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제목만 알았던 영화 열일곱 번째!

하얀 풍선 -자파르 파나히

by 달빛바람



1. Opening 오프닝

자파르 파나히의 데뷔작 <하얀 풍선(The White Balloon)>은 시간을 다루는 방식부터 남다르다. 영화는 테헤란 시장의 소란스러운 상인들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관객은 이미 그 현장에 놓여 있고, 이어 라지에와 어머니가 장을 보는 장면 속으로 스며든다. 보통 영화들이 사건을 빠른 편집으로 압축해 보여주며 현실의 시간을 단절시키는 데 반해, 이 영화는 물리적 시간과 영화적 시간이 동일하게 흐른다.

이 동일화가 가져오는 효과는 단순하다. 관객은 더 이상 전지적 시선에서 사건을 지켜보지 않는다. 라지에가 하수구에 빠뜨린 돈을 내려다보면, 우리 역시 그녀의 눈으로 똑같이 들여다보게 된다. 그 순간, 우리는 라지에의 초조와 조바심을 같은 호흡으로 공유한다. 이는 단순한 몰입이 아니라 관객의 시선을 주인공의 시선과 나란히 묶어두는 방식이다.
그래서 기존 영화의 빠른 호흡과 ‘시간 압축’에 길들여진 관객에게 <하얀 풍선>은 다소 답답하고 느리게 다가올 수 있다. 그러나 잠시만 여유를 갖고 그 리듬을 타다 보면 관객은 라지에와 함께 길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잃어버린 지폐를 애타게 찾으며, 그 작은 모험의 숨결을 고스란히 나눌 수 있게 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이 창조한 시간은 결국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지워버린다. 그리고 그 지워진 경계선 위에서 우리는 어린 소녀의 눈빛으로 다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2. 라지에와 알리

라지에는 집안의 숨 막히는 공기 속에서 살아간다. 아버지는 목소리로만 존재하지만 그 목소리만으로도 집 안 가득 위압감을 드리운다. 잘못된 심부름을 한 아들에게 물건을 던지며 분노를 쏟아내는 아빠의 폭력은, 라지에가 벗어나고 싶어 하는 현실을 압축해 보여준다. 라지에 곁에는 오빠 알리가 있다. 그는 때로는 다정한 동반자이지만, 동시에 가족의 억압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라지가 시장으로 달려갈 수 있었던 건 알리 덕분이지만, 그 과정에서 오빠는 늘 보호와 통제 사이를 오간다.

이 남매의 관계는 단순한 유년기의 풍경이 아니다. 그 뒤에는 이란 사회 특유의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문화가 겹쳐져 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의 기억은 국가 전체를 두려움과 통제의 언어로 묶어 놓았고, 종교적 전통은 가정의 권위를 ‘부재의 아버지’라는 상징적 형상으로 강화시켰다. 아이들이 성장하는 공간은 단순히 개인적 억압의 장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가 층층이 쌓인 억압의 무대인 것이다.

그렇기에 파나히가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선택은 우연이 아니다. 어른들의 세계는 정치와 종교, 권위와 검열로 가득 차 있다. 그 세계에서는 진실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그러나 아이의 시선, 동심의 눈빛은 여전히 숨 쉴 틈을 남긴다. 라지와 알리가 보여주는 소소한 모험은 단순한 성장담이 아니라, 숨 막히는 사회 속에서 작은 자유를 꿈꾸는 은유적 행위이다.

라지에와 알리는 서로의 그림자처럼 움직인다. 라지에가 내딛는 걸음마다 알리는 곁에서 보조를 맞추거나 늦게 뒤따라온다. 이는 마치 아이가 어른 세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혼자가 아닌 듯 보이지만, 결국은 스스로 부딪히고 감당해야 함을 보여주는 장치다. 알리의 존재는 보호와 통제, 다정함과 위압이 교차하는 ‘형제의 그림자’로 남고, 라지에는 그 안에서 홀로 성장의 시험을 치른다.

결국, 이 남매의 여정은 단순한 일상의 단면을 넘어서, 이란 사회의 보수적 구조 속에서 아이들이 어떻게 세계를 배워 나가고, 어떻게 억압 속에서도 작은 숨구멍을 찾아내는지를 상징한다. 문화적 배경을 몰라도 이 영화는 따뜻하고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알게 된다. 왜 자파르 파나히가 굳이 아이들의 시선을 빌려 세상을 이야기해야 했는지를. 아이들은 아직 검열의 언어로 가려지지 않았고 그들의 눈빛은 전쟁과 억압이 만들어낸 어둠 속에서도 여전히 순수와 자유를 증언하기 때문이다.


