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타운 쇼핑센타의 12월 초는 완전히 크리스마스 분위기였다. 아내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미리 사두기 위해 어느 액세서리 전문점에 들렀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듯한 금발의 백인처녀가 상냥하게 나를 맞이하였다. 여자 액세서리를 고르는 것이 좀 쑥스러운 일이 아님을 아는 듯 자연스럽고 친절하게 이것저것 설명을 해 주었다. 나는 불현듯 그 여종업원을 어디서 본 듯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10여 년 전 일이 생각났다.
2003년 7월 말의 밴쿠버는 무더웠다. 막 캐나다에 도착했던 터인지라 이국에서의 생활에 대한 기대와 염려로 인해 체감온도는 더 오르는 듯 했다. 밴쿠버 시에 소재한 챔플레인 가에서 여장을 풀고 홈스테이를 며칠 하면서 렌트할 집을 구하려 다녔다. ‘Burnaby Now’라는 지역신문을 보고 찾아간 곳이 에셀에비뉴.
통통하게 생긴 금발의 여자아이가 아메리칸 인디언처럼 뺨에 붉고 노란 물감을 칠하고 사내아이 두서넛을 거느리고 걸어가다가 내 눈에 뜨였다. 우리가 찾는 주소의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바로 자기 집 옆이라고 했다. 그 집은 한 지붕 두 세대의 듀플렉스 이었다.
아이 이름은 제시카. 한 눈에도 영락없는 말괄량이로 보이는 그 아이는 우리 가족의 첫 이웃이 되었다. 주변의 스트라이트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데 공부하는 꼴을 본 적이 없고 하루 종일 근처 공원에서 놀기만 했다. 한번은 공원에서 그네를 타고 있기에 잘 탄다고 부추겨 주었더니 자기 재주를 보라고 하며 그네 줄을 잡고 뒤틀었다 돌렸다 거꾸로 했다 온갖 묘기를 다 부렸다. 그만 보고 가려고 하니 다른 재주도 더 부릴 수 있다고 더 보고 가라고 때를 썼다.
이사 오던 날, 제시카는 우리 집 바깥 창고에서 밤마다 여자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처음에는 어린아이의 장난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오랫동안 비워두었던 터라 집안에 전깃불도 아직 연결되지 않고 짐도 한국에서 도착하지 않아 텅 빈 방에서 첫날밤을 보내려니 그러지 않아도 서울 생각에 마음이 서글픈데 아이 이야기가 생각나서 기분이 이상했다. 잠은 오지 않고 자꾸 창고 쪽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해 긴장하면서 며칠 밤을 보냈다.
아이 아버지에게 밤중에 창고 쪽에서 무슨 소리 못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제시카가 장난으로 말한 것 같다고 웃었다. 금발의 백인 여자아이가 이웃이 될 동양 어른에게 장난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어른들에게 장난쳐서는 안 된다는 동양적 사고를 이해하지 못했을는지 모른다. 그저 제 또래에게 하듯 낯선 이들에게 겁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드웨인이라고 했다. 저녁식사시간이면 공원에서 노는 제시카를 목청껏 불렀다. 제시카는 제 기분이 좋으면 ‘father’ 인데 기분이 나쁘면 ‘Mr. 드웨인’ 하고 불렀다. 아니 저런 발칙하게 서양아이들이 이래서 예의가 없다고 하는 구나 생각했더니 드웨인은 양부였다. 어머니 안드레아가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 제시카를 가졌고 영국에 살다가 이혼해서 드웨인을 만났다고 한다. 만난 경위가 궁금했지만 사적인 일이라 물어 볼 수 없었다.
제시카는 동네 골목대장이었다. 걸핏하면 같이 놀던 사내아이들을 때려주는 통에 그것이 어른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럴 때는 드웨인은 항상 제시카 편이었다. 사내아이가 먼저 맞을 짓을 했다는 것이 드웨인의 일관된 주장이었다. 맞은 아이의 부모와 서로 맞고함 지르며 싸우는 통에 동네는 소란했지만 결코 그들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무슨 싸움이 저래. 서로 한바탕 치고 박고 할 분위기까지 가는 것 같아 긴장하고 지켜보았지만 그러다가 끝나는 것을 보고는 참 싱거운 인종이 백인이라고 생각했다. 자기의 주장을 실컷 다 이야기 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사 온 지 넉 달 후 처음 할로윈 명절을 맞았다. 그 날에는 아이들에게 사탕선물을 주어야 했다고 누가 그랬었다. 그래서 제시카에게 주려고 코스코에 가서 사탕을 잔뜩 사서 기다렸는데 오지 않았다. 이튿날 다른 집에는 가면서 우리 집에는 바로 옆집인데 왜 안 왔느냐고 했더니 아무데나 가는 것이 아니고 문 앞에 호박등불을 밝힌 집만 간다는 것이다. 관습에 대한 무지로 인해 우리 가족은 그 해 할로윈의 “trick or treat(‘사탕 안주면 골탕 먹일 거야’라는 뜻)”를 실감할 수 없었다.
