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키키 브라더스
밥벌이의 품위, 그 잔혹한 미학에 대하여
너, 정말 왜 그렇게 사냐?
이 말은 타인을 향한 비난이 아니다. 매일 아침, 면도날을 쥔 거울 속 나를 향한 가장 내밀한 독백이다. 밥벌이의 잔혹함은 언제나 외부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정확히 같은 각도로 절망하고 있음을 확인하는, 그 서늘한 자각에서 시작된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 속 인물들은 내 오랜 동지들이다. 그들의 손가락은 지방 나이트클럽 취객의 신청곡에 맞춰 기계적으로 코드를 짚는다. 무대 위, 요란한 조명 아래 얼굴 위로 흐르는 푸른 그림자는 단순한 음영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 잠식당한 영혼의 영정사진이며, 생계라는 이름의 굳은살 아래 곪아 터진 청춘의 혈흔이다. 그러나 그 타협 속에도 기묘한 품위는 있다. 버티는 것, 끝내 주저앉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처절한 미학이 된다.
몇 년 전, 고등학교 문학동인회 시절 친구가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 15년 만기 종신보험 설계서를 내 앞에 펼쳐놓았다. 한때 백석의 시어를 논하며 허공을 가르던 그의 검지가, 이제는 사망 시 지급되는 보험금 액수를 정확히 짚고 있었다. 나는 그의 번들거리는 미소 너머로 풍기는 낯선 향수 냄새와, 잘 다려진 셔츠 소매 안쪽의 낡은 실밥을 동시에 보았다. 그는 노후의 품위에 대해 열변을 토했지만, 나는 그의 열변이 아니라 그 손가락의 미세한 떨림, 한때 가장 빛나던 무기(武器)로 타인의 불안을 저당 잡아 제 생계를 구걸해야 하는 한 사내의 처절한 페이소스를 목격했다.
그날 이후 나는 생각한다. 품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추락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추락의 순간에 어떤 표정을 지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영화 속 성우(이얼 분)는 끝까지 음악을 놓지 않지만, 음악은 그의 품위를 지켜주지 못한다. 오히려 음악 때문에 그의 비루함은 더욱 선명해진다. 관객도, 박수도 없는 텅 빈 무대에서의 마지막 연주. 그것은 생계를 위한 노동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진 폐허 위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무너짐을 완성하려는, 가장 아름다운 형식의 자기 파괴이다.
비밀이지만 팬데믹 시절, 나는 한 자수성가한 CEO의 자서전을 대필했다. ‘불가능은 나의 사전엔 없다’는 문장을 매끈하게 다듬으며 받은 원고료로, 밀린 월세를 냈다. 낮에는 그의 성공 신화를 조립하고, 밤에는 차가운 키보드 위에서 나의 실패를 계산했다. 그때 깨달았다. 밥벌이의 가장 잔혹한 지점은 가난이나 노동의 고됨이 아니다. 내 혀로 타인의 성공을 핥아주는 대가로 끼니를 연명해야 하는 감각, 내 안의 가장 진실한 목소리를 팔아치우는 자기 소외이다. 성우가 텅 빈 무대를 향해 연주했다면, 나는 텅 빈 내면을 향해 타인의 성공담을 연주하고 있었던 셈이다. 밥벌이는 생존의 수단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엄이 시험대에 오르는 잔혹한 무대이다.
보험 설계사가 된 친구와 대필 작가로 살아남은 나, 그리고 와이키키 브라더스. 우리는 다른 악기를 들고 있지만 같은 노래를 연주한다. 누구도 우리를 구원하지 않고 카메라는 그저 묵묵히 응시할 뿐이다. 그 서늘한 거리감이 오히려 잔혹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힘일지 모른다. 구원은 타인의 연민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치욕적인 순간을 정면으로 마주 보는 자에게만 허락되는 것. 그것이 노동자의 마지막 자존이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거울을 본다. 그리고 더는 묻지 않는다.
“왜 그렇게 사냐?”는 질문은 패배자의 것이다. 이제부터 나의 질문은 이것이다.
너는 너의 무대 위에서, 가장 잔혹한 순간에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마지막 곡을 연주할 것인가?
이 질문을 포기하지 않는 한, 나의 노동은 결코 모욕이 될 수 없다. 밥벌이의 품위는 여전히 잔혹하겠지만 나는 그것을 기꺼이 나의 미학으로 삼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