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북극! 영화 아틱! Arctic
개요 드라마 아이슬란드 98분
개봉 2019.03.37
감독 조 페나 Joe Penna
1. 타인의 숨소리
갓난아기의 숨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본 적이 있는가? 혹은 등에 업힌 타인의 쌕쌕거리는 힘든 호흡을 온몸으로 느껴본 적이 있는가? 타인의 숨소리가 내 몸을 통해 전해질 때 동일한 생의 맥박이 내게도 뛰고 있음을 체감하게 된다. 그리고 달랐던 박자가 어느 순간 동일해짐을 느낄 수 있다. 단순한 신체기관을 통한 공기의 이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 생의 박동은 우리가 동일한 신체를 지닌 생명체이자 숨을 쉬기 위한 최초의 울음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시킨다.
우리가 잠든 아기의 숨결소리에도 병상의 할머니의 거친 기침소리에도 마음이 들썩이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여기 스크린 가득 거친 숨소리를 내며 검은 땅에 삽질을 하고 돌을 골라내는 한 사내가 있다. 화면 내내 들리는 것은 혹한이 느껴지는 바람소리와 그의 숨소리뿐이다. 그가 판 글자 S.O.S가 전경 (全景) 쇼트로 보인다. 이곳은 북극이며 그는 혼자다.
2. 직선으로 나아가는 이야기
최대한으로 절제된 대사, 자연이라는 스펙터클 그리고 주인공의 분투! 아주 심플하고 정직한 스토리. 야구로 비유하자면 '송곳 직구'같은 이 영화는 단 한 번의 플래시백(flash back) 없이 흘러간다. 즉, 주인공의 사연풀이를 통해 그 이전의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잠시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를 현대버전으로 영화화 한 로버트 저메키스 (Robert Zemeckis) 감독의 2001년 작품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와 비교해 보자면, '캐스트 어웨이(Cast Away)'속 주인공 척(톰 행크스)은 대기업 FedEx의 임원이며 세상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인물이었다. 일과 사랑에 모두 성공하여 부족한 것이라고는 '시간'뿐이던 그가 비행기 사고로 외딴섬에 표류하게 되어 갑작스레 모든 것을 다 잃게 되고 그에게 남은 것은 한 없이 흘러가는 '시간'뿐이게 된다. 이 극적인 변화는 그 자체로 드라마를 만들며 이런 설정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더욱 몰입하게 만든다. 그가 서럽게 울 때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우리는 그의 이전 상황을 알기에 그에게 더욱 공감할 수 있다. 허나 이 영화는 그런 설명을 과감히 생략한다. 우리는 영화 속 빨간 패딩을 입은 남자에 대해 알 도리가 없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는지 무슨 일을 했었는지 여기 북극에는 무슨 연유로 와서 조난을 당하게 되었는지. 죽은 동료와는 어떤 관계였는지. 심지어 그의 패딩 왼쪽 가슴에 적힌 'Overguard'가 이름이라는 것조차 알아채기 쉽지 않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현 상황에 대처하는 그의 행동과 상황마다 변화하는 그의 표정을 통해 그의 심정을 추측할 뿐이다. 정보가 없기에 더욱 눈여겨 그의 행위를 보게 되며 그의 익숙하고 능숙한 태도를 보며 여기 조난당한 지 꽤 지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난당한 지 며칠 째인지 몇 달 째인지조차 나오지 않는다.)
