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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Nov 01. 2024

스탠리 공원, 첫 발자국의 의미

주마간산 여행기 (11)

스탠리 공원, 첫 발자국의 의미


  한국에서 발간되는 문학잡지 수필시대에 ‘문학이 살아 숨쉬는 현장’을 1여 년 이상 연재하고 있다. 처음에는 신바람이 났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서 내 문학은 어떻게 뿌리내리고 열매 맺었는가를 한국의 문우들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타향에서의 외로움이 덜어지는 듯 했다.


  그런데 호를 거듭할수록 딜레마에 빠졌다. 내가 지금 수필을 쓰는가, 관광안내서를 쓰는가? 여기저기 명소를 다니면서 느꼈던 소감, 비롯된 문학의 소재(素材),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이야기, 이런 것들을 재미있게 풀어나가 보자고 시작했었는데 서서히 밑천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내 문학적 재능에 대한 의구심마저 들었다. 


  이는 수필시대 책이 발간되고 난 후 인터넷 등에 올리는 내 글에 대한 조회수가 그를 증명하였다. 나의 기쁨, 나의 슬픔, 나의 노여움, 나의 즐거움이 적절하게 표현되면서 일반인들이 잘 알지 못하는 흥미로운 숨은 이야기들을 발굴해 적은 내용은 조회수가 많은데 비해 내 이야기는 별반 없고 제재(題材)가 되는 장소에 대한 피상적인 이야기만 늘어 놓으면 독자들이 외면한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다. 아내마저 ‘이번 작품은 좀---‘하면 가슴이 덜컹해 지는 것이 아닌가.


  또한 연재를 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숙제를 계속해야 되는 것 같아 중압감도 느끼고 읽는 독자들에게 책임감도 느껴져서 이제 그만 쓸까 생각도 해 봤다. 그러다가도 ‘수필시대’같은 소중한 지면도 흔치 않은데다(지금은 밴쿠버에서 U&레이디경향에 동시 연재함) 이마저 중단하면 고국과의 문학적 연결고리가 끊어질 것 같아 그냥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것이 요즈음의 내 ‘문학이 간신히 살아 숨 쉬는 현장’이다.


 내 글이 왜 점점 관광안내서처럼 변하는 듯한 자괴감이 드는가 곰곰 생각해 보았다.  

  첫사랑에 대한 두터운 환희가 시간이 지날수록 얇아지듯이 한 10여년 밴쿠버에 살다 보니 처음에는 신기하게 보이는 것들도 차츰 시들해 지고, 이색적인 풍경들도 일상 속의 장면들이 되어 버렸다. 더 이상 특별한 느낌을 표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해서 나름대로 특정지역에 대한 자료를 조사해서 소재로 삼아 객관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다 보니 자연히 관광안내서처럼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그래서 나는 초심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캐나다 땅에 첫 발을 딛던 그 시절로. 맑고 푸른 7월 하늘 피어나던 뭉게구름처럼 꿈과 희망이 부풀어 오르던 내 새로운 삶의 터전에 대한 첫사랑의 시절로. 


  우선 인천공항을 떠나 밴쿠버에 도착하던 날들의 사진을 보니 스탠리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미리 와 있던 전 직장동료 J사장이 밴쿠버와 첫 만남이니 여기저기 드라이브나 하자고 우리 가족을 데려 간 곳이 스탠리 공원이었다. 


  태평양으로 가는 해협에 인접한 스탠리는 눈부셨다. 7월에 밴쿠버에 오게 된 것은 축복이었다. 살면서 느낀 것이지만 좋은 계절에 온 것은 첫눈에 남녀가 반해버린 것과 진배없었다. 미래에 대한 꿈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공원 삼나무였고, 내일에 대한 기대는 버라드 해협을 지나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물결처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 