한번은 제시카네 학교에서 불우이웃돕기 모금행사가 있다고 하면서 팝콘 한 봉지를 사달라고 했다. 나중에 팝콘을 줄 테니 팝콘 값을 미리 달라고 해서 $20불을 주었지만 두어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기에 돈이 없어서 일부러 모금행사 핑계대고 돈을 얻어간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드웨인 내외는 돈 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사는 동안 옹색하고 가난한 형편이 눈에 자주 뜨였다. 더구나 돈을 가지고 간 이후에는 그들이 뻔뻔해 보이고 나는 그들을 못 본 채 해버려 종래는 서로 서먹서먹해졌다. 그래서 한동안 그들을 경계하고 마음을 주지 않았다. 밴쿠버에 거지가 많다더니 이들도 거의 거지 수준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달 후에 팝콘이 늦게 나왔다고 가져다 주며 미안하다고 하는데 한동안 오해에 젖어 있던 나는 도둑질하다 들킨 사람처럼 당황했다. 잠시라도 그들을 의심한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제시카 가족이 이삿짐을 싸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더니 간호사였던 어머니 안드레아가 캐나다 동쪽 끝 뉴펀들랜드 작은 병원에 직장을 구해서 며칠 내에 그리로 가야 한다고 했다. 제시카는 친구들과 영영 못 만날 거라는 생각에 하루 종일 울었다. 내가 초콜릿이라도 주며 달래려 했더니 퉁퉁 부은 눈으로 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냥 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마냥 씩씩하던 예전의 말괄량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들은 새벽 비행기를 탄다며 한밤중에 떠났다. 제대로 인사도 못했다. 왜 그리 서둘러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1년여를 이웃으로 함께 살았는데, 출발하기 전날이라도 ‘그 동안 이웃으로서 잘 지내게 되어서 좋았다.’라든지 ‘밴쿠버에서 성공하시기를 바란다’라든지 의례적인 인사 한마디 없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참 인정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의 형편에 따라 아이들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생각하면 제시카가 참 안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동네에서 몇 년을 살면서 친구들도 많았기에 네 활개 펴면서 동네 골목을 누비고 다녔는데 제시카는 그 춥고 낯 설은 시골 마을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지낼까. 성장해서 우리를 만나볼 기약도 없을 것이고 만나본들 알아볼 수 있을 것인가.
제시카가 가고 난 후 나는 한 동안 그 집을 기웃거렸다. 금방이라도 “하이 데이빗(필자의 영어이름)” 하면서 제시카가 방글거리며 뛰어 나올 것 같았다. 항상 뒷마당에서 놀던 제시카는 흰 분필로 'Bye Bye'를 바닥에 쓰고 뒷마당 주차장 기둥에다 자기 손자국을 찍어 놓았다. 제시카는 그렇게라도 우리 식구에게 인사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아내와 나는 좀 더 제시카에게 잘 해 줄 것을 하고 후회했다. 숨어있던 정이 한참 동안 제시카네 집을 어른거렸다. 왜 정이란 항상 줄 수 있는 상대방이 곁을 떠나고 나서야 살갑게 느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밴쿠버에서의 첫 이웃인 제시카 가족은 이렇게 우리를 떠나갔다. 지금 제시카 나이가 액세서리 점의 여종업원또래는 되었을 터인데. 그러나 여종업원의 명찰에 새겨진 이름은 레베카였다. 얼굴이 비슷하긴 하지만 제시카는 아니었다. 그녀는 그 춥고 낯선 곳에서 어떻게 자랐을까? 10여 년 전 이웃이었던 한국인가족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 까?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제시카에 대한 추억이 크리스마스 캐롤의 선율을 타고 가슴에 스며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