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마간산 여행기 (8)
그랜빌 섬(Granville Island) ② 에밀리와 어린이들
2013년 밴쿠버의 여름은 환상이었다. 40여 일간 비가 오지 않아 잔디가 누렇게 변색되었지만 야외스포츠활동을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의 나날들이었다. 그러나 내겐 달갑지만은 않은 여름이었다.
야외스포츠활동을 좋아하지 않는 데다가 자외선에 노출되는 것이 싫어서 챙 모자를 쓰거나 얼굴에 햇빛차단제를 바르거나 하는 일들이 탐탁지 않았다. 나는 영락없는 ‘나 홀로 실내활동 즐기기 파(派)’였기 때문이다. 밴쿠버에서는 탁구를 치는 만큼 대중화되었다는 골프를 칠 시간이 있으면 좋은 영화 한 편을 보는 것이 나았다. 날마다 등산가는 것보다 날마다 재미있는 소설책을 읽는 편이 나았다. 해변가에서 우람한 체격을 자랑하는 야성미 넘치는 남자들을 보면서 괜히 주눅이 드는 것 보다는 새가슴이지만 상상의 해변가에서 시의 바다, 수필의 바다를 내 마음대로 헤엄 쳐 다니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래서 비 내리는 겨울이 와도 두렵지 않다. 해 뜨나 비 오나 내 생활은 거의 변함없다. 은퇴자의 생활이 무슨 큰 변화가 있으랴. 환갑이 넘으면 그 무한한 여유시간 때문에 질식할 것 같다는 남자들이 많다. 전직 동료들이나 친구들의 예를 들어 보자. 직장에서의 승진과 재테크에만 전념해왔던 한국남자들은 그러한 목표가 사라지자 방황한다. 비싼 비용 때문에 골프는 예전처럼 자주 칠 수 없다. 돈 적게 드는 등산도 60중반 내지 후반이 되니 기력도 딸리고 귀찮아져서 횟수가 줄어든다. 그래, 도대체 뭐하고 지내느냐고 물으면 그냥 웃는다. 손주 봐 주고, 마누라 시장 따라다니고, 일일 연속극, 주간 연속극, 주말 연속극 섭렵하고--- 문화생활? 그게 뭔데? 클래식감상? 명화전시회? 문학행사 참여? 아이구야 골치아프다. 젊어서 안 해본 짓 늙어서 새삼 뭣 하러?
하긴 그렇다. 젊은 시절의 내 문화생활은 직장상사나 동료들로부터 ‘별종’이라는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영업실적이나 열심히 올려 승진할 생각이나 하지.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나 그래, 쯧쯧쯧. 그래서 비 문화적인 사람들로부터 시기와 질시와 박해(?)를 많이 받았다. 예술 한다는 사람 치고 돈 있는 사람 보았느냐? 예금 권유하려면 일자무식에 벼락부자 된 사람들 찾아가 룸살롱 같은데 데려가서 술 사주면서 해야지, 밥 먹으로 가자고 먼저 말해놓고 계산할 때는 화장실 가거나 구두 끈 오래오래 매는 그런 예술인들하고 왜 어울려? 평생에 도움이 안돼요. 도움이----
그런 사람들 틈에서 먹고 살았지만 솔직히 말해 내 반평생의 직장생활은 숨이 막혔다. 그러다 밴쿠버에서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한다. 어차피 환갑 넘은 여분의 인생. 돈을 벌지 못해도 누가 뭐라지 않는 나이가 되니 내 삶은 이제 본격적으로 문화생활로 채워져 나간다. 미술전시회는 물론이고 음악, 무용, 연극, 문학행사 등 공짜가 교민사회에 넘친다. 이는 한국에서 예술 하던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못다 이룬 자신들의 꿈을 계속 펼쳐가려고 자기 돈을 들여가며 무료 공연을 하기 때문이다. 영어가 잘 안되니 자연히 교민대상으로 행사를 하는 데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이 돈 내고는 예술행사 잘 가지 않는다. 그래서 공짜가 많다. 한국에서 유명 예술인이 와서 공연한다면 모를까? 한인 사회뿐 아니라 타민족들도 마찬가지다. 신문잡지들을 잘 뒤져보면 의외로 수준 높은 각종 공연들을 적은 금액이나 또는 무료로 즐길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주류사회 예술인들이라 하더라도 이름 얻기 까지는 매 한가지 형편이다.
이런 예술인들을 많이 배출하는 곳 중의 하나가 그랜빌 섬 랜드마크(대표건물) 중 하나인 에밀리 카 대학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밀리 카 예술 디자인 대학(Emily Carr University for Art + Design)이다. 2008년 5월 종합대학(University)로 승격되기 전에는 단과대학(College)이였고, 1981년 단과대학이라는 이름을 얻기 까지는 그저 1925년에 문을 연 밴쿠버 응용 및 실내장식 미술학교-the Vancouver School of Decorative and Applied Arts였었다.