  비 오시는 계절이 시작되는 10월에 밴쿠버에 온 사람이라면, 그래서 잠시 머물다 미처 봄맞이를 해보지도 못하고 떠난 사람이라면, 우울하고 눅눅한 추억만 가졌을 것이다. 한국의 유월 장마처럼 내리려면 화끈하게 내리던가 하지도 못하고 비실비실 옷만 젖게 하는 가랑비면서도 찌푸린 하늘은 햇빛 한 줌 보여주기 인색해 하는 우기(雨期)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삶이란 이렇게 암울할 때도 있다는 것을 열심히 깨달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날, 다운타운에서 스탠리공원 입구로 들어서면서 눈에 들어온 요트 정박장, 토템 폴, 프로스펙트 포인트 전망대는 이곳에서 일하고 생활하기 위해 왔다는 느낌을 잠시 접어두게 했다. 다니던 직장에서 큰 공을 세워 그 포상으로 해외여행을 보내준 것처럼 나를 들뜨게 했다. 우선 콜하버에 정박한 요트 군을 보니 내가 무슨 영화 속의 한 장면에 있는 것 같아 흥분되었다. 


  콜하버는 다운타운과 스탠리 공원 사이의 작은 항만이지만 지금은 고층 주거빌딩과 요트 정박장이 어우러져 있다. 1862년 죠지 밴쿠버 선장이 이곳을 탐사할 때 지금의 웨스트헤이스팅즈 거리의 경사진 언덕에 언뜻 석탄층으로 보이는 지역을 볼 수 있어서 콜하버(Coal Harbour)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석탄은 연소 시 화력이 낮아 경제성이 없어서 채굴하지 못하고 그 이름만 이 항구에 남게 되었다. ‘석탄항구’라는 촌스러운 이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고급 주거지가 많아 누가 이곳에 산다고 하면 한번쯤 그를 다시 보게 하는 곳으로 변신하였다.


               밴쿠버 조정클럽 전경, 


1900년대 초에 촬영된 죽은 자의 섬(Deadman Island) 전경 


  콜하버를 끼고 고풍스럽게 보이는 멋진 건물이 있다. 요트 정박장 건물로서 밴쿠버 조정클럽(Vancouver Rowing Club)의 본부이자 클럽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밴쿠버 조정클럽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1886년 밴쿠버 보트클럽이 형성된 것이 그 시초이다. 1890년에는 클럽하우스 서쪽에 버라드 인렛 조정클럽이 새로 생기면서 두 단체간에 경쟁의식이 생겨났다. 콜하버는 형형색색의 조정보트의 경연장이 되었다. 1899년 1월 두 경쟁단체는 통합되어 밴쿠버 조정클럽으로 탄생하였다. 

 스탠리파크 안의 현재의 역사적 건물은 공식적으로 1911년 9월 9일 문을 열었다. 


  밴쿠버 조정클럽 회원은 정회원(Active members)과 준회원(Social members)으로 나눠진다. 정회원은 동 단체의 스포츠 활동분야인 조정, 럭비, 요트, 필드하키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 활동하는 사람들이고, 준회원은 회의참석은 물론 임원투표권도 없지만 클럽행사관람이나 건물 내 식당이용, 장소 임대 시 약간의 혜택이 주어진다. 


  서양영화를 보면 화려하고 근사한 클럽하우스에 회원만 출입시키는 소위 특권의식의 편재가 눈에 띄는데 이와 별반 다름 없을 것이다. 회원 중에는 백인들이 많고, 겉으로는 차별을 하지 않는 듯 하면서도 은근히 끼리끼리 모이는 습성이 있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스포츠로써 조정, 럭비, 요트, 필드하키 등을 좋아하는 사람은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클럽하우스 주변의 요트들이 모두 조정클럽 회원들의 배는 아니다. 버라드 해협 쪽으로 좀 더 나가있는 정박장은 로얄밴쿠버 요트클럽이 사용하고 있다. 이 클럽은 밴쿠버에 있는 여러 요트클럽중의 하나이다. 현재 두 곳의 요트 정박 장을 가지고 있는 데 하나는 잉글리쉬 베이의 제리코 해변, 또하나는 스탠리공원과 인접한 콜하버의 선착장이다. 350척의 배가 정박할 수 있는 선석을 가지고 있다. 