3. 영화 속 상징

<하얀 풍선>에서 금붕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이란에서 금붕어는 새해마다 거울 옆에 두는 부활의 상징이다. 거울 속에 비친 ‘나’와 물속을 헤엄치는 금빛 생명은 서로 마주 보며 새로운 시작을 예고한다. 라지에가 집착한 것은 그저 화려한 비늘이 아니라 스스로도 빛나고 싶다는 은밀한 열망이었다. 그것은 사치가 아니라 어린 영혼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성장의 목마름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곧 시험의 연속이었다. 엄마가 보지 말라던 뱀 장수 앞에서 라지에는 처음으로 금기의 매혹과 공포를 동시에 배운다. 뱀은 속삭인다. “넘어서는 순간, 너는 다른 세계를 보게 될 것이다.” 아이의 발걸음은 곧 시련을 향해 미끄러진다. 돈을 잃어버린 순간, 라지에는 생애 첫 절망에 맞닥뜨린다. 그 절망은 단순히 잃어버린 지폐가 아니라 아이의 순수함이 어른들의 세계 속에 삼켜지는 은유이다.

시장 한복판, 유리 진열장 속 패스트리는 또 다른 유혹을 비춘다. 겉으론 금붕어를 원한다. 하지만 그 욕망의 이면에는 늘 다른 욕구가 도사린다.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갈라지고 흔들린다. 금붕어 가게에 다다랐을 때 돈이 사라져 버린 사실을 깨닫는 장면은 바로 그 흔들림의 잔혹한 대가였다.

하지만 그녀의 곁에는 낯선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 친절한 아주머니. 그녀는 엄마가 아닌 최초의 조언자, 멘토로서 라지에 곁을 걸어준다. 직접 답을 주지는 않는다. 단지 방향을 가리켜줄 뿐이다. 돈이 빠져 있던 하수구 앞에서 아주머니는 옆집 양장점 주인에게 부탁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조언자는 늘 그렇게 떠난다.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결과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풍선 장수 소년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의 손에 매달린 하얀 풍선은 금붕어와는 또 다른 순수의 표지이다. 금붕어를 손에 넣은 순간, 라지에는 이미 어제의 아이가 아니다. 하지만 하얀 풍선은 남는다. 바람에 흔들리며, 소녀가 잃어버린 순수의 잔영처럼, 혹은 언젠가 다시 찾아야 할 또 다른 시작의 기호처럼.

이 영화 속 상징들은 이렇게 삶의 통과의례를 은유하면서도 동시에 이란 사회의 비밀스러운 초상으로 겹쳐진다. 금기와 욕망, 보호와 방임, 동심과 상실. 라지에가 잃어버린 돈을 찾아 헤매는 동안, 우리 또한 시장이라는 거대한 세계 속에서 길을 잃는다. 그러나 끝내 남겨진 풍선은 말한다. 성장의 여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흔들릴 뿐이라고.


4. Style 스타일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연출은 투명하다. 그는 테헤란의 좁은 거리와 시장의 소음을 낯설지 않게 보여주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아이의 시선은 관객에게 전혀 새로운 풍경을 열어준다. 카메라는 낮은 눈높이에서 라지를 따라가며, 소녀의 호흡과 걸음을 함께 내딛는다. 이 시선의 단순함은 사실 치밀한 연출의 산물이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화려한 기법을 쓰지 않고 아이가 겪는 작은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길 위에 흘려보낸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억압된 사회의 공기와 아이들의 무구한 욕망이 서서히 떠오른다. 이 영화는 감독이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와 함께했던 작업의 계보 안에 놓여 있다. 스승의 사실주의와 일상적 디테일에 대한 애정을 물려받으면서도 보다 직접적으로 어린아이의 시선에 카메라를 건다. 이후 <원 서커(The Circle, 2000)>나 <오프사이드(Offside, 2006)>에서도 그는 사회적 억압과 개인의 자유를 대비시키며 억눌린 목소리에 카메라를 내어준다. <하얀 풍선>은 그 모든 시작이자, 가장 순수한 빛깔의 영화다. 1999년 프랑스 <카이에 뒤 시네마>와의 인터뷰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달빛바람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달빛바람입니다. 작은 극장을 품은 마음으로 영화와 일상의 자잘한 조각들을 주워 담습니다. 줄거리보다는 스크린 너머에 잠든 숨소리 같은 것들을 조심스레 건져 올리고 싶습니다.

1,801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5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32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매거진의 이전글제목만 알았던 영화 열여섯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