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개요 드라마 프랑스 152분
개봉 2024.01.31
감독 쥐스틴 트리에 Justine Triet
1. 사건의 발생
1층에서 인터뷰가 행해지고 있다. 유명한 여성작가와 여대생. 작가 산드라는 현실을 소재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다. 위층에서 큰 음악소리가 나고 인터뷰는 방해받는다. 밖에는 설산이 펼쳐져 있고, 이곳은 프랑스 외딴곳의 별장이다. 선글라스를 쓴 아들이 개와 산책을 한다. 아들은 시각장애인이며 개는 아이에게 친구 이상의 존재이다. 아름다운 설원과 어울리지 않는 큰 음악소리는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곧이어 사건이 발생한다. 시각 장애인 아들이 별장 입구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한다. 음악소리는 여전히 시끄럽고 더욱 커진다. 산드라는 울먹이며 신고를 하고 개는 얌전히 엎드려 있다. 이 사건은 시작부터 아이러니하다. 유일한 목격자는 시각장애가 있는 아들과 말 못 하는 안내견뿐이다.
2. 사실의 인식
사무엘 말레스키 별장에서 숨진 채 발견!
명료한 문장은 사건을 객관화 시키며 사실화한다. 우리는 사고를 목격함으로써 실감하기보다 그 사고에 대해 TV나 미디어로 발화된 ‘명확한 문장’으로 실감하게 된다. 사실은 하얀 눈 위의 빨간 피처럼 명확하지만 ‘사실인식’은 그 명확한 증거보다 제3의 눈과 목소리를 빌려 객관화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부검의가 장갑을 끼고 시신의 사진을 찍는다. 의학적 사망원인은 두뇌외상이며 법의학적 사인은 사고 혹은 개입된 사망-즉 타살의 가능성이 있으며 독극물 확인도 필요하다고 나온다.
그 이후 집안의 사진들이 쭉 보인다.
대학시절 한 대학교수가 재밌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명확한 증거’란 무엇인가? 그러자 금방 답이 나왔다. ‘사진이나 영상이요.’ ‘좋아! 그럼 카메라는 거짓말을 하지 않나?’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렇다와 아니다로 토론이 벌어졌다. 카메라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측은 카메라 또한 앵글과 초점으로 얼마든지 그 이미지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개미도 거대한 괴물로 표현할 수 있으며, 엄청 큰 건물도 사람보다 작게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다 측은 그것은 ‘인간의 착시’이지, 카메라의 거짓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보는 이의 주관적 해설의 개입이지, 기계는 그저 있는 그대로를 찍는다는 의견이었다. 다시 반박이 이어졌다. 보는 이의 관점이 있다면 찍는 이의 ‘의도’ 또한 사진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는 실재와 허구, 진실 이 세 가지 키워드로 법정이라는 무대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 영화는 범인에 관심이 있지 않다. 바로 당신이 ‘진실’이라 믿는 그 ‘근거’에 관심이 있다.
3. 변호사의 등장
한 남자가 여주인공 산드라의 초대를 받아 이곳을 방문한다. 산드라는 낯선 나라에서 낯선 언어로 이 사건에 대해 경찰과 법정에서 진술해야 했기에 그를 부른 것으로 보인다. 앞에서 ‘사실 인식’은 제3자를 통해 객관화되었을 때 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마치 우리가 숲 안에 있을 때는 그 숲이 얼마나 큰지, 얼마나 빽빽한지,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는 것처럼 그 사건 가운데 ‘위치’하게 되면 그 사건을 객관화하여 발화하기 쉽지 않다. 그녀의 최초의 진술은 그래서 두 번 세 번 발화되면서 수정에 수정을 가하게 된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사실을 보완하기도 또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기도 한다.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진술 때도 그렇게 말했나요?’라고 질문을 넣음으로써 이 점을 강조한다. 주인공은 기억으로 사건을 재구성하고 관객은 그것을 대화라는 형태로 듣게 된다. 아직까지 여자에게 타살의 혐의는 없고 사건은 단순해 보인다. 남편은 다락에서 작업을 하다 어떤 연유로 창밖으로 추락해 사망하였다. 최초의 목격자인 아들, 다니엘은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있다. 아들을 돌봐주는 대모 모니카가 등장하고 나서야 초대받은 남자가 변호사 뱅상이라고 소개된다. 이때 스치듯 지나가는 대화는 주인공 산드라의 성격을 말해준다. 모니카는 다니엘을 위로하기 위해 점쟁이 이야기를 꺼내지만 산드라는 그건 적절치 못하다며 그 얘기를 막는다. 그녀는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변호사 친구를 불렀으며 비과학적이고 근거 없는 점쟁이 타령은 못마땅해하는 인물이다.