  요트 하나에 구입가가 적게는 3만 불에서 많게는 10만불 이상 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바다에 나가면 멀미가 생기는 나로서는 돈이 있어도 별로 사고 싶지 않지만 밴쿠버 중산층들 중의 애호가는 집은 못 사도 요트는 기어이 사고 보는 경우가 많다. 물에서는 맥주병인 나로서는 바다에 나갔다 배가 뒤집히면 그대로 세상 하직하지 않을 까 걱정되니 그냥 형형색색의 모습을 눈으로 즐기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수밖에 없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의 거의 대부분은 스탠리공원을 찾는데 그 중의 대부분은 토템 폴 앞에서 기념촬영을 한다. 1980년대 인기 신혼여행지는 제주도였는데 신부와 온갖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지만 친구 집에서 그들의 신혼여행사진을 보면 똑 같은 배경에 똑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경우를 보고 머쓱해 하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밴쿠버 여행했다는 사람들의 사진 중에 거의 일치하는 배경 중에 하나가 스탠리공원 토템폴 주변이지 싶다.

 

  토템폴이 군집해 있는 지역은 브록톤 포인트(Brockton Point)이다. 영국 왕립해군의 탐사선 HMS Plumper호의 탐사기술자 프렌시스 브록톤이 1859년 이 지점에서 멀리 헤이스팅스 언덕의 석탄광맥을 발견, 헨리 리차드 선장에게 보고하자 선장이 프렌시스의 성을 따서 브록톤 포인트라고 명명한 것이다. 앞으로 많은 석탄을 실어 나를 것으로 기대하여 배가 정박한 항구를 석탄항(Coal Harbour)이라 불렀다는 것은 이미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지역은 1865년까지 밴쿠버 초기 정착민들의 무덤 터로 사용되었다. 1860년대부터 1880년대까지 버라드 만의 정착민들은 지금의 공원 내에 있는 브록톤 포인트, 앤더슨 포인트, 그리고 죽은 자의 섬(Deadman Island) 주변을 망자(亡子)의 매장지로 사용했다. 1887년 밴쿠버 시 프레이저 거리 주변에 마운틴뷰 묘지(Mountain View Cemetery)가 문을 열고부터는 더 이상 묘지로 사용되지 않았다. 


  죽은 자의 섬은 매장지로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다. 1865년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온 존 모톤이 나무 위에서 오랜 삼나무상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관이었다. 신분이 높은 원주민들의 수목장(樹木葬)에 사용된 것이다. 화장한 사체의 뼛가루를 나무 밑에 뿌리는 요즘의 수목장과 달리 원주민들은 시체와 유품이 동물들로부터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나무 위에 관을 매단 것이다.


  처음에 죽은 자의 섬이라는 이름을 듣고 손바닥만한 저곳에 발을 들이면 모두 죽어나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나름대로의 괴기담 추리를 했었다. 더구나 접근금지 구역으로 되어 있으니. 섬이 아름답게 보여 존 모톤이 원주민들에게서 구입하려고 했더니 카필라노 추장 왈. 옛날 경쟁 부족들이 그곳에서 피 터지게 싸웠는데 200여명의 용맹한 전사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라나. 3.8헥타르(11,495평)의 작은 섬에서 밤이면 밤마다 파란 불꽃-아마 시체의 뼈에서 나오는 인광(燐光)인듯-이 천지사방으로 흩어진다고 해서 구입을 포기했다. 무덤의 용도는 초기 정착민들에게도 사용되다가 1944년부터 왕립해군 예비군 훈련소로 전환되어 예비 해군병사들의 훈련장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니 누구나 나름대로의 으스스한 공상을 할 만 하다.