이렇듯 송곳처럼 직선으로 나아가는 이야기는 마치 군더더기 없는 명징한 문장처럼 생생한 현장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우리는 섣불리 어떠한 예상도 추측도 희망도 할 수 없다. 그저 이 과묵한 남자가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늘 하던 것처럼 농어를 낚시하여 날로 먹고 구간을 옮겨가며 무전신호를 보내고 시간에 맞춰 잠을 자고 그다음 날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3. 생존본능과 구조행위
우리는 '생명은 모두 고귀한 것이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라고 어릴 때부터 배운다. 하지만 야생의 생존 법칙은 무자비하고 약육강식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 문명사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시대가 힘들수록 상황이 어려울수록 절로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하는 생각이 움트는 것이다. 나의 생존이 '무사히' 확보되어야 남을 돌볼 여력이, 여유가 생긴다는 생각은 어쩜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남을 위한 무구한 희생, 내 생명까지 내 다 바치는 사랑은 부모나 아니 종교에서나 가능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는 나의 생존본능과 타인을 향한 구조행위가 정말 대립되는 것이며 함께 병행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묻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생면부지의 여자를 끌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한 걸음씩 옮긴다. 손은 이제 얼다 못해 파랗게 청색증이 올 정도이다. 그는 발가락을 잃은 적이 있고 이제 그는 다리에 부상마저 당했다. 마음속에는 끝없이 '포기할까? 그만 놓고 갈까?' 이 고민이 요동칠 테지만 그는 묵묵히 상처를 묶고 다친 발을 절뚝이며 한발 한발 걸음을 옮긴다. 그의 모습은 이제 경건해 보이기까지 한다.
생에 대한 의지를 비명과 한탄이 아닌 침묵과 단호한 걸음으로 보여준 영화가 있었던가?
4. 희망과 고통
'희망'이란 말은 때때로 실체 없고 근거 없는 것이라 헛되고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반대로 고통은 생생하고 끈질기며 한숨 돌렸다 싶은 순간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는다. 희망은 실체 없는 연기 같고 고통은 나만 느끼는 귀신같다. 귀신은 죽음으로 그를 이끌고 그는 사라지는 연기를 느낄 수 있다.
아니 눈앞에 꺼져가는 한 생명을 느낄 수 있다.
한 명의 인간으로서 꺼져가는 타인의 생명 앞에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위는 무엇인가?
감히 이 질문에 답을 하기는 어렵지만 이 영화를 보고 우리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무릎을 꺾는 것은 재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 마음속에 부는 후폭풍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제 틀렸어! 다 끝났어."
주인공은 끝내 이 말을 삼키고 돌아와 그녀에게 "미안해.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괜찮아질 거야."라고 말한다.
늘 죽음은 가차 없고 생은 눈물겹다.
5.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영화의 마지막, 그가 드디어 천신만고 끝에 목적지인 임시기지에 다다랐다. 그는 울부짖는다. "여기 사람 있어요." 그의 울음은 눈물겨운 희망의 생존신호이다. 아니 생의 박동에 가깝다! 응답은 늦지만 마침내 헬리콥터를 타고 구조대가 올 것이다. 올 것이라 믿는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당신이 살아서 내가 참 고마워.'
고난에 무릎 꿇지 않고 힘들 때 타인의 손을 잡는 것. 이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누군가는 저 모습을 보며 신적 존재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허나 그는 피를 흘리고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며 마침내 소리쳐 우는 인간이다.
그의 의지와 희망은 어디서 왔을까?
황량한 빙하에서도, 병실에서도, 자신의 집에서도 하나의 호흡을 최대한으로 음미하면 다만 존재할 뿐인 상태가 진정 살아있는 것으로 고양된다.
-벤 셔우드의 책 '그들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387쪽
그의 희망의 원천은 사실 타인과의 교류에서 온 것이 아닐까? 극단적 상황에서도 옆에 손 잡을 타인이 있다는 위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라는 말은 사실 그가 스스로에게 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깥세상을 향해 외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는 타인의 숨결을 듣고 상처를 치료해 주고 어미새가 모이를 주 듯 물과 음식을 주며 생의 감각에 집중했다.
우리는 누구나 조난당할 수 있다. 혹은 연기같이 흩어지는 희망에 귀신처럼 쫓아오는 고통에 무릎이 꺾일 수 있다. 그럴 때 이 말을 기억하자!
"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나는 살아남을 수 있다."
-벤 셔우드의 같은 책
일상의 안온함에 생의 소중함을 잊고 지낼 때 다시금 보고 싶어지는 영화이다.
내곁에 누운 너의 손을 잡으며
오늘의 무사함에
손끝에 느껴지는 생의 박동에
감사하며...
추울 때 보면 더 추워지는 영화 여덟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