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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추, 추석 그리고 옥춘

저승캔디, 옥춘의 기억

by hongrang
스크린샷 2025-10-02 오후 9.48.28.png 옥춘이 - 박장대소, 웃음, 미소

저승캔디. 요즘 젊은 세대가 제사상 위의 옥춘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알록달록한 색동무늬를 지닌 작은 사탕이 제사상에 올라 있는 모습을 보면, 아이들은 그것을 그저 무덤의 세계와 연결된 기묘한 사탕으로 받아들이는 듯하다. 그러나 본래 이름은 옥춘당(玉春糖)이다. 쌀가루와 엿을 섞어 바탕을 만들고, 색을 입힌 가락을 여러 겹 겹쳐 둥글게 말아낸 뒤 잘라내어 만드는, 정성과 손길이 들어간 전통 과자다. 이름 그대로 옥처럼 맑고 아름다우며, 봄처럼 화사한 기운을 품고 있다.


옥춘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1719년 『진연의궤』에 이미 그 이름이 등장하고, 1795년 혜경궁 홍 씨의 진찬 기록에도 높이 쌓인 옥춘이 보인다. 당시의 옥춘은 단순히 먹는 단맛의 사탕이 아니라, 화려한 장식과 길상의 상징을 함께 품고 있었다. ‘시의전서’에도 옥춘당 제조법이 실려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쌀가루와 엿을 섞어 굳히고 색을 입혀 만든 것이 특징이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설탕이 보급되면서 형태는 조금 달라졌지만, 제사·혼례·잔치 등에서 장식과 의례의 과자는 여전히 옥춘이었다. 마치 서양의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린 빨간 줄무늬 사탕처럼, 옥춘은 한국적 장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옥춘은 단순한 전통과자를 넘어 금단의 보석처럼 느껴졌다. 나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네 아들과 두 딸을 두셨고, 모두 가정을 이루어 명절이면 사십 명 가까운 친척들이 큰집에 모였다. 큰방과 중간방 두 칸, 사랑방 두 칸에 빽빽이 누워 자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바닥은 아궁이 불로 뜨겁게 달궈졌고, 무거운 솜이불은 몸을 짓누르듯 내려앉았다. 방 안은 후끈했지만, 창호 사이로 스며드는 찬 기운은 코끝을 시리게 했다. 아이들은 좁은 공간에서 옆구리를 부대끼며 쪽잠을 잤고, 눈을 뜨면 새벽 다섯 시부터 제사가 시작되었다.

스크린샷 2025-10-02 오후 9.48.17.png 또르르르 굴러가는 옥춘

제사는 길고도 길었다. 한 집에서 끝나지 않고, 친척 집을 옮겨 다니며 이어졌다. 본가에서 시작된 제사는 아침을 지나 점심 무렵이면 다른 집으로 이어졌고, 어른들은 다시 지게에 제기와 음식을 이고 왕골돗자리를 메고 산으로 향했다. 남쪽에서 출발해 열여덟 기가 넘는 무덤을 돌고 동쪽으로 내려와야 겨우 끝이 났다. 마지막 제사가 끝나는 시간은 오후 다섯 시. 하루 종일 이어지는 긴 제사의 행렬 속에서, 아이들에게는 인내와 지루함만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 지루함 속에서 한 가지 달콤한 희망이 있었다. 바로 제사상 위에 놓인 과자와 사탕, 그중에서도 옥춘이었다.


모든 제사가 끝나면 그 박한 정이 갑자기 넉넉해진다. 이제부터는 남기지 않아야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어른들의 몫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고기, 생선, 전과 과일은 차례상에 올랐다가 음복으로 돌아오면 대부분 어른들의 손으로 흘러들어 갔다. 아이들의 손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것은 몇 가지 과일과 약과, 젤리, 그리고 알록달록 빛나는 옥춘뿐이었다. 그중 약과는 지금도 비싼 편이지만 그 당시에는 더 비싼 편이라 집안 장손정도나 아이들 중에 가장 어린아이 손에 쥐어준다. 그러면 만만한 게 옥춘과 젤리인데 젤리 중에는 수박젤리정도가 인기 있었고 다른 젤리들은 인기가 없었다. 2등은 늘 옥춘이었다. 옥춘은 단단하면서도 투명한 색감 덕에 보석처럼 보였다. 색색의 색상들은 얼마나 다채로운 맛을 줄까 상상해 보지만 실제 맛은 단순한 설탕의 단맛에 불과했고, 제사라는 의례적 장벽 뒤에 가려져 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거기엔 조상님보다 먼저 음식을 맛볼 수 없다는 묵시적인 의례가 깔려있다.


문제는 양이었다. 최소 열 명이 넘는 아이들이 동시에 눈독을 들였지만, 옥춘은 그리 많지 않았다. 제사 끝 음복 자리에서 누군가 먼저 손에 넣으면 다른 아이들은 그해 옥춘을 맛보지 못했다. 한 번의 기회, 그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옥춘은 더욱 간절한 대상이 되었다. 손끝에 닿기 전까지는 늘 빛나는 환상 같았고,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에는 너무나 빨리 녹아 사라졌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저 설탕 덩어리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기호식품이었다.

스크린샷 2025-10-02 오후 9.48.02.png 옥춘은 꽃송이 같다


아이들이 그렇게 옥춘을 원했는데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위해 넉넉히 준비해주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이상하다. 옥춘은 특별히 비싼 것도 아니었고, 재래시장에서 손쉽게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왜 그토록 아껴서 아이들에게는 소량만 허락했을까. 혹시 아이들의 아쉬움과 다툼이 어른들에게는 또 하나의 재미였을까, 아니면 그 시절엔 단순한 사탕조차 귀했기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알 수 없는 진실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 아쉬움 덕분에 옥춘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선명하고도 특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제사는 점차 간소화되었다. 대가족이 모이던 풍경은 사라지고, 제사상에서 옥춘을 보기도 어려워졌다. 지금 내가 옥춘을 본 것은 재래시장의 작은 마트에서 우연히 마주친 순간이었다. 반가움에 잠시 발걸음을 멈췄지만, 그때의 설렘과 간절함은 이미 예전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옥춘을 손에 들었고 명절이 다가오지 않았는데 옥춘을 구매하는 날 계산대 점원을 한번 더 쳐다보게 만들어 주었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옥춘을 ‘저승캔디’라 부른다. 무덤과 제사상에 얹히는 모습이 낯설고 기묘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 옥춘은 저승이 아니라 어린 시절의 한가운데에서 빛나던 사탕이다. 무거운 이불 아래에서 시린 코끝을 감싸 안고, 끝없는 제사의 지루함 속에서 유일하게 기다렸던 작은 보석. 단맛은 사라져도, 그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게 반짝인다. 그리고 그 추억 속에서 옥춘은 지금도 내 마음속 가장 특별한 ‘명절의 사탕’으로 남아 있다.

스크린샷 2025-10-02 오후 9.48.46.png 트로피칼 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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