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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체온- 침묵의 집을 이해하는 시간

에브리바디 파인 (Everybody’s Fine)

by 달빛바람

가을의 체온- 침묵의 집을 이해하는 시간


​가을은 유난히 기억을 불러오는 계절이다. 햇살이 낮게 기울고, 나무들이 잎을 하나둘 떨구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오래된 얼굴을 떠올린다. 추석이 다가오면 도시의 공기에도 묘한 정적이 감돈다. 고속도로 위를 채운 차들, 부엌마다 퍼지는 송편과 전의 냄새, 그리고 그 모든 풍경의 한켠에서 어딘가 어색한 미소로 앉아 있는 사람들. “잘 지내냐”는 인사 뒤엔 여전히 다 말하지 못한 사정과 침묵이 있다.


​이즈음이면, 나는 늘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린다. 로버트 드니로가 주연한 〈Everybody’s Fine〉(2009). 아내를 잃고, 자식들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홀로 남은 아버지 프랭크가 결국 자식들을 찾아 길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는 먼저 집안청소를 깨끗이 하고 튀어나온 나뭇가지도 자르고 손자 손녀들이 뛰어놀 간이 풀장도 설치한다. 그것도 부족했는지 마트에 들러 평소에 잘 마시지도 않는 와인에 비싼 바비큐 구이 그릴까지 구매한다. 그런 그의 모습은 왠지 낯설지 않다. 나의 아버지도 그랬다. “괜히 집이 조용하면 썰렁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쓸쓸함을 무언가로 채우려 애쓰던 사람.


​아버지와의 관계는 내 안에서 언제나 낡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다. 어릴 적 나는 그를 바위처럼 느꼈다. 너무 크고, 너무 묵직해서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 그가 웃을 때조차 어쩐지 무거운 기운이 감돌았다. 말보다 행동이 앞섰고, 애정은 늘 잔소리와 함께 건네졌다. “남자가 그렇게 쪼잔하게 굴면 되겠냐.” “사내는 우는 게 아냐. 원하는 건 네가 네 힘으로 쟁취해야지.”


​나는 초등학교 시절, 프라모델을 좋아했다. 손끝으로 조각을 맞추고 색을 칠하며 완성해 가는 그 정교한 과정이 마냥 즐거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늘 그걸 못마땅해하셨다. “남자가 그깟 장난감이나 만지작거리면 뭐가 되겠냐. 그런 건 인형집 짓기지.” 그 말은 내 어린 마음에 작은 흠집을 남겼다. 나는 그의 눈치를 보며 부품들을 서랍 깊숙이 감췄고, 밤이 되면 불을 끄고 조용히 조립을 이어갔다. 그때의 나에게 조립이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나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한 은밀한 의식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어서야 나는 그 말의 이면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남자라면 강해야 한다’는 세대의 명령 속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그는 세상과 맞서는 법은 알았지만, 마음을 드러내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감정은 사치였고, 표현은 약함이었다. 그래서 그는 늘 무뚝뚝했고 자식을 사랑하는 법을 몰랐다. 아니, 어쩌면 너무 사랑해서 그걸 내색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추석이 가까워오면 그 가부장적 기억은 여전히 부엌의 냄새처럼 되살아난다. 아버지는 여전히 상 위의 자리를 지키고 어머니는 부엌을 오가며 접시를 채운다. 아들들은 경제적 성취를, 딸들은 효심을 증명해야 하는 시간. 웃음 뒤엔 긴장이 있고, 침묵 뒤엔 작은 한숨이 있다. “요즘 일은 잘 돼가냐?” 그 말은 여전히 면접 질문처럼 들린다. 우리는 모두 나이를 먹었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여전히 ‘자식’의 자리에 앉는다.


​나는 지금 싱글이다. 오래된 원룸에 살고, 가끔 창문을 열어 먼 산을 바라본다. 어쩐지 세상과의 연결선이 느슨해진 것 같은 날이면, 예전처럼 무언가를 조립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제는 프라모델 대신, 부서진 관계나 상처 난 감정을 조심스레 맞추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내게서 빼앗아간 그 ‘조립의 시간’이, 지금의 나에겐 마음을 회복하는 방식이 되었다.


​그 세대의 아버지들은 감정의 언어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생존이 먼저였고, 표현은 불필요한 감상으로 여겨졌다. 미안하다는 말 대신 돈을 보내고, 사랑한다는 말 대신 밥을 차려주었다. 그들은 늘 묵묵히 자신의 감정과 외로움을 홀로 조립했다. 내가 어릴 적 서랍 속에서 몰래 부품을 맞추던 것처럼.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고, 사랑의 언어였다.


​시대가 변하며, '가장'이라는 단어가 지니던 권위 또한 서서히 무너졌다. 가족의 형태는 다양해졌다. 1인 가구, 딩크족, 골드싱글—이제는 ‘가족’보다 ‘자기 삶’의 온도가 더 중요해졌다. 어쩌면 현대인들이 어른이 되기를 망설이는 이유는 책임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 책임의 틀이 너무 낡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가정을 꾸려야 어른이다’라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 사회에서, 우리는 아직도 어른의 정의를 재조립하는 중이다.


​추석을 앞둔 어느 날,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왔다. “올 거지? 아빠가 이번엔 직접 전 부치신대.”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웃었다. 기름 냄새가 싫다며 늘 피하던 사람이 기어코 앞치마를 두른다니. 아마도 나와 누나가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때문이겠지. 그러나 막상 집에 가면, 그는 여전히 말이 없다. 테이블 위엔 전과 송편, 그리고 그가 사 온 와인이 놓여 있다. 아무 말 없이 잔을 건네며 “한잔하지”라고 말할 때, 나는 문득 그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인지 느낀다.


​명절의 끝, 식탁 위엔 식은 전과 와인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 적막 속에도 여전히 가족의 체온이 있다. 가족이란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서로의 서툼과 상처를 견디며 그래도 다시 마주 앉는 일. 그게 사랑이고, 성숙이다.


​이제 나는 안다. 어른이 된다는 건, 누군가의 기대를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부모의 시대가 다르다고 비난하지 않고, 자신의 시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

​가을의 시작, 바람은 다시 문틈을 스친다. 볕이 들고 집안에서는 전 냄새가 나고 아버지는 조심스레 잔을 내밀던 그 자리. 말로 다 닿지 못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게 괜찮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우리는 서로의 집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는 한, 우리의 성숙은 매해 가을처럼, 천천히 그러나 반드시 돌아온다. 마치 추석날 보름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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