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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Sep 20. 2024

그랜빌 섬 ① 밴쿠버 인사동

주마간산 여행기 (7)

그랜빌 섬(Granville Island) ① 밴쿠버 인사동


그랜빌 섬을 생각하면 입에 침부터 고인다. 시원하고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본젤라또(Boun Gelato) 아이스크림을 거기서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이 들면서 단 것 좋아하면 당뇨 걸릴 위험이 있다고 하지만 그랜빌 섬의 ‘얼음보숭이’는 단념할 수 없는 유혹이다. 이탈리아 말 그대로 ‘좋은(Boun) 아이스크림(Gelato)’이다. 나는 메이플(단풍) 시럽이 섞인 것을, 아내는 모카커피가 어울린 것을 좋아한다. 물론 아삭거리는 콘에 담긴 것이어야 한다.


아이스크림으로 가벼운 시장기를 모면하고는 섬을 소요한다. 우선 대중시장(Public Market) 뒤편 광장부터 돌아본다. 주말에는 거리의 악사(street musician)들의 공연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라고 우습게 볼 수는 없다. 모두 그랜빌 섬 운영위원회 사무실로부터 공연허가를 받고 시간표에 맞추어 연주한다. 대부분이 CD앨범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실력자다. 큰 극장에서 공연한 경력이 있는 뮤지션도 있는 데,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잔돈푼을 받으려고 공연하는 것을 보면 정말 아이러니하다. 한국 뮤지션들은 굶어 죽어도 이런 ‘쪽’팔리는 일은 하지 않을 터인데 이들은 아랑곳 않는다. 덕택에 그랜빌 섬의 낭만이 이어지는 것이다.


‘칠갑산’을 연주하는 팬플루트 악사


작년 여름, 퍼블릭마켓 서쪽 데크에서 펜플룻을 연주하는 두 명의 칠레 악사들을 만났다. 원래부터 ‘고독한 양치기’, ‘철새는 날아가고’등의 팬 플루트 연주음악을 좋아했는데 그날은 ‘칠갑산’을 연주하였다. 이국에서 듣는 칠갑산. 팬 플루트의 애절한 음색과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는’ 딸의 애틋한 마음을 잘 표현한 곡조가 한데 어울려 심금을 울렸다. 늙으신 어머니를 두고 떠났던 고국이 불현듯 그리워졌다. 선진국에서 잘 지낸다고 생각하다 가끔씩 이런 순간과 맞닥뜨리면 주체할 수 없는 향수에 콧잔등이 시큰해 진다.


한국 대중가요를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물으니, 한국사람이 악보를 전해 주었는데 연주해 보니 팬 플루트 음색에 잘 맞을 것 같아 연습을 했다고 한다. 캐나다 배춧잎($20짜리) 한 장을 서슴지 않고 동전만 즐비한 ‘돈 통’에 넣어 주었다. 앞으로 그들은 더욱 신이 나서 연주할 것이다. 동양인이 오면 돈 많은 한국사람인줄 알고. 모두 다 그럴지는 않을 터인데. 나 같은 감상주의자를 만나기가 어디 그렇게 쉬운가?


여름철 관광성수기에는 전 세계에서 온 형형색색의 관광객들로 섬이 붐비지만 서늘한 바람이 부는 9월의 초입에는 밴쿠버 서민들의 독차지이다. 늦은 관광객들도 드문드문 보이지만 한 주일의 피로를 씻으려는 이민자들이 가족동반으로, 사랑에 들뜬 연인들이 낭만을 찾아서 섬에 든다. 그랜빌 섬은 이들의 요구를 충족해 준다. 16만 평방미터의 작은 섬을 매년 관광객을 포함, 1,20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볼 거리, 놀 거리, 먹을 거리, 즐길 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극장, 예술가의 스튜디오, 각종 기념품 상점 및 공공 슈퍼마켓이 300여개나 있는 데다 퍼블릭 마켓 뒤편을 비롯, 섬 여기저기에서 음악뿐 아니라 묘기실연 등 각종 퍼포먼스가 열려 관광의 즐거움은 고조된다.