변호사 친구인 뱅상은 전문가답게 사건의 쟁점은 무엇이며 변론을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조언해 준다. 이렇게 사건은 법적인 기준에 따라 산드라를 사건의 목격자이자 잠정적 ‘피의자’로 변론하게 만든다.
4. 사실이 아닌 그럴듯한 이야기
자, 이쯤이면 이 영화가 아주 ‘영악한’ 면이 있다는 걸 눈치챘을 것이다. 남편은 갑작스레 사망하였는데, 고인에 대한 추모와 위로의 시간을 가져야 할 시점에 주인공은 자신이 남편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고 증거를 들이밀며 변론해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누구나 믿을만한 그럴 듯 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변호사 친구는 그냥 실수로 추락했다는 말은 ‘아무도 안 믿을 거예요’라고 말한다. 단순한 부주의로 인한 사고사가 아닌 그럴듯한 이야기. 주인공의 직업이 현실을 소재로 하는 작가라고 설정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지루하고 빤한 사실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허구의 이야기를 더 믿는 경향이 있다. 사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우연의 연속이고 허구의 세계는 필연적이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숨겨진 사연. 이제 여자는 무심코 넘어갔던 과거 기억을 끄집어낸다. 이 영화는 계속해서 하나의 사건을 두고 이성적으로 그 주장이 맞는지 그 가설이 과학적으로 믿을 만한 것인지를 검증한다. 이때 관객은 한 명의 객관적 심판자로서 그들의 대화를 보게 된다. 이것이 이 영화가 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남편이 어떻게 추락했는지를 보지 못했고, 단지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사고의 경위를 레고 조립하듯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조립하게 된다.
현장 검증을 하는 주인공 산드라. 그런데 계속해서 ‘기억’과 다른 틈이 발생한다. 재연되는 행위는 부자연스럽고 목적이 있는 행위는 대역까지 등장한다. 사실은 계속하여 검증되고 수정된다.
5. 재판의 시작
이제 아들은 주요 증인으로 엄마는 피의자의 신분으로 재판이 시작된다. 법원은 엄마인 산드라가 주요 증인인 아들 다니엘에게 어떤 강압도 영향력도 끼치지 못하게 사람을 보낸다. 법원의 객관적 판단을 위해 모자사이가 멀어진다. 엄마는 큰 정신적 압박에 극도로 예민해지고, 아빠를 잃은 아들은 엄마의 위로를 받을 기회를 잃는다.
법정은 검사 측과 변호사 측으로 나누어져 싸움을 벌인다. 진실을 밝히려는 시도에 성역(聖域)은 없다. 고인(故人)의 명예도 유가족(遺家族)의 슬픔도 모두 뒷전이다. 이 싸움으로 가장 소외당하고 상처 입는 건 당연히 아들 다니엘이다.
객관적 관점과 법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우리가 매일 당연시하던 행동도 이상해 보일 수 있다. 우리의 무의식적 일상적 행동에 ‘그때 왜 그랬나요?’ 혹은 ‘왜 안 그랬죠?’ 이렇게 캐묻게 되면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득할 재간이 없다. 여기서 우리는 사실 그대로를 진술한다는 것의 의미를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사실을 과학적으로 실험한다는 것의 의미 또한. 그때 구경꾼인 우리의 마음속에는 잘난 의협심과 우월감이 깃들지 몰라도 사건 당사자의 마음에는 숨 막히는 답답함과 공포감이 들 수 있다. 마치 내가 긴장하여 힘을 줄수록 금이 가는 살얼음을 걸어가는 심정. ‘자세 똑바로 하고 앞을 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만 엉거주춤한 자세는 점점 우스꽝스러워질 뿐이다. 쩍쩍 갈라지는 발 밑 얼음에 비명도 나오지 않는다. 법적 싸움이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이유는 딴 것이 아니다. 내가 당연히 알고 있고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것을 증명해야 하고, 내가 하지도 않은 행위 또한 객관적으로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드라 또한 자신이 한 행위와 하지 않은 행위를 분명 알고 있다. 허나 증거가 빈약하다. 손 안의 사실이라 믿었던 것들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진술할수록 짙은 안개 같은 의혹에 휩싸인다.