좌측은 8개의 토템폴, 우측은 원주민들의 전통적 마을 출입문(gateway)


 다시 토템폴로 돌아가자. 브록톤 포인트에는 현재 9개의 토템폴이 있다. 하이다 원주민의 스케단스 모유어리 폴(the Skedans Mortuary Pole), 부르다 숨 넘어갈 듯한 이름을 가진 크와크와카와크(Kwakwaka’wakw) 원주민의 해변의 아침식사 폴(Breakfast on the Beach Pole), 천둥새의 집 폴(Thunderbird House Pole), 만든 이의 이름을 붙인 엘렌 닐 폴(Ellen Neel Pole)과 오스카 마틸피 폴(Oscar Matilpi Pole), 부족장의 이름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와키우스 폴(Wakius pole), 그리고 누찬누트 원주민의 하늘의 추장 폴(Sky Chief Pole), 니스가아 (Nisga’a)원주민의 비버 문장(紋章) 폴(Beaver Crest Pole)이 있다.  원주민들의 전통적인 마을 출입문(gateway portal)은 2개의 직립 폴과 그 위에 가로 누운 1개의 폴로 구성되어 기존의 8개 토템폴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토템들은 공원의 오랜 역사와 함께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 관광산업을 발전시키는 심벌로 사용되어 왔지만 사실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져 스탠리공원에 설치된 것이 아니다. 
 

  원주민들의 주거지를 백인들의 공원으로 만들었으나 내세울만한 역사적, 문화적 관광상품이 없었던 그들은 대신 원주민 문화를 이 땅의 문화유산으로 내세우기로 하였던 모양이다. 1922년 공원관리위원회가 밴쿠버 섬 얼러트 베이(Alert Bay) 원주민 크와크와카와크 족으로부터 와키우스 폴을 포함한 4개의 토템폴을 구입했다. 원주민 출신이 아닌 백인 관리들은 밴쿠버시의 관광산업을 진흥시키고 동시에 사라져가는 전통의 원주민 문화를 재창조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소위 박힌 돌을 빼낸 굴러온 돌들이 그들의 행위가 조금은 미안했던지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양수겹장의 문화정책을 편 것이다.

 

  그러나 밴쿠버 북서부 해안 원주민인 스쿼미시 인디안 위원회는 토템폴이 로워메인랜드, 즉 현재의 밴쿠버 지역 거주자가 아닌 밴쿠버 섬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 토템폴 설치에 반대했다. 원래 공원관리위원회는 공원 안에 북서해안 원주민마을을 만들 계획이었지만 그 계획은 원조 터줏대감이던 스쿼미시 원주민들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토템폴만 벌목 꾼들의 기념문(Lumbermen’s Arch;공원 북동쪽 어린이 놀이터 부근에 세워진 기념문)구역 가까이에 세워졌다. 


  1962년, 주변에 공원일주도로가 생기면서 현재의 브록톤 포인트로 옮겨졌다. 1930년대까지 더 많은 토템폴이 설치되었으나 여전히 스쿼미시가 아닌 역외 원주민들이 제작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지역원주민들이 만들어 2008년 세운 것이 세 개의 토템폴로 이루어진 게이트웨이이다.


   토템폴을 보면 한국의 장승이 생각난다. 장승은 경계표시나 이정표 또는 수호신으로서 우리 민족의 생활 속에 뿌리 깊게 자리해 온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니며 변화하고 전승되어 온 민속신앙의 조형물이다. 토템폴은 북미의 원주민들이 주로 거대한 삼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기념 조형물이다. 


  토템이라는 말은 인디언 오지붸(Ojibwe) 부족의 '친척'이라는 의미의 '오두뎀'이라는 단어에서 유래 하였다고 한다. 토템 폴 만들기는 북미에서 시작하였고 1800년대 이전에 만들어진 토템폴들은 썩어 버려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고 한다. 북미 원주민 토템 폴 연구로 유명한 문화 인류학자 에드워드 말린(Edward Malin)은 1986년에 토템폴이 집의 기둥, 장례용 관, 또는 기념물에서 부족이나 가족의 부와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점차 발전 해왔다는 이론을 제시했다. 

 

  토템폴과 장승이 다른 점은 장승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 훼손하면 천벌을 받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토템폴은 단순한 기념물 정도로 여겨져 오래되어 썩거나 훼손되어도 자연의 섭리로 생각할 뿐 복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은 원주민문화의 산물로 그 예술적 가치가 평가 받고 있는 조형물로 여겨지고 있다.