영국에서 왔다는 사내는/자신의 몸을 쇠사슬로 묶어 달라고 했다/스스로 사슬에서 탈출해 보겠다고 했다/도망갈 곳이 어디 있다고, 그의 인생/콩알만한 그랜빌 아일랜드에서 (‘그랜빌 아일랜드’, 필자의 시집 “이방인 향단이” 중에서)

 

 아마도 요즘 한국에서는 시골 장터에서도 하지 않을 묘기를 그랜빌에서는 가끔 볼 수 있다. 언젠가 한 묘기공연자가 몸에 쇠사슬을 칭칭 감고는 3분 이내에 사슬을 풀어보겠다고 했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공연이지만 아주 열심이었고, 더러 동전을 던져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거 해서 하루에 얼마나 벌려나? 사슬을 몸에서 풀어내는 기술은 익혔지만 덕지덕지 붙은 가난의 굴레를 풀어헤치고 고달픈 삶의 여정을 벗어나는 기술은 익히지 못한 듯, 웃고 있는 얼굴이지만 대낮임에도 그늘진 인생의 족적은 깊은 주름으로 남아 있었다.  


 해협을 건너 밴쿠버에서 다운타운으로 가는 교량 중의 하나인 그랜빌 다리가 섬을 양분하고 있다. 그랜빌 섬은 오랫동안 밴쿠버 시에 편입되지 않은 독립 인디언들의 터전이었다. 작은 제분공장 마을이었던 이 섬은 1886년 CPR(Canadian Pacific Railway: 캐나다 태평양 대륙횡단철도)의 상륙과 함께 밴쿠버에 속하게 되었다. 19세기에 펄스크릭(False Creek) 지역은 현재보다 그 크기가 두 배였고, 간석지는 그랜빌 다리까지 연장된 두 개의 모래사장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 두 개의 모래사장이 후에 그랜빌 섬이 되었다. 펄스크릭은 밴쿠버 서쪽 해안인 잉글리시 베이의 바닷물길이 밴쿠버 도심까지 깊이 들어 오면서 마치 강은 아닌데(False) 모양은 강(Creek)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1909년, 철골조의 그랜빌 다리가 크리크 지역까지 두 번째로 건설되었고 1915년 밴쿠버 항의 개발이 활성화 되자, 그랜빌 섬 지역은 그 남쪽 끝까지 도로와 철로가 결합된 교량에 의해 본토와 연결되도록 하였다. 지금은 기차가 운행을 멈춘 지 오래고 도로를 파고 드는 철로의 잔해만 남아 있다. 예전 서울에 남아있던 전차 길의 잔해를 보는 듯하다.


 1920년대의 펄스크릭지역은 브리티시 컬럼비아의 남측 해안 제재산업의 허브였다. 반면 그랜빌 섬에서는 새로운 2차 산업인 삼림업, 광산업, 건설업, 조선업 분야가 개발 및 지원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 이르러 그랜빌 섬의 모든 토지는 거의 대부분 공장들로 점유되었고 여기에서 슁글(shingles; 지붕 널빤지), 체인, 통, 철사 로프, 못, 톱, 페인트, 시멘트, 리벳(rivet; 대못), 보일러 등 모든 종류의 산업 도구를 제조하였다. 1930년대에는, 1,200명의 근로자들이 섬에 고용되었고,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전차로 출퇴근하였다.
 