<옛 공장터(상)와 현 에밀리카 대학(하) 전경, 유원지 방문 차량들로 학교 앞이 항상 복잡하다. >
Emily Carr University of Art + Design | Vancouver, Canada (ecuad.ca)
옛 공장터 두 동을 개조하여 사용하던 동 대학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설도, 규모도 열악해졌고 소위 유원지 안에 위치한 특성상 학교 명성에 걸맞지 않아 발전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2016년 7월에는 현 장소에서 동쪽으로 차로 10여분 거리에 있는 그레이트 노던웨이(Great Northern Way) 지역으로 옮길 예정이다. 총면적 198,692스퀘어피트에서 286,320스퀘어피트의 부지로 옮기니 공간성도 충분한데다 위치도 다운타운이 가까운 밴쿠버 서북쪽이라 근접성도 훨씬 향상되리라 예상된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그랜빌 섬 갈 때마다 대학 전시실에 들려 미술품, 공예품, 조각품 전시회를 즐겼는데 옮겨간다니 서운하기는 하다. 욕심에는 예술가들의 전시공간은 그냥 두었으면 하는데 앞날은 모를 일이다.
<대가(大家)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들인 졸업생들의 작품 전시회>
에밀리 카 대학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캐나다의 종합예술대학이다. 특히 시각디자인 및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독보적인 존재이다. 대학 이름은 1978년 BC 주정부가 종전 ‘밴쿠버 예술학교’에서 캐나다를 대표하는 화가 에밀리 카의 이름을 빌어 개명함으로써 오늘에 이르렀다. 물론 학생들과 교수들의 맹렬한 반대가 있었으나 학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해 온 주정부의 결정을 뒤엎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에밀리 카(1871년 출생, 1945년 사망)는 BC주의 주도인 빅토리아에서 태어났다. 18세때 부모가 사망하면서부터 그림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샌프란시스코, 런던, 파리 등지에서 미술유학을 하다가 1912년에 영구 귀국, 고향에 정착했다. 후기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그림은 주로 원주민문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 캐나다 예술계에는 다소 이질적으로 보였는지 그림은 잘 팔리지 않았고 생활은 궁핍했다. 이름을 얻기 전의 모든 예술가들이 다 그러하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먹고 살기 위해 10년 동안 도공, 개 사육자, 하숙집운영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그림은 거의 포기한 상태였으나 열심히 살다 보면 소리소문 없이 기회가 다가 오는 법. 1920년대 캐나다 국립미술관 관장이었던 에릭 브라운으로부터 전시회를 요청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당시 7인의 캐나다 유명화가 모임인 7인회(Group of Seven)와 교류를 시작하게 되고 공동전시회를 가지게 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그녀의 후반기 그림들은 태평양 서북지방 원주민들의 삶의 토대가 되고 신화적 의식의 대상이 되는 나무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녀는 나무를 생명체로 인식하여 무자비하게 벌목되는 나무들을 애통하게 생각했다. 그녀의 일기에는 나무들과의 소통 및 나무에 대한 찬미가 가득했다. 그녀는“나무는 인간보다 더 이성적이며 꾸준하고 참는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인간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에 집착한다” 라고 까지 이야기 했다. 카는 밴쿠버섬의 누차누트부족이 그녀를 웃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클리윅’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했는데 이후 이 별명은 그녀가 1941년에 펴낸 원주민과의 경험을 담은 책의 제목이 됐다. 이 책은 그 해에 캐나다 총독상을 수상했다. 1937년에는 온타리오 미술관에서 전람회를 갖는 명예를 얻었고 이듬해 밴쿠버 미술관에서도 성공적 전람회를 가졌다.
1937년 여러 번의 심장마비 발작을 일으켜 이후 계속 병상에 있게 됐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되자 저술활동에 힘썼다. 그녀는 ‘작은 책’(The Book of Small-1942), ‘다양한 집’(The House of All Sorts-1944), 그리고 사후에 출판된 ‘성장통’(Growing Pains (1946), ‘공작새의 침묵과 심장’(Pause and The Heart of a Peacock-1953), ‘수백, 수천’(Hundreds and Thousands)등 여러 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대부분 자서전적이지만 그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저술가라는 사실을 증명 해주고 있다. 1945년 사망한 후 빅토리아의 로스베이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그녀의 묘비에는 화가이자‘저술가/자연을 사랑하던 사람’이라고 쓰여있다.
그녀의 동상이 고향인 빅토리아에 있다. 유서 깊은 페어마운트 엠프러스 호텔을 뒤로 하고 앞으로는 여객선 및 유람선이 드나드는 빅토리아 항을 바라보며 그녀가 평소 쓰던 작은 스케치북을 무릎 위에 펼쳐 들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어깨 위에는 늘 함께 하던 일본원숭이 “우”가 올라가 있고 발 밑에는 애완견 “빌리”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2010년 ‘캐나다 여성 사 기념의 달(Canada Women’s History Month)’에 세워졌다는데 다음에 방문하면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 봐야겠다.
