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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처럼 여름처럼 영화처럼 스물다섯 번째!

키리에의 노래

by 달빛바람

개요 일본 드라마 119분

개봉 2023년 11월 01일

감독 이와이 슌지 岩井俊二


1. Opening 오프닝

멀리 두 소녀가 눈밭을 걸어온다. 화면 앞, 철창처럼 보이는 구조물은 새장을 닮아 있다. 새장 너머로 흘러나오는 노랫소리가 바람에 섞여와 마치 얼어붙은 공기를 깨뜨리듯 울린다. 소녀들은 이내 눈밭 위에 드러눕는다. 하얀 대지 위, 자신들의 그림자를 지워내듯. 둘의 이름은 키리에와 잇코.


이 영화 속의 눈은 단순한 계절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상처를 감싸 안는 붕대이며 숨조차 막히던 삶 위에 덮여온 고요한 위안이다. 눈은 차갑지만 동시에 포근하니까. 그리고 상처 입은 영혼은 차가움 속에서만 비로소 쉼을 얻기도 한다. 이 흰 설원 위에서 시간은 거꾸로 흘러간다.
태엽이 감기듯 기억은 과거로 밀려간다.

키리에와 잇코. 그들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고 어느 순간 서로의 절친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지금, 그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눈 위에 흔적을 남긴다.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은 그동안의 삶이 얼마나 버거웠는지를 몸으로 증언한다. 결국 그들은 눈 위에 몸을 던져 눕는다. 더는 걸을 힘조차 없는 사람처럼.

이 오프닝은 단순한 ‘시작’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끝에서부터 흘러온 노래의 첫 음이다. 이 두 영혼은 어디서부터 걸어온 것일까? 누구에게서 도망치고, 무엇으로부터 숨으려 했던 것일까?

이와이 슌지의 카메라는 언제나 그렇듯, 설명하지 않고 포착한다. 차갑게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 인물의 숨결, 떨림, 노래를 먼저 기록한다. 키리에의 목소리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다. 그것은 비극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꺼내든 마지막 호흡이며 세상에 자기 자신을 알리는 기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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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바람입니다. 작은 극장을 품은 마음으로 영화와 일상의 자잘한 조각들을 주워 담습니다. 줄거리보다는 스크린 너머에 잠든 숨소리 같은 것들을 조심스레 건져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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