 

 


그랜빌 섬의 과거(상)와 현재(하)

 

그러나 대공황 시기에 이러한 붐은 끝났으며, 펄스크릭의 많은 제재소들은 문을 닫았고, 노동자들이 살던 판자촌들이 크릭 지역의 남쪽 해안 반대편의 수로를 따라 밀집하게 되었다. 전후시기에 산업생산량에 대한 요구가 줄면서 공장은 쇠퇴되고 새로운 3차 산업이 대체하게 되었다. 수많은 공장들로 인해 환경은 오염되었고, 1950년대에 공장이 모두 시 외곽인 크릭 지역의 남은 토지를 산업용지로 이용하여 이전하게 되었다. 


이후 그랜빌 섬은 지속적으로 쇠퇴해 갔으며, 공장의 공실률은 증가하였으며, 인프라는 낡고, 교통체계도 뒤쳐져 빈 창고만 남은 유령도시로 전락하게 되었다. 1973년에 이 지역을 상업지구로 재개발하려는 계획을 거쳐 오래된 낡은 산업시설을 현대화하고, 수변지역으로 공공의 접근을 용이하게 유도하도록 하는 계획안이 세워졌다. 많은 그리고 장기간의 토의와 논쟁을 거쳐 밴쿠버 시는 마침내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 다양한 용도로 사람들에게 즐거운 장소성을 부여하고 거주지를 개선하며, 공공을 위한 공간으로 변모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 수변 산책로로 둘러싸인 부둣가에서는 활동적이며, 연극, 음악, 시각예술, 요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공연들로 볼거리가 풍부하다. 또한 정부로부터 어떠한 금융 지원도 받지 않는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는 지역이다. 캐나다 모기지 주택 공사 CMHC (Canada Mortgage and Housing Corporation)와 a Federal Crown Corporation가 현재 재정을 운영하고 있다.

 


위 사진은 빗자루가게에 진열된 빗자루 제품, 아래 사진은 수작업으로 빗자루를 만드는 장면


그랜빌섬을 처음 찾았을 때 마치 인사동골목 같다는 느낌을 가진 적이 있다. 기념품 가게를 비롯한 다양한 상점들이 관광객들의 눈길을 끌기 때문이다. 이제는 밴쿠버 거주민으로써 자주 찾기 때문에 예전의 신기함은 많이 사라졌지만 가끔씩 특이한 품목을 취급하는 가게가 개점하면 기웃거려 보기도 한다. 


그 중의 하나가 빗자루 가게이다. 그랜빌 섬 빗자루 회사(Granville Island Brooms Co.,)라는 소박한 이름을 가진 이 가게는 록키산맥에 인접한 산골마을 쿠트니(Kootenay)에서 자란 두 자매 메리와 사라가 운영한다. 어릴 적부터 수수를 이용해 빗자루를 만드는 법을 집안에서 배운 자매는 진공청소기에 의해 점점 사라져가는 빗자루를 단순한 청소도구가 아니라 예술공예품으로 만드는 것이 어떨까 생각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가게 안에서 직접 수수로 빗자루를 만들어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벽걸이 장식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를 보여 주기도 한다. 둥글거나 평평한 모양의 비 부분은 멕시코에서 가져오는 사탕수수(Sorghum vulgare)로, 자루 부분은 유칼립투스(Eucalytus), 마닐라 로프, 벼린 금속재, 미국 아리조나 남동부산 철쭉 관목(manzanita),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산 자작나무 가지 등으로 만든다고 한다. 


수작업으로 만드는 예술품이기 때문에 세상에 단 하나 뿐인 빗자루를 가지게 된다며 대단한 자부심을 보인다. 문간에 빗자루를 걸어 놓으면 집안에 들어오는 ‘불행을 쓸어 낸다’고 하는 말에 솔깃해져 하나 살까 생각해 보았으나, 내가 사는 곳은 출입 보안이 철저한 고층아파트니 불행을 쓸어 내는 것은 관리인의 책임이라는 나의 농담에 그냥 웃으며 구경만 하시고 가라고 한다.     