<상,빅토리아에 있는 에밀리 카의 동상. 중 1930년 작품-불런던 항구. 하 1936년 작품-기이한 끝>
그랜빌 섬 또 하나의 랜드마크는 어린이 용품 시장(Kids Markets) 이다. 유아용에서부터 초등학생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각종 장난감 등을 파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거인들이 사는 하늘까지 닿는 거대한 콩나무를 잭(동화 ‘잭과 콩나무’의 주인공)이 오르고 있는 조형물이 보인다.
<상 키즈마켓 건물 전경, 하 ‘잭과 콩나무’의 조형물>
키즈마켓은 오래된 공장건물-지은 지 100년이 되는-두 동과 기차의 승무원 실을 개조하여 어린이들뿐 아니라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어린이들이 놀이와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어드밴쳐 존(Adventure zone), 각종 마술용 소품, 자료, 책자, 비디오 등을 통해 스스로 마술을 즐길 수 있는 상품을 구비한 마술광대점(Clownin’ around Magic), 발레, 탶 댄스, 재즈 등 무용을 즐기는 어린이들을 위한 무용복장 및 용구 판매점(Just Imagine---Dance), 민속인형, 동물인형, 손가락 인형, 연(kites), 인형극 간이무대 등을 판매하는 가게(Kites and Puppets) 등을 포함 29개의 상점, 놀이공간, 서비스공간 등이 있다. 즉 어린이들을 위한 모든 옷 가게, 선물가게, 책가게, 장난감가게, 먹거리가게, 놀이동산 등이 한 곳에 모여있어, 가족단위로 그랜빌 섬을 찾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에드벤쳐 존에 있는 아이플로어(i-Floor)는 스크린장치가 되어 있는 바닥으로 15명의 어린이들이 그 위에서 축구경기나 하키경기를 즐길 수 있게 해 두었다. 가상의 경기장에서 팔다리를 이용하여 가상의 축구공이나 하키용 퍼그(puck)를 상대방의 골 문에 넣는 경기를 제공하는데 골을 넣으면 축하의 문구나 음악 등이 나오고 이기는 팀에게는 팡파레와 함께 트로피도 화면에서 표현하는 영상게임이다. 손가락으로 하는 스마트폰이나 아이폰과 달리 직접 아이들이 영상경기장에서 손발을 움직일 수 있으니 은근히 운동을 부추기는 효과도 가져 온다.
<바닥 스크린 경기장에서 축구경기를 즐기는 아이들>
<홍보물 영상-키즈마켓 제공>
키즈마켓 안이 답답하다면 건물 뒷 편의 물 공원(Water Park)에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다. 바닥분수가 있어서 장난치듯 시도 때도 없이 물이 솟아 오르면 아이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까르르 깔깔거리며 물을 맞는다. 그런 아이들이 너무 귀엽다. 하얀 피부, 노란 피부, 검정피부---각색의 아이들이 함께 놀면서 천진난만한 소중한 시절을 즐긴다. 어린이들이 있어 늙은이는 웃을 수 있고, 세상은 희망으로 가득 찬다. 허나 안타깝게도 9월이면 문을 닫아 이듬해 5월 까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여기서 들을 수 없다.
<상 성수기의 인파로 붐비는 물 공원, 하 비수기의 텅 빈 물 공원>
세상 어떤 꽃이/이보다 예쁘랴//밤하늘 어느 별이/이보다 밝으랴//“참새 짹짹, 바둑이 멍멍 ---”/단풍잎처럼 고운 손바닥 흔들며/유치원 앞 길/천사들이 지나 간다.//아. 그렇구나.//세상에서 천사들이/매일매일 태어나는 동안은//하나님도 이 지구를/어쩌시지 못 하시겠구나. (‘유치원 앞에서’, 필자의 시 중에서)
인간은 항상 지구멸망에 대한 두려움을 은연중에 가지고 있다. 내가 살아가면서도 항상 옛 예언자들의 뜻도 모를 소리를 ‘지구멸망의 예언’으로 해석하여 난리법석을 떨던 일부 공상가들을 본 적이 있다. 나는 생각한다. 두렵다. 지구 멸망이. 그러나 늙어 죽고 나면 나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 된다. 지구별도 다른 별처럼 생성과 소멸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허황된 예언에 유혹되어 걱정하지 말자. 그러나 천둥번개가 몰아치거나 어느 먼 곳에서 홍수가 나고 화산이 폭발했다는 재앙의 소리를 들으면 긴장한다. 이게 혹시 지구멸망의 징조가 아닌가? 그래서 급하다. 할 수 있는 한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더 많은 문학작품을 읽고 쓰고, 더 많이 사람에 대한 미움에서 벗어나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베풀 수 있기를. 인간의 오만 방자함을 경계하기 위해 옛 선각자들은 각자가 믿는 신의 이름을 빌어, 혹은 예언의 힘을 빌어 지구멸망을 경고해 왔는지 모른다. 그전에 인간의 악행을 회개하라고. 그러나 나는 새로운 생명들이 이 지구상에 계속 태어나는 동안에는 신들이 지구를 가만 두었으면 한다. 적어도 우리 손자들이 태어나 성장하여 생을 훌륭하게 살고 마감할 때 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