된 재정수입이 감소되자 리치먼드시는 1990년대부터 이 지역을 주거 및 관광지역으로 조성하기 시작했다. 


 건축용 모래 채취장과 퍼스트 네이션 원주민들의 주거지로 사용되던 39에이커(약 158,000평방미터)의 프레이져 강 입구 주변 땅은 1980년 ‘게리포인트 공원’으로 공식 지정되었다. 연녹색의 진흙바닥이 태평양을 향하는 조지아해협까지 이어지는 이곳에서는 멀리 밴쿠버 섬, 걸프 섬, 서북밴쿠버의 산들, 시애틀의 베이커산 등을 관망할 수 있어 관광객들은 물론 현지 주민들도 즐겨 찾는 공원이다. 층층이부채꽃(lupines), 깔깔이국화(strawflowers), 스위트피(sweet peas)들이 군락을 이루고 블랙베리와 야생사과나무가 방벽처럼 해안을 따라 늘어서 있고, 죽은 자를 추모하는 기념벤치(memorial benches)들이 공원둘레 전망 좋은 여기저기에 있어 자갈길 산책로를 소요하다 잠시 피곤해진 이들을 쉬게 한다.


소형어선이 정박해 있는 스코틀랜드 연못(Scotch pond)

 

 해안가 개펄지역에서 공원으로 들어오는 작은 수로 끝에 연못이 하나 있다. 사방이 가로막힌 연못은 아니지만 해안에서 떨어져 있어 조수간만의 영향을 덜 받고 소형어선들이 파도를 피해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어 그냥 ‘연못’이라 부른다. 1890년대까지 그 지역 머스퀴움 인디언(Musqueam Indian)들의 묘역으로 사용되었으나 연못 끝자락에서부터 진흙 뻘이 아닌 마른 땅으로 연결되며 소형 어선들이 쉽게 내륙으로 접근할 수 있어 1899년 세워진 스코틀랜드 계 캐나다인 통조림공장으로 가는 길목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연어잡이 소형어선들이 늘어나니 기술 좋은 일본인들이 이것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타키(Atagi)라는 사람이 1905년 재빠르게 어선제조 및 수리소를 만들어 제법 짭짤한 수익을 올렸지만 1940년대 일본인 강제이주 시 캐나다인 마이크 데이비드에게 눈물을 머금고 넘겨주게 된다. 그러나 타쿠가키(Takugaki)라는 자가 다시 인수하여 그 수리소 건물은 1949년 일본인에게 되돌려진다. ‘일본인의 것은 일본인에게로’라는 일념으로 기어이 소유권을 회복하였지만 기록이 없어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970년대 중반에 ‘잔해가 철거되었다’는 리치먼드 시청 기록으로 유추해 볼 때 통조림산업의 사양과 함께 문을 닫지 않았나 추측된다.

 

 캐나다 어업회사가 그 지역에 1950년대부터 주변 개펄을 퍼내고 목조건물을 세워 어망수선 및 창고 용으로 사용하다가 1989년 리치먼드 시에 매각하였고 지금은 스코틀랜드연못 유적 보전위원회에서 소형어선의 정박지, 어망/어구 수리와 보관 용도로 관리 및 사용하고 있다.

 

 부족한 영어실력으로 리치먼드 시청과 도서관 자료를 번역하여 장황하게 나열하다 보니 ‘문학이 살아 숨쉬는 현장’이라는 주제에서 한참 벗어나버려 소중한 시간을 할애하며 필자의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수필 쓰면서 자기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인데, 내가 사는 곳의 나도 모르는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찾아내다 보니 재미가 쏠쏠하고 남들에게도 알리고 싶은 욕심이 든다. 따는 수필이 ‘사람 사는 이야기’들을 쓰는 것이라면 우리가 전혀 모르던 시대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번역이라는 도구를 통해 표현해 보는 것도 수필문학의 한 표현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억지춘향 식 자기합리화일까? 독자님들의 양해만 믿고 용감무쌍하게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수 밖에 별 도리가 없겠다. 

 

 스티브스톤에 오면 게리포인트공원을 먼저 찾는 것은 순전히 넓은 주차장 때문이다. 걸어서 5-6분 거리에 본격적인 어촌마을-지금은 소위 관광어촌마을-이 있지만 주차장이 협소하다. 다른 이유는 우선 공원주변을 한 바퀴 돌아 충분히 시장 끼를 느끼게끔 한 다음에 해산물을 이용한 각종 음식을 파는 어촌마을 레스트랑으로 향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다. 민족적 감정 때문에 쿠노정원을 보면 괜히 기분이 나쁘지만 햇볕 감미롭게 따사로운 오뉴월에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안으며 걸어가는 산책로가 있어 또한 먼저 공원에 든다. 


