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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가 본 삶의 향기

영화 여인의 향기 Scent of Woman

by 달빛바람

개요 드라마 미국 157분

개봉 1993년 3월 20일

감독 마틴 브레스트 Martin Brest



​1. Opening 오프닝


​전통과 엘리트주의의 상징, 젊은 야망이 계급의 그림자를 가장 먼저 배우는 미국의 한 사립고. 그곳에 앳된 얼굴의 찰리 심스(Charlie Simms)가 서 있다. 친구들이 스키 휴가를 꿈꿀 때, 그는 고향에 갈 비행기표 대신 아르바이트를 구해야 한다.

​‘시각장애 노인 돌봐줄 분 구함.’

​이 구인 광고는 찰리를 다른 세계의 문턱으로 이끈다. 그가 마주할 노인의 목소리는 인간의 체온보다 전쟁의 잔향을 닮았다.

​“내쫓아 버려! 그 녀석이 암코양이를 또 쫓아다니고 있어.”

​문밖의 고함은 일상의 불평이라기보다, 통제 불능이 된 육체에 갇힌 자존의 잔재음이다. 일자리를 소개한 조카는 웃으며 말한다. ​“마음은 따뜻한 분이세요.” ​하지만 그 웃음엔 씁쓸함이 배어 있다. 오프닝은 이미 서사의 윤리적 축을 제시한다. 가난한 장학생과 상처를 지닌 퇴역 노인. 추수감사절이라는 감사의 의례 속에서 두 결핍이 마주한다. 찰리가 낯선 저택의 문턱을 넘는 순간, 카메라는 그 불균형한 세계의 공기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이 문턱은 단지 아르바이트의 시작이 아니라 삶의 냄새와 인간의 존엄에 대한 시험대이다.



2.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

그는 한때 군인의 전형이었다. 규율과 명예, 절도 있는 언어,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존재의 윤곽. 그러나 지금의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은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은 남자다. 그는 불의의 사고로 시력을 잃었지만 카메라는 그를 ‘장애인’으로 낙인찍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빈 시야는 세상을 더 또렷하게 보는 눈처럼 작동한다. 그는 보는 대신, 듣는다. 공기의 떨림, 유리잔이 놓이는 각도, 타인의 숨결의 맥락까지 감지한다. 그의 눈은 멀었지만 세상에 대한 감각은 오히려 과도하게 살아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더 피로하고 더 외롭게 만든다. 그의 말투에는 아직 군대식 박력과 자존심이 묻어나지만 그것은 이미 부식된 명예의 잔해에 가깝다. 그는 조카부부에게조차 '감당할 수 없는 노인'으로 치부되고, 주변의 모든 관계는 그가 쏘아 올린 냉소의 파편 앞에 무너져간다. 그러나 알코올과 독설 뒤에는 스스로의 몰락을 누구보다 또렷이 인식하는 남자의 자의식이 숨어 있다. 그는 자신이 ‘쓰레기’가 되어가는 과정을 감지하면서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 자존심은 생존이 아니라 저항의 형식이다.

​​<대부>, <세르피코>, <스카페이스> 등으로 1970~80년대 미국 영화의 분노와 혼란을 대표하던 배우 알 파치노 Al Pacino. 특유의 폭발적인 에너지와 강렬한 카리스마로 스크린을 장악했던 그는 <여인의 향기>의 프랭크 슬레이드 역을 통해 그 모든 연기 경력의 집약체이자 정교한 변주를 선보인다. 괴팍한 퇴역 군인의 날카로움과 그 이면에 숨겨진 깊은 고뇌, 그리고 따뜻한 인간미를 완벽하게 소화한 연기로, 그는 마침내 제6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8번의 노미네이션 끝에 마침내 트로피를 거머쥔 그는 "여러분이 제 징크스를 깨 주셨습니다(You broke the streak)!"라며 감격의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 영광을 "위대한 예술가들과 함께한 순간"이라 칭하며 동료들에게 공을 돌렸다. 이 수상은 오랜 기다림의 보상이자 그가 왜 동시대 최고의 배우인지를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단순히 시각장애인을 연기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인간의 존엄을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는 존재를 ‘살아내었다’. 그의 연기는 메소드 연기의 전형이지만 기교보다 체험에 가깝다. 알 파치노는 실제로 촬영 내내 시선을 고정하지 않고 주변 물체를 정확히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맹인의 세계를 육체적으로 체화했다. 그의 연기는 마치 깊은 상처 위에 남은 흉터처럼 강인하고 동시에 민감하다. 한때 왕좌를 차지했으나 이제는 그 자리에서 밀려난 맹수처럼 그는 방 안을 서성인다. 그의 냄새는 위스키와 가죽, 오래된 화약 냄새가 뒤섞인 듯하며 그 안에는 인간의 존엄을 마지막까지 지키려는 의지가 서려 있다. 그리고 알 파치노는 단 한 번의 표정 변화로도 영화의 온도를 바꾼다. 조롱에서 슬픔으로, 분노에서 연민으로. 그의 연기에는 감정의 극단보다 자존의 결이 살아있다.

