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괜찮아요”는 우리가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

에브리바디 파인 Everybody’s Fine

by 달빛바람

개요 드라마 미국, 이탈리아 99분

제작 2009년

감독 커크 존스 Kirk Jones



1. Opening 오프닝

가을 햇살이 정원을 포근히 감싸고, 한 노년의 남자가 분주히 움직인다. 그는 오래 비워둔 마음을 정리하듯 집안을 닦고, 마른 나뭇가지를 자르고, 아이들을 위해 작은 풀장을 설치한다. 평소 마시지 않던 와인과 새 바비큐 그릴까지 장만하며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이번 주말, 오랜만에 자식들과 손주들이 그를 찾아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름은 프랭크. 아내가 세상을 떠난 지 여덟 달, 적막한 거실과 텅 빈 식탁 속에서 그는 묵묵히 시간을 견뎌왔다. 이제 다시 가족의 온기를 맞을 준비를 한다.

이 오프닝은 프랭크의 고독과 기대를 동시에 품는다. 멀어진 가족의 거리를 다시 잇기 위한 한 아버지의 조심스러운 시도. 흔들리는 낙엽처럼 그의 하루는 평범하지만 어딘가 뭉클하다. <에브리바디 파인(Everybody’s Fine)>은 그렇게 ‘가족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되묻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2. 프랭크


프랭크는 평생 전선의 피복을 감싸는 일을 했다. 수만 번의 반복 끝에 남은 것은 닳은 손과 상처뿐이었다. 전선을 감싸던 그의 인생은 역설적이었다. 그는 남을 보호하는 일로 생계를 꾸렸지만, 정작 자신은 아무의 보호도 받지 못했다. 의사는 여행을 말렸지만, 프랭크의 마음은 이미 길 위에 있었다. 직접 발로 닿아야만 확인할 수 있는 거리와 진심이 있기 때문이다. 로버트 드 니로는 이 노년의 남자를 섬세하게 연기한다. <택시 드라이버>의 광기나 <대부 2>의 냉철함을 벗고, 평범한 아버지의 얼굴로 스크린에 선다. 그의 연기는 과장 대신 침묵으로, 웃음 대신 눈빛으로 말한다. 그 느린 리듬 속에 노년의 외로움이 잔잔히 스민다.
이 역할을 두고 커크 존스 감독은

로버트는 믿기 힘들 만큼 섬세했다. 그는 프랭크라는 인물의 고독과 사랑을 대사보다도 작은 몸짓으로 전달했다. 그가 앉아 있는 모습만으로도 관객은 이 남자의 과거를 느낄 수 있다. 그는 프랭크를 단지 ‘노인’이 아니라 ‘사랑을 잃었지만 여전히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었다.”(출처:/ Kirk Jones interview, Filmink Magazine, December 2009)

라고 말했다. 프랭크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식들의 사진을 보여준다.

이것 좀 볼래요? 내 아이들이에요. 지휘자인 로버트, 예술가 데이비드, 댄서 로지, 광고계의 에이미. 이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기까지 내가 백만 피트의 전선을 감쌌죠.

그의 목소리는 자부심으로 가득하지만 그 속엔 깊은 쓸쓸함이 배어 있다. 사진 속 웃음은 여전히 빛나지만 이제 그 웃음은 그의 곁에 없다. 텅 빈 식탁 위에는 함께 열지 못한 와인 한 병만이 남아 있다. 프랭크의 표정은 체념이 아니라 삶의 잔향이다. 그는 외롭지만 초라하지 않다. 사랑을 잃었지만 여전히 사랑을 믿는다. 그가 감싸던 전선처럼, 누군가를 다시 연결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선이 이미 끊겨 있음을 그는 여행의 끝에서 깨닫는다. 그의 여정은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신을 확인하는 순례다. '나는 좋은 아버지였을까?'라는 물음이 그의 발걸음을 이끈다. 프랭크는 결국 나이 든 우리가 마주해야 할 쓸쓸함의 초상이다. 그는 완벽하지 않았지만 누군가를 위해 살아왔고, 이제 그들이 자신 없는 세상에서도 괜찮기를 바란다. 그 마음이야말로 부모라는 이름의 마지막 품격이다.