어린이 놀이터 뒤편의 우산가게(The Umbrella Shop)도 독특하다. 그냥 우산 파는 가게인데 그게 뭐 특별하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모른다. 그러나 플레더(Flader) 가족이 할아버지 대에서 손자 대까지 3대째 가업으로 운영하고 있다면 일단은 뭔가 좀 다르다고 봐야 하지 않을 까? 


일년의 반 정도는 비 오는 밴쿠버에서 우산은 필수품. 하긴 백인들은 웬만한 비에는 우산을 쓰지 않는다. 비 오는 날씨에 우산을 쓰는 사람들은 거의 동양인들을 포함한 이민자들. 밴쿠버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릴 때부터 비를 맞으며 뛰놀고 다녀서인지 그냥 후드가 달린 윗옷이나 모자 하나 쓰고 나면 그만이다. 


내 기억에 한국에서는 산성비니, 황사 비니 어쩌고 해서 비 맞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고, 한국 비는 왔다 하면 옹골차게 내려 온 몸이 젖는데 밴쿠버 비는 그야말로 비실비실 배삼룡-작고한 코미디언-비다. 청정기후를 자랑하는 밴쿠버 비는 수목을 자라게 하고 사람까지 자라게 한다. 그래서 밴쿠버 백인들은 키가 큰 것일까? 내게 있어서 비 오는 날은 독서를 하거나 사색에 잠기는 시간을 맑은 날 보다 더 많이 허용한다. 그러면 내 마음속의 인간은 조금씩 성장하여 간다.


각설하고, 우산가게의 창시자 이사도르 플레더(Isadore Flader)는 1920년대에 캐나다 동부 토론토에 살면서 가가호호를 방문, 우산수리를 하면서 근근이 살아가던 사람이었다. 예전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 ‘우산 고쳐드립니다. 우산 고쳐요’하며 동네골목마다 소리치며 다니던 우산수리행상의 슬픈 음성이 장맛비에 젖어 들곤 했었는데, 지금은 거의 사라진듯하다. 형제자매가 많은 집안에서는 찢어진 비닐우산 하나 차지하기도 힘들었던 시절을 지금 젊은이들이 기억이나 할까? 장마철이 지나면 지하철 등에서 버려지는 우산이 수북하게 쌓인다고 하니, 어쩌다 장만한 방수 천으로 만든 우산에 이름표까지 붙여서 소중히 간직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우산살이 부러지거나 방수 천에 구멍이 나면 감쪽같이 고쳐 주던 우산수리공이 마술사처럼 보였는데 토론토의 이사도르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입 소문을 타고 그의 솜씨가 퍼져 나가자 사람들은 집으로 고장 난 우산을 가져오게 되었고 그 수가 많아져서 아예 집 앞마당에다 수리가게를 차리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그의 아내와 세 아들이 우산수리사업에 동참하게 되었고, 일년의 반이 비 오는 날이라는 밴쿠버로 소위 ‘대박’의 꿈을 꾸며 1935년 이주하게 된다. 


1950년에 우산제조용 싱거미싱을 사들여서 제작에 나섰고, 사업규모가 확장되어 밴쿠버 도심 팬더가와 그랜빌 섬에 우산판매가게를 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가업은 아들 촬스와 손자 글랜, 손녀 코리로 이어지게 된다. 지금은 한 개의 공장과 다섯 개의 가게가 있으며 밴쿠버, 토론토를 비롯한 미국의 뉴욕, 시애틀에서 개최되는 무역박람회에 참여하면서 해외진출을 꿈꾸고 있다.  우산, 양산을 비롯 골프용, 옥외점포 패티오용 등 다양한 품목을 만들고 있으며 우산커버에 고객이 요구하는 각종 디자인을 섬세하게 그려 줌으로서 선물용으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중국에서 수입되는 값싼 우산이 웬만한 구멍가게까지 퍼져 있지만 이 가게 우산은 내구성을 자랑하며 무상 보증수리까지 내 걸고 있어 고급우산의 이미지를 북미에 부각시켜 나가고 있다. 가난한 유태인 이민자출신인 이사도르가 우산수리 하나로 아메리칸 드림-캐나다도 북미에 속하니까-을 이룬 것을 보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던 꾸준하게 외길을 걸어온 인간승리의 전형을 볼 수 있어 흐뭇해진다. 다양하고 세련된 디자인에 갈 때 마다 하나 살까? 생각해 보지만 한국에서 선물 받은 우산을 아직 다 쓰지도 못하고 있어 그냥 발걸음 돌린다. 전통 있는 H사가 만든 제품이라 중국산처럼 약한 바람에도 쉽게 뒤집어지지 않고 우산을 선물로 준 기업 또는 단체의 로고가 한글로 커버에 쓰여져 있어 자랑스럽게 사용하는 한국산이 아직 넉넉하게 있기 때문이다. 