이 영화 속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은 단순히 시력을 잃은 인물이 아니다. 그는 명예를 잃은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감각이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존재이다. 어둠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세계를 ‘본다’. 그것은 눈이 아니라 품격으로 보는 시선이다.



3. 뉴욕 시티 그리고 숨겨진 이야기

갑작스러운 뉴욕행. 찰리에겐 예정에 없던 일이었지만 프랭크 중령에겐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다. 여자와 페라리. 중령이 사랑하는 2가지. 중령은 찰리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 이건 단지 교육의 시작일 뿐이야."
(This is just the beginning of your education.)

이 말은 그의 계획의 선언이자 찰리에게 강요되는 경험의 윤리적 시험지이다.

​이 영화는 뉴욕의 화려함과 부가 집약된 상징적인 장소들을 비춘다. 월도프 아스토리아, 플라자 호텔의 오크 룸, 파크애비뉴와 5번가 일대 같은 공간들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그 자체로 권력, 사치, 그리고 그 이면의 허영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렇다면 왜 프랭크는 이 도시의 향락을 향해 달려가며 동시에 사람들을 모욕하고 공격하는가? 그의 위악은 단순한 성격의 문제나 짜증이 아니다. 한 인간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돌봄의 대상으로 전락했을 때 벌어지는 내적 풍경이다. 전장에서의 명예를 잃고, 눈을 잃고, 이제 의존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 사람은 자기 존엄의 마지막 잔불을 지키려 몸부림친다. 가족은 보호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를 ‘무능력한 객체’로 규정하고, 돌봄은 배려를 가장한 통제로 바뀐다. 그러한 통제는 타인의 선의로 포장된 수치와 굴욕을 동반한다. 프랭크의 조카부부와 형제자매—그들의 도움은 그를 아이처럼 다루고, 그를 소심한 존재로 축소시킨다. 그 축소는 프랭크에게 ‘사형 선고’와 다르지 않다. 따라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냉소와 가학적 농담은 방어기제이자 복수의 언어이다. 타인을 모욕함으로써 먼저 심판자를 자처하고, 스스로를 다시 권력의 자리로 밀어 올린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가족에게서 받는 “부드러운 가두기”에 대해 반격을 가한다. 가족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돌봄의 이름으로 빚어낸 권력관계이다. 프랭크의 연설과 모욕은 결국 그 권력관계를 무너뜨리려는 마지막 몸부림이다.

​찰리가 이틀 동안 목격한 것은 뉴욕의 이중적인 모습이었다. 겉으로는 화려한 도시의 풍경이 펼쳐지지만, 그 밑바닥에서는 가족의 무심함과 개인의 수치심이 얽힌 권력 드라마가 벌어지고 있었다. 가족의 식탁이 굴욕의 무대가 되고 친밀함이 감시와 평가로 변질되는 그 모든 순간이 프랭크의 ‘대연설’과 모욕을 통해 적나라하게 폭로된다.


그가 찰리에게 “하루만 더 함께 있어주게… 전쟁터에서의 마지막 일정이야”라고 부탁하는 장면은 사실상 자신의 마지막 자존심 퍼포먼스를 위해 타인을 증인으로 삼으려는 시도이다.

그래서 ​이 여행은 찰리에게 ‘모험’이라기보다 '목격의 훈련'에 가깝다. 뉴욕의 화려한 호텔과 레스토랑은 반짝이는 장식일 뿐, 진짜 무대는 인간관계의 미세한 폭력성이 수면 아래 흐르는 곳이다. 프랭크의 위악은 그 무대 위에서 상연되는 불가피한 연극이다. 이 연극은 누군가에게는 잔혹한 교육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폭로의 장이 되며, 관객에게는 ‘가족’이라 불리는 권력의 구조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4. 제목의 뜻

- 전쟁과 죽음의 향기와 삶과 환희의 향기!


​프랭크 슬레이드 중령의 방은 묵직한 냄새들로 채워져 있다. 밤새 마시다 만 잔의 위스키 향, 낡은 가죽 제품에서 풍기는 묵직함, 그리고 군복 깊숙이 배어 희미해진 오래된 화약 냄새. 이 냄새들은 단순한 향이 아니다. 그것은 전쟁과 죽음, 절망과 고립, 스스로 선택한 유배의 냄새이다. ​그는 이 죽음의 냄새들 속에서 볼 수 없는 대신, 삶과 환희의 냄새로 기억한다.