 

  스탠리 공원을 자동차로 한 바퀴 순회할 양이면 토템폴을 거쳐 어김없이 들리는 곳이 프로스펙트 포인트(prospect)다. ‘전망대’라는 뜻의 보통명사가 이제는 누구나 한번쯤 들리는 장소로 유명해져 고유명사가 되었다. 공원에서 제일 높은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 봄, 여름, 가을, 겨울마다 색다른 전경을 연출하는 스탠리를 굽어볼 수 있다. 또한 버라드 해협 건너 북, 서 밴쿠버와 연결된 라이언스 브릿지와 그 아래를 오가는 크루즈, 화물선, 유람선 등을 볼 수 있다. 


  주변에 카페, 식당 등이 운집해 있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 잠깐 공원을 찾은 관광객이라면 기념품가게에서 선물 등을 살 수 있다. 신라의 고도 경주에서 유 소년기를 보낸 나는 관광지 기념품가격은 ‘바가지’가격이라는 개념이 남아 있고, 나이 들어가면서 모은 관광기념품은 종래는 치우기 힘든 쓰레기로 변한다는 사실 때문에 구입을 꺼린다. 관광기념품이란 방문 지의 추억을 기념하기 위함인데 삶의 터전이 될 곳에서는 필요 없을 듯 했다. 


  아니나 다를까 살아가면서 서울사람 남산공원 가듯이 자주 스탠리를 드나드니 이제는 기념품 가게가 안중에 없다. 단지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본 밴쿠버의 첫 발자국은 스탠리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가볍고 경쾌했다. 타국에 ‘소프트랜딩(무사안착)’한 것을 먼저 와서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은 부럽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이곳에서 겪은 세월의 무게와 내가 한국에서 겪은 무게는 경중을 가릴 수 없다. 산전수전, 나도 겪을 만큼 한국에서 겪었다. 다만 조선시대에 낙향한 선비가 자연과 벗하여 여생을 보내듯 내 낙향 지를 밴쿠버로 정했을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색다른 곳에서 색다른 삶을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프로스펙트 표지판 앞,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라이언스 브릿지
 
 

 오십셋. 밴쿠버에 첫 발을 디뎠을 때 나이다. 그 나이에 고향에서 편하게 지내지 뭐 하려고 낯설고 물 설은 곳으로 가느냐고 모두들 말렸지만 지금은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스탠리를 자동차로 한 바퀴 돌 때처럼 인생여정도 편했으면 하는 것이 보편적인 바램이겠으나 나는 일부러 한걸음 두 걸음 도보로 여생을 걸었다. 한국에서 얻었던 것을 모두 내려놓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였다. 영어초급과정부터 충실히 시작, 12학년(한국의 고등학교 3학년) 과정까지 공부했다. 덕택에 지금은 밴쿠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자원봉사 활동도 기꺼이 하고 있다. 


  먹고 살만한데도 공부보다 돈벌이에 신경 쓰는 일부 교민들은 몇 십 년을 살았어도 여전히 타민족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끼리끼리만 모여 지내고 있다. 해서 나는 권한다. 스탠리 공원을 편안하게 차로 돌면 볼 수 있는 곳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힘이 들더라도 도보로 한 바퀴 돌아 보세요. 나는 올 때 마다 8.8km의 해변산책길(seawall)에 도전합니다. 그러면 차로 움직일 때 볼 수 없었던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발바닥에 물집도 생기고 다리도 아프지만 서두를 것 없이 천천히 걷다 보면 숨겨진 스탠리의 속살을 훔쳐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이 모두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그런 자세로 살아가세요. 타향도 어느덧 고향 못지 않게 될 것입니다.

 

  다음부터 걸으면서 본 스탠리의 요모조모를 소개하려고 한다. 내 교민문학에 영향을 준 삶을 보여드리려 한다. 어쩔 수 없이 약간의 ‘관광안내서’를 곁들임을 양해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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