세시간의 무료 주차시간이 임박하여 서둘러 주차장으로 향한다. 도중에 있는 노천카페에서 낯익은 사람을 본다. 두 명의 금발여자와 킬킬거리며 맥주를 마시는 사내. 어디서 보았던가? 하는데 눈밝은 아내가 ‘사슬맨’이라고 정체를 밝혀 준다. 퍼블릭 마켓 뒤편 광장에서 3분 이내에 사슬에서 탈출하겠다던 사내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묘기로 관광객들의 잔돈을 모두던 영국출신 사내. 그늘진 얼굴에서 삶의 질곡이 엿보였던 사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주인처럼 당당하고 버젓하다. 흘깃 돌아본 시야에 들어오는 금발여자들도 미모가 상당하다. 은근히 부아가 난다. 애처로움과 동정심이 묻은 관객들의 잔돈으로 여자들과 맥주를 즐기는 모습에. 그럴 여유 있으면 착실히 돈을 모아 동전만한 그랜빌 섬 길거리공연에서 탈출해 보시지. 그러나 사돈 남 말인가? 그는 맥주 한 잔으로 그를 옭매는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우리가 직장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다가 퇴근 후 ‘쐬주 한 잔’을 찾았던 것처럼.  1차는 삼겹살에 쐬주. 2차는 노래방, 그리고 정신 없이 취해 가는 3차는 여자가 있는 술집들. 누구나 그렇지 않았던가? 우리네 한국 남자들의 젊은 날.

 

혼신의 힘으로/몸에 칭칭 감긴 쇠줄 끊어 내면/구속을 벗어난 허탈감에/술과 계집을 찾았다/그 남자의 삶은 그랬다/우리의 젊음도 다를 바 없었다/세월 가며 시들어 갈 때/언뜻 옆을 보면/공기처럼 맴돌던 젤소미나는/애절한 노래만 남기고 사라졌나니/잠파노/슬픈 잠파노/우리의 젊음도 다를 바 없다/눈 뜬 장님이니 우리는/공기처럼 맴돌던 젤소미나를/얼마나 오랫동안/잊어 왔던가(‘잠파노’, 필자의 시집 “이방인 향단이” 중에서)

 

사랑하는 아내는 이제나저제나 남편 귀가를 기다리며 자정이 넘으면 속타 안절부절 못하였는데 남자들은 술에 떡이 되어 들어오면서 ‘사회생활이란 이렇게 힘든 거야. 술을 안 먹을 수 없게 만들어’하며 늦은 귀가와 만취의 변명을 늘어 놓곤 했었지.


그랜빌 섬에서 나의 속박을 벗어본다. 한국에서의 모든 속박은 이미 벗어 던진 지 오래. 나의 ‘젤소미나’는 항상 내 곁에 있고, 아름다운 노래들을 부르며 함께 늙어 간다. 유한의 세월이 우리를 죄어 오지만 ‘손 붙잡고 함께 가자’는 ‘젤소미나’의 언약에 환갑 넘은 ‘잠파노’는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그런 우리를 그랜빌 다리에 걸린 낮 달이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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