3. 연락도 없이

프랭크의 여행은 외로움의 궤적 위를 걷는 순례였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지자, 그는 직접 그 거리를 확인하기로 한다. “다들 바빠서 못 오는 거야”라던 위안은 이제 공허한 변명이 되어 있었다. 낡은 구두를 신고 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엔, 오래된 전선이 마지막 신호를 전하려는 듯한 떨림이 있었다.

첫 목적지인 뉴욕에는 아들 데이비드의 부재만이 남아 있었다. 닫힌 문과 바람에 날리는 편지 한 장. 그 앞에서 그는 깨닫는다. 자신을 스치는 바람이 어쩌면 아들의 침묵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카고에서는 딸 에이미를 만난다. 깔끔한 식탁, 환한 웃음. 그러나 프랭크가 묻는다. “행복하니?” 그녀는 “그럼요, 아빠”라 대답하지만, 눈빛은 흔들린다. 그의 물음은 단순한 안부가 아니라, “나는 좋은 아버지였을까?”라는 자기 확인이었다.

덴버의 기차역에서 만난 아들 로버트는 반가운 포옹 뒤 곧 연습실로 돌아간다. 그 짧은 순간, 프랭크는 어린 시절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아빠, 나도 할 수 있어!” 그러나 그 기억조차 이제는 먼 메아리다. 아이들은 자랐고, 아버지는 그 성장의 바깥에 남았다.

라스베이거스의 화려한 밤, 막내딸 로지는 진심으로 아버지를 반기지만, 그녀의 미소에도 불안이 번진다. 프랭크는 묻지 않는다. 부모는 아이의 침묵으로도 충분히 이해한다. 그의 여정은 도시의 지도가 아니라 마음의 지도를 따라간다. “행복하니?”라는 말은 결국 자신에게 던지는 고백이 된다. 그는 이제 안다. 그 질문은 “나는 괜찮았을까?”라는 반성의 언어였다는 것을.

그가 걷는 도시마다 하늘은 점점 무겁게 내려앉는다. 그러나 프랭크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믿고 싶다. 세상 어딘가에서 자식들이 ‘정말로 괜찮다’고. 실패처럼 보이는 그의 여행 속에서, 삶의 진짜 얼굴이 비로소 드러난다.


4. 태풍과 제목의 뜻

어릴 적 우리는 잘못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했다. <에브리바디 파인(Everybody’s Fine)>의 자식들도 다르지 않다. 프랭크의 아이들은 어머니를 통해 아버지와 소통했고 아버지는 권위와 침묵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들은 “괜찮아요”라는 말로 진심을 감췄다.

관계는 숲길과 같다. 오래 걸어주지 않으면 길은 사라진다. 다시 길을 내기 위해선 누군가 먼저 용기를 내야 한다. 그러나 프랭크에게 남은 시간은 짧고, 태풍은 언제나 늦게 온다. 한 번의 폭풍이 지나가면, 사랑은 오해로 휩쓸리고 진심은 상처로 남는다. 그는 뒤늦게 깨닫는다. “괜찮다”는 말속에 얼마나 많은 미안함과 외로움이 숨어 있었는지를.

감독 커크 존스는 프랭크를 단순히 불쌍한 아버지로 그리지 않는다. 카메라는 오히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부모와 자식 사이의 단절을 섬세하게 비춘다. 누구도 악하지 않지만, 누구도 완전히 이해받지 못하는 관계의 역설, 그것이 현대 가족의 병이다.

이 영화는 묻는다. “당신은 오늘 가족에게 안부를 전했나요?” 사랑은 거창한 이벤트가 아니라, “잘 지내?”라는 한마디의 용기다. 태풍은 언제나 준비되지 않은 순간에 찾아오지만, 진심은 그 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다.

프랭크의 환상 속에서 로지는 조용히 말한다.

엄마가 아빠를 사랑한 만큼, 아빠가 엄마를 사랑하셨다면… 엄마가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주세요. 우리 모두 잘 지낸다고요.

그 말은 허락이자 위로이다. 프랭크는 그 늦은 깨달음 속에서 미소 짓는다. 태풍이 지나간 뒤의 하늘처럼, 그의 얼굴은 젖었지만 맑게 씻겨 있다. 가족이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손을 잡는 존재이다. 말하지 못한 사랑도, 늦은 진심도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의 제목, <에브리바디 파인(Everybody’s Fine)>은 그 짧은 인사 속엔 여전히 꺼지지 않는 등불 같은 사랑이 남아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취향 내최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