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협 캐나다 지부가 발족하면서 서둘러 시작한 것이 ‘한국문학교실’이었다. 이방에서의 삶 이란 그 자체가 시요 수필이요 소설 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을 다발로 싸 들고 오더라도 불편한 것이 외국에서의 생활인데 하물며 거의 무일푼으로 온 원주이민(30~40년 전에 이민 온 세대를 필자 임의로 호칭함) 세대이랴.
젊을 때는 아이들 교육하랴 돈 벌랴 시간가는 줄 몰랐지만 이제는 어느덧 은퇴연령이 되어 자녀부양에서 자유로워지고 오타와 효자아들로부터 매달 꼬박꼬박 받는 용돈(노령연금) 때문에 생활에 여유도 생긴 나이. 그러나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면 옛 추억에 젖어 들며 외로워지는 나이. 그것은 비단 원주이민 세대뿐 아니라 모든 고령층이 가지는 공통된 심사이리라. 그런 분들에게 글 쓰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지나간 여정을 글로 남기고 싶다는 분들이 주로 참석한 것이 2009년 9월에 시작한 제2기 ‘한국문학교실’이었다. 그해 봄, 5월에 시작한 제1기는 젊은 층(젊다고 해야 40대 초반)이 주였는데 2기는 달랐다.
수강생 중 한 분이 Y 여사였다. 그녀 나이 칠순. 지난 일을 반추하며 정리하고 싶은데 타국에 오래 살다 보니 한국말도 많이 잊어버리고, 글을 쓰려 하니 맞춤법, 띄어 쓰기를 모르는 것은 물론이고 어떻게 맥을 잡아야 될지 전혀 몰라 배우러 왔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한국문단에 등단을 추천해 준 조병화 시인의 충고를 빌렸다. 그냥 살아온 이야기를 쓰세요. 숨김없이. 예쁘게 문장을 쓰시려거나 치장하려 마시고 담담하고 솔직하게 자신의 내면의 숨은 활자들을 끄집어 내세요. 그리고는 시 한 편, 수필 한 편을 강의 끝날 때까지 써 오시라고 숙제를 냈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Y여사는 8회의 강의가 끝나도록 숙제를 해오지 못했다.
제가 많이 배우지 못했어요. 시 한두 편 끼적거리기는 했지만 공부 많이 한 분들 보기에는 너무 유치해서 내놓을 수가 없어요. 숙제를 못한 변명이려니 했다. 어느덧 종강 일이 되어 어느 한식당에 소위 쫑파티를 하러 갔다. 우리 문협 회원들도 함께 축하하려고 참석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Y여사가 조심스럽게 레터 지에 쓴 시 한 편을 손가방에서 꺼냈다. “읽어볼 터이니 흉보지 마세요.” 그리고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다.
<친구야> 차 한 잔 하려나
친구야
차 한 잔의 의미
참 정겹네 그려
지금 한 잔 하려나
우리 앞으로 몇 잔이나
함께 할 수 있으랴
석양이 지려 하는데
차 한 잔 들고
창가에 선 나
세월처럼 차를 마시고
텅 빈 찻잔이 되어 가는데
친구야 우리 모두
해 넘어 가는 고갯마루
차 향 진하게 퍼지는데
친구야 어두워지기 전에
차 한 잔
같이 하고 싶네 그려
순간 나는 감전된 듯 가슴이 저렸다. 숱한 고생하면서 한국에 있는 동생들 뒷바라지 하고 밴쿠버에서 두 남매를 훌륭히 키우고 나니 어느새 청춘은 가버린 것이다. 이제 석양이 지려 하는데 그녀는 세월을 거의 마시고 텅 빈 찻잔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남은 날들을 위해 새로이 찻잔을 채우고 싶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나누고 싶다. 진한 외로움을 나누고 싶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그런 그녀의 마음이 오롯이 시에 담겨 있었다.
그래서인가? Y여사는 8회 강의시간 동안 항상 10분 일찍 와서 수강 준비를 하는 열의를 보였다. 자신은 운전을 잘 못해서 남편 분을 항상 대동했다. 남편 분은 과묵했지만 싫은 기색 없이 아내를 에스코트했다. 시 낭송을 부탁하면 아주 감정을 넣어 잘 하므로 칭찬을 했더니 소녀처럼 해맑게 웃었다. 그녀는 바로 그 순간만큼은 문학소녀였다.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 열심히 듣고 필기를 했다. 좋은 글을 많이 쓰겠다는 꿈이 무지개처럼 피어 올랐다.
이름 끝 자가 ‘환’인데 시인의 이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향’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향기 나는 ‘향’자예요. 그게 좋지요. ‘환’은 병든 것을 생각나게 해서 안 좋아요.
사람들을 초대해서 집 안에 설치되어 있는 제법 성능이 좋은 노래방 마이크로 흘러간 옛 노래를 부르며 즐기고, 춤도 추며, 그리고 국수를 맛있게 말아 대접하기를 좋아하던 그녀였다. 문학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가끔 전화하면 열 살이나 적은 내게 ‘우리 선생님’ 하면서 깍듯했다.
그러던 Y여사가 지난해 여름 제2회 한마음문학제에 참석한 이후로 문협 행사에 발길이 뜸해졌다. 감기에 걸려서 몸이 불편하다고 했지만 어쩐지 음성이 전 같지 않았다. 서먹서먹했다. 우리가 무얼 잘못했나? 자주 전화하던 아내와 나는 아마도 그녀가 이젠 문학에 흥미를 잃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더 이상 전화하는 것이 부담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해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금년 봄 남편 분이 세무관계를 묻는 전화를 했다. “Y님께서는 잘 계시지요?” “---(한숨, 그리고 침묵)---“ “요즈음 시 공부하세요?” “이 세상에 없어요.” “네?” “폐암 앓다가 2월에---“
감기인 줄 알았는데 호전되지 않아 병원에서 정밀검사 했더니 폐암이랍디다. 그것도 말기. 전혀 아무런 증세가 없다가 갑자기 악화되어버렸어요.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가망이 보이지 않자 집에 가겠다고 해서 퇴원했지요. 움직이지도 못하고 침대에 누워서 지냈는데 하루하루 죽어가는 모습, 차마 보지 못 하겠더라고요. 그런데도 문협 행사 때마다 가야 된다고 억지로 일어나려다 주저앉고 일어나려다 주저앉고…… 그러면서도 열심히 무언가 끼적거렸는데 그게 시 래요. 나중에는 손에 힘이 없어 무어라고 썼는지도 모르겠는데 그걸 그리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어요. 회장님께 보여드려야 된다고요. 그러다가 그만 가버렸어요, 혼자.
문학소녀 Y 여사는 그렇게 가버렸다. 문학의 향기를 마음껏 내뿜고 싶었는데 꽃피는 봄을 다시 한 번 맞이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나는 그녀의 여유롭고 넉넉한 마음을 생각하며 한 편의 시를 그녀에게 바치기로 한다. 우리 모두 그녀를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삶의 아름다운 꽃 향기는 그녀의 시를 통해서 오래 우리에게 머무를 것이다. Y 여사님, 들으소서. 그대의 향기를 그리며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