‘보름달, 여름 밤. 바닷물 스며들어 섬을 적시다. 강이다. 겹겹이 진흙향내. 강은 한눈도 팔지 않고 바다로 간다. 왠 종일 밤의 내음이 땅의 열기 속을 천천히 스민다. 멈춰버린 도랑물, 수면위로 떠오르는 조류찌꺼기로 찬 하수로, 루루 섬(Lulu Island; 스티브스톤이 있는 섬)은 이제 바다와 결별하였다. 보름달. 유월의 토요일 밤---(중략)---달빛에 창백해진 그 여인은 누군가? 다양했던 꿈들은 그녀를 떠났다. 담배연기와 위스키에 젖은 그녀는 원주민 인디언인가, 중국여인인가, 아니면 일본여인인가? 그 수많은 집들 속에서 살아가는 이름없는 여인---‘(달; 다프네 말렛 영상시집 “스티브스톤”에서 발췌)


서부캐나다 시인 다프네 말렛(Daphne Marlatt)은 사진작가 로버트 민던(Robert Minden)과 함께 1973년부터 2년간 스티브스톤의 이곳 저곳을 돌아보며 사라져가는 역사의 흔적을 시와 사진으로 남겼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그 땅에서 살던 사람들은 농사도 짓고, 물고기도 잡고, 통조림을 만들고 하면서 살아왔지만 옛터전에는 삶의 흔적만 남았을 뿐 차츰 쇠락해가는 통조림산업으로 인해 일터를 잃고 시름에 잠긴 원주민이었는지 아니면 중국인이었는지, 일본인이었는지는 모르는 황색피부의 여인은 이제 없다. 다만 다프네와 로버트가 남긴 시와 사진 속에서 이방인은 예전 사람들의 삶을 엿볼 뿐이다. 이제 그 이방인이 낯선 땅 이곳 저곳을 본대로 느낀 대로 그려가면서 고향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다. 예전에 쿠노가  미오의 고향사람들에게 알려주듯. 


 쿠노정원과 스코틀랜드 연못 사이에 있는 드넓은 잔디밭에는 여름 주말이면 해풍에 연을 날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한국에서만 즐기는 줄 알았던 연날리기를 여기서 처음 보았을 때 무척 신기했다. 대형천막으로 만든 연을 날려 그 풍력으로 바퀴 달린 봅슬레이 썰매 같은 것에 드러누워 신나게 들판을 누비는 모습도 이채로웠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연은 서양에서는 BC 400년경 철학자 플라톤의 친구 알투스가, 동양에서는 중국 한 고조의 명장 한신 장군이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예전부터 연날리기는 동서양 모두의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반백 년이 지나버려 언제, 어디서였는지 생각 나지 않지만 어렸을 때 형과 함께 연날리기를 한 기억이 있다. 형이 연줄을 붙잡고 내가 방패연을 들고 함께 달리면서 바람에 맞춰 연을 날렸다. 처음에는 쉽게 땅에 덜어졌지만 차츰 바람의 방향에 맞추어 연을 날리니 하늘높이 솟아오르는 것이 통쾌하고도 재미있었다. 이제는 함께 늙어가는 처지지만 형은 한국에서, 나는 캐나다에서 따로 하늘을 본다. 짓궂은 친구의 장난에 연줄이 끊겨버려 바람을 타고 한참 가다가 저만치서 힘없이 떨어져버리던 연을 생각한다. 우리들의 인생도 바람을 타고 오를 때가 있었다. 형은 조국을 지키는 해군장교로서, 나는 국가경제의 일익을 맡은 금융기관에서 마냥 날아오르고 있었지만 세찬 운명의 바람이 불어 연줄은 끊기고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무어 어쩌랴. 최소한 우리는 좋은 바람 덕에 하늘높이 연을 날려보지 않았는가. 요즘 바람은 젊은이들에게 연을 날려볼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을.


 연은 영원히 하늘에 머무를 수 없고, 해가 지면 연 날리는 사람들은 하나 둘씩 장비를 거두고 아늑하고 포근한 집으로 향한다. 예전에 형과 나는 같은 집으로 향했지만 이젠 다르다. 내 마지막 가는 영혼의 집은 어디일까?  게리포인트공원에서 솟아오르는 형형색색의 연들을 바라보며 찬란한 황혼을 맞이한다. 즐겁게 보낸 공원의 한나절처럼 여생을 재미있게 보내며 네비게이트를 준비해야겠다. 헤매지 않고 내 집으로 가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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