6. 해부
이제 법정에서 해부되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피의자인 산드라이다. 그녀의 부부관계, 평소 행동과 아들의 사고, 심지어 성적 취향까지. 남편 또한 해부를 피해 가지 못한다. 남편은 아들의 사고로 인한 죄책감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았으며, 약을 복용 중이었고 교수직보다는 작가가 되길 원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유명작가가 된 부인에 질투심을 느꼈고 자기 비하로 이어졌다. 그래서 남편은 자살할 동기가 있었다고?
이쯤 되면 보는 이도 질리게 된다. 이제 사실을 찾는 서스펜스는 사라지고 영혼이 찢겨나가는 드라마만이 남았다. ‘진실 찾기’라는 미명하에 소외되는 인간성과 부서지는 가족. 날카로운 질문이 항상 현명한 해결책을 내놓지는 못한다. 명료하고 정확한 표현은 오히려 거짓에 가까울 수 있다. 최소한 꾸며진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영화가 중반부에 이르면 이 영화가 말하려는 바가 분명해진다. 이 영화는 우연한 사고를 시작으로 부부관계와 법정공방의 공통점을 보여준다. 법정에서는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라는 전제 아래 과도한 진실 찾기로 권력의 폭력을 잊는다. 부부는 ‘우리는 공평한 관계’라는 착각에 상대에게 나와 같은 희생을 강요하게 된다. 진실 찾기에도 피해자와 피의자에 대한 배려는 있어야 하며, 부부관계에서도 뭐든지 ‘공평하게 똑같이’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내가 이만큼 희생했으니 당신도 해야지라는 생각은 폭력이 될 수 있다. 또한 내가 당신 대신에 했으니 오히려 당신이 나에게 고마워해야 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은 관계를 녹슬게 한다. 누구 말이 옳은가? 관계의 회복에 이 질문보다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많다. 오히려 이 질문이 떠올랐다면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성과 논리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7. 우리 삶을 지탱하는 것
이제 엄마인 산드라는 자는 아들을 찾아가 절박한 심정을 고백한다.
이거 하나만 알아줘.
엄마는 괴물 같은 사람이 아니야.
법정에서 자기 방어용 변호를 할수록 손 안의 사실은 사라지고 발밑의 얼음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산드라는 스스로의 덫에 빠진 것 같다. 과연 그녀는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나의 삶의 일부가 누구에게도 들키기 싫은 치부가 ‘진실 찾기’라는 미명아래 전시된다. 고인이 된 남편은 소리친다.
난 외도를 겪은 남자야.
외도에 표절까지.
드라마는 절정을 향해가고 진실과는 더욱 멀어진다. 그때 우리 관객은 양가적 감정에 휘말린다. 이야기는 점점 흥미진진해지는데 구경꾼의 양심의 가책이 드는 것이다. 이 영화의 질문의 핵심은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까발리고 전시하고 알리면 그것은 진실에 가까워지고 우리를 거짓으로부터 보호할까?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사건의 당사자는 고통에 몸부림치고 구경꾼들은 안 볼 권리, 모를 권리를 박탈 당한채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된다. 이제 우리는 누구나 산드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서나 관찰당하고 찍히고 녹음당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명확한 증거는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니다.
때때로 혹은 자주 절대로 증명할 수 없는 것과 발화되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을 지탱한다. 가령 나를 쳐다보는 당신의 눈빛, 당신을 향해 뛰는 가슴. 조용한 포옹과 무심한 배려. 삶의 끈을 놓게 하는 것 또한 명확하고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날씨가 맑아서 당신의 웃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음악이 좋아서 그럴 수도 있다. 생명은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탄생하고 죽음은 불가해한 고통으로 찾아온다.
우리는 결국 모두 유약하고 위태로운 존재이다. 맞닿은 타인의 온기를 본능처럼 원하는. 법정의 결과를 듣고 집으로 돌아온 산드라는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든다. 그녀 옆에는 아들을 지켜주는 개 스눕이 있다.
추울 때 보면 더 추워지는 영화 아홉 번째!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떠오른 산문집!
이제 나는 열정적 포개짐보다 고요한 포옹이 좋다. 당신이 간직한 금이 혹시 나로 인해 부서지지 않도록 가만가만 다가서는 포옹이 좋다. 등과 등에 서로의 손바닥이 닿을 때, 가벼운 포개짐이 좋다. 고양이처럼 코끝으로 인사하며 시작하고 싶다. 끔찍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금 간 것을 계속 살피고 보호하려는 마음을 키우고 싶다. 어렵더라도.
-박연준 <고요한 포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