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사이코
내가 150만 원짜리 재킷을 산 이유
- 인정 욕망의 무게
만 서른 살.
그 숫자가 내게 던지는 무게는 예상보다 훨씬 견고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숙’과 내가 실제로 서 있는 자리 사이의 간극은 깊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날 나는 생전 처음으로 백화점 명품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차가운 스폿라이트 아래, 유리장 안의 마네킹은 완벽한 어깨선을 뽐내며 서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인형이 아니라, 미래가 보장된 사람의 모형처럼 보였다. 직원이 다가와 내 치수를 재며 말했다.
“이번 시즌 신상품입니다.”
나는 몰래 가격표를 뒤집었다.
‘1,500,000 ₩.’
그 숫자는 내 얇은 통장 잔고를 찢고 들어오는 비수였다. 월급 명세서보다 무거운, 옷 한 벌의 무게. 순간 주눅이 들었지만, 동시에 묘한 욕망이 스쳤다. 이 옷이 나에게 가짜 신분증을 발급해 줄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약속.
그날 백화점을 나서며 다짐했다. 언젠가 저 옷을 사겠다고. 그리고 그 옷이 상징하는 계층의 압력에 굴복하는 대신, 그 압력을 역으로 이용하겠다고.
1년 뒤, 쌀쌀한 가을 오후. 할인이 시작되었다는 소식에 이끌려 다시 그 백화점을 찾았다. 재킷을 걸치는 순간, 고급 원단이 손끝에서 이상하리만큼 전율을 일으켰다.
거울 속 나는 낯설었다. 어깨선은 완벽히 맞았지만, 단추를 잠그는 순간 가슴이 턱 막히듯 조여왔다. 안에서는 미세한 초라함이 꿈틀대는데, 겉으로는 단단히 무장해야 한다는 강박. 그때 알았다. 이건 옷이 아니라, 갑옷이었다. 그 갑옷은 나를 단단하게 보이게 했지만, 동시에 내 안의 공허함을 들킬까 두려워 나 자신에게서 멀어지게 했다.
그해 겨울, 그 정장은 옷장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아까워서 못 입는다’는 말 뒤에는 “내가 이 옷을 입을 자격이 있을까?” 하는 불안이 숨어 있었다. 정장은 옷걸이에 걸린 채, 청춘의 미결제된 불안으로 주름졌다. 그 완벽한 형태를 고스란히 보존하려는 행위 속에서, 나는 점점 옷의 무게에 압도되어 갔다.
이듬해 봄, 친구의 결혼식. 나는 마침내 그 정장을 꺼냈다.
두꺼운 울 원단은 더운 공기에 쉽게 젖었지만,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 옷이 선사한 ‘우아함’이라는 껍데기를 놓칠 수 없었다.
식장에 들어서자 친구들이 말했다.
“야, 신랑보다 네가 더 멋지다.”
그 칭찬이 내 안에서 소름처럼 일었다. 몸은 뻣뻣이 굳었으나, 심장 한구석에선 역겨우리만큼 달콤한 안도감이 부풀어 올랐다. 식사 자리에서 나는 혹시 소스가 튈까 봐 몸을 굳히며 포크를 들었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소스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언제 이 완벽한 가면이 벗겨질지 모른다는, 내면의 공포 때문이었다. 껍데기로 위장한 내 존재가 순식간에 발가벗겨질까 봐.
그때 떠올랐다.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의 패트릭 베이트먼. 그는 매일 아침 철저한 루틴으로 완벽한 외양을 다듬는다. 클렌징, 보습제, 아이밤, 마스크팩.
그의 하루는 ‘입는 일’로 시작해 ‘보이는 일’로 끝난다.
정장은 그의 갑옷이자, 파괴적인 공허를 감추는 유일한 가면이었다. 회의실에서 그는 새 명함을 꺼내 동료에게 자랑한다. 하지만 이내 더 고급스러운 명함을 본 순간, 얼굴이 굳는다.
“저 은은한 색조 좀 봐. 절제된 두께감까지… 워터마크까지 있잖아.”
그가 보는 것은 명함이 아니라, 그 안에서 비치는 자신의 부족함이었다. 완벽한 슈트로 무장했음에도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텅 빈 내면의 광기. 루이스는 베이트먼의 슈트를 극찬하며 브랜드명을 추측하고, 베이트먼은 그 칭찬이 "당신의 칭찬으로 충분하다"라고 답한다. 그의 대답에는 냉기와 광기가 섞여 있다. '칭찬'이 곧 존재의 근거가 된 남자.
나는 그 장면을 떠올리며, 식장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그의 슈트와 나의 정장은 다르지 않았다. 고급 명함과 값비싼 재킷, 그것이 전부였다. 베이트먼이 타인의 칭찬에 안도하고 그 칭찬이 사라지자 존재가 붕괴되듯, 나 또한 “신랑보다 낫다”는 한마디에 내 존재를 위태롭게 걸고 있었다. 결국 나의 정장은 몇 해를 옷장 안에서 버텼다.
다시 꺼내 입으려 했을 때, 그동안 살이 쪄 단추는 잠기지 않았다. 그러나 허탈하지 않은 대신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그 실패한 착용은 내게 ‘벗어날 권리’를 주었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샀던 건 옷이 아니라 결코 채워지지 않는 인정욕망이었다는 것을. 그 옷의 값이 백오십만 원이었던 이유는 원단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내가 덧씌운 불안과 허영의 무게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옷장 깊숙한 곳에서 갑옷이 사라진 자리가 서늘하게 느껴졌다. 이젠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줄 단단한 껍데기가 없었다. 불안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다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저 마네킹을 지나치며 '이제는 안다'라고 선언하는 대신, 그 갑옷이 필요했던 순간들을 문득 그리워하는 이중적인 자기 인식 속에 서 있었다.
우리는 누구나 한때 그런 옷을 입는다. 다만 문제는 그 옷에 영원히 갇혀 버릴 때 시작된다. 베이트먼은 끝내 가면을 벗지 못한 채 허상의 세계 속에 파멸했지만 우리는 조금 늦게라도 깨달을 수 있다. 정장은 결국 벗어야 한다는 것을.
진짜 성장은 그 껍질을 벗어던지고 비워내는 데서 시작된다. 마치 낙엽을 다 떨군 뒤, 겨울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나무들처럼. 우리도 언젠가 ‘비움의 미학’을 배워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짜 자신으로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