‘Scent of a Woman’, 여인의 향기. 이 제목은 단순히 여성의 향수가 아니라 프랭크가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모든 것—한때 자신이 지배했던 쾌락, 남성적 질서, 그리고 '살아있음' 그 자체에 대한 지독한 향수(鄕愁)이다. 시각은 속일 수 있어도 본능을 파고드는 후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 상징이 가장 관능적으로 폭발하는 장면이 바로 탱고 시퀀스이다.


​시끄러운 호텔 라운지, 그 모든 소음을 뚫고 한 줄기 비누 향이 그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그는 향기만으로 그녀를 읽어내고 마치 오랜 연인을 알아보듯 손을 내민다. 그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플로어로 이끄는 순간, 닫혔던 시각의 자리에 청각과 후각, 그리고 촉각이 폭발적으로 열린다. ​음악이 흐르고, 두 사람의 숨결이 포개어지며 리듬을 탄다. 이것은 단순한 춤이 아니다. 아슬아슬한 긴장 속에서만 피어나는 육감의 교류이다. 한 발을 내딛고, 숨을 들이마시고, 선회(旋回)한다. 이 순간, 그는 눈먼 퇴역 장교가 아니라 여전히 욕망하고 살아있는 '남자'로 돌아온다. 이것은 절망의 끝에서 발견한 삶의 미묘한 온도이며 죽음을 잠시 유예시키는 찰나의 황홀경이다.


​그리고, 페라리. ​이 붉은 맹수와의 질주는 이 영화가 말하는 가장 위험하고 일탈적인 변주이다. 맹인이 붉은 스포츠카를 몰고 뉴욕의 심장을 가로지르는 무모함. 엔진이 거칠게 포효하고, 아스팔트를 태우는 타이어 냄새가 그의 모든 감각을 깨운다. 이것은 죽음을 향한 마지막 도발이자 삶의 아드레날린을 향한 맹렬한 갈망이다.


​그러나 질주는 멈추고, 춤은 끝난다. ​페라리의 엔진이 꺼지고 탱고의 선율이 멎었을 때, 황홀경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 그를 덮치는 것은 위스키의 쓴 향보다 지독한 허무와 허탈이다. 가장 찬란하게 타올랐던 순간 직후에 찾아오는 가장 깊은 어둠. 그는 다시 무력한 맹인으로 방 안의 위스키 향으로 돌아와야 한다.


​결국 이 영화에서 ‘여인의 향기’란, 그 모든 황홀과 허무가 휩쓸고 간 뒤에도 꺼지지 않는 삶의 본능적인 충동이자 인간 존엄의 잔향이다. 시력을 잃고, 가족에게 버림받고, 명예마저 잃은 한 남자가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려 애쓰는 마지막 방식. 시각을 잃은 자가 후각으로 가까스로 붙잡고 있는 세상. 그 미세한 향이야말로 죽음과 삶을 가르는 가장 위태롭고도 절실한 인간의 마지막 감각이다.



​5. 순수의 도발, 존엄의 공명


​이 영화는 멘토링의 외피를 썼지만, 일방적 가르침이 아닌 공명(共鳴)에 대한 이야기이다. 시력을 잃은 군인과 도덕적 기로에 선 학생은 서로를 마주한다. 찰리의 단단한 양심이 프랭크의 무너진 자존심을 자극하는 것, 이것은 '순수의 도발'이다.


​프랭크가 "살 이유"를 물을 때, 찰리는 논리가 아닌 애정의 언어로 답한다.

당신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탱고를 추고 페라리를 운전하는 걸 가장 잘하는 사람이에요.
​"You can dance the tango and drive a Ferrari better than anyone I've ever seen."

죽음을 막아선 것은 거창한 철학이 아니라, 삶이 얼마나 감각적으로 아름다울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 증명이다.
​영화의 정점인 징계 청문회 연설은 이 영화를 단순한 인간극에서 도덕적 선언문으로 격상시킨다. 프랭크는 타락한 성공 신화의 폐허 위에서 어른들이 잃어버린 윤리를 복원한다. 그 핵심은 명료하다. 내 이익을 위해 동료를 팔지 않는 것, 그리고 권위에 맞선 소년의 행동을 지지하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시험하지만 그 길을 이끄는 것은 신이 아닌 자신의 신념이다. 그러나 이 연약한 신념은 어린 시절, 어른들의 폭압적인 논리 앞에 무력하게 스러지곤 한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스러진 신념을 되살리는 서사이다. 세상의 눈치를 보던 소년과 눈을 잃은 남자가 서로의 결핍을 보듬어 마침내 존엄을 회복하는 과정, 그 자체인 것이다. 그 여정의 끝에 남는 것은 성공이나 정의가 아니다. 어떤 순간에도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는 태도,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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