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씨가 염미정에게!
● 아래는 제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를 2차 정주행하고 뜬금없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픈 마음이 들어 구씨 심정으로 염미정에게 쓴 편지 글입니다. 그냥 재미로 봐주세요.
구씨가 염미정에게 보내는 편지
염미정!
편지 같은 거 쓰는 사람 아닌 거 알지. 내가 이런 걸 왜 쓰고 앉아 있나 싶다가도 네가 한 번 읽고 버릴지언정 한 번쯤은 꼭 닿았으면 싶어서 쓴다.
여긴 여전히 시끄럽고, 사람들은 여전히 복잡하고, 나는 여전히 구질구질한 구멍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다. 술 없이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던 그 지독한 날들. 그게 내 삶의 전부인 줄 알았다. 뭐,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겠냐마는
그래도 달라진 게 있다면 네가 보낸 그 시간들이 내 안에 박혀서 쉬이 빠지지 않는다는 거다. '추앙'. 네 입에서 나온 그 말은 마치 세상 전부를 덮고 있던 흙먼지를 걷어내는 바람 같았다.
내가 어떤 놈인지, 무슨 짓을 하고 살았는지, 너는 애써 묻지 않았지. 그냥, 묵묵히 네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게 나한테는 달빛처럼 느껴졌다. 밝은데, 뜨겁지 않고, 그래서 부담 없이 오래 볼 수 있는 거.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던 나한테는 네가 쉬는 공간이었고, 네가 쉬는 시간이었다.
벌써 연말이다. 여기저기서 술자리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은 한 해를 정리한다고 들떠 있거나 아쉬워하고 있지. 나한테 연말은 늘 시궁창 같은 시간이었다. 잃어버린 것, 망가진 것만 곱씹게 되는. 근데 올해는 좀 다르다. 네가 이 연말의 한 귀퉁이에 걸려 있어서 그런가?
네가 "채워진 적이 단 한번도 없어"라고 말했을 때, 나는 네가 불쌍하다기보다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아팠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흙바닥을 기어가고 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근데 너는 기어이 그 흙을 털고 일어나서 나한테 손을 내밀었지. 그 손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른다. 잡으면 나까지 진흙탕에 끌어들일까 봐.
겨울은 원래 이렇게 빨리 오는 건가? 네가 떠난 후에 계절이 훌쩍 넘어가는 속도가 유난히 빠르게 느껴진다. 매일 밤 네가 하던 말들을 되새긴다. 툭툭 던지듯 하던 네 말들이 이상하게도 나한테는 밥이나 술보다 더 든든했다.
네가 "저를 추앙해요" 했을 때 그게 나한테 무슨 의미였을까 한참을 생각했다. 누군가를 믿고, 따르고, 떠받드는 일. 나 같은 놈에게 누가 그런 일을 시켜줬겠냐? 나는 평생 누군가를 망가뜨리는 일에 더 익숙했던 사람인데.
요 며칠 밤에는 눈송이가 흩날렸다. 그 하얀 것들이 땅에 닿자마자 사라지는 걸 보면서 문득 우리가 보낸 짧은 시간들이 생각났다. 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모으려 하면 녹아버리는. 근데 희미하게라도 그 자국은 남지. 내 마음에 네가 그렇게 남았다.
내가 너한테 뭘 해줄 수 있었을까? 네가 원하는 건 '채움'이었는데, 나는 '버림'밖에 모르던 사람이다. 어쩌면 너는 나를 통해 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 구제불능의 깡패 같은 놈조차도 누군가를 추앙하는 일에 뛰어들게 만들 만큼 강하다는 걸.
나는 아직도 네가 나를 '해방'시켰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해방은커녕 네 생각 때문에 더 옭아매이는 기분이 들 때도 있으니까. 네가 없는 곳에서도 네 발소리가 들리고, 네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 이게 해방일 리는 없잖아.
근데 괜찮다. 그냥 네가 준 그 '일거리', '추앙'이라는 그 거대한 숙제 하나 붙잡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는 여전히 말이 없고, 퉁명스럽고, 어쩌면 다시 만난다 해도 네게 따뜻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해줄 거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네가 좋다. 그냥 네가 좋다기보다 네가 나한테 준 그 '추앙'의 감정이 좋다. 그게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정말 죽어버렸을지도. 아마 내 곁에는 녹색 소주병만 나뒹굴었겠지.
내가 나를 미워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나한테 네가 준 건 살 이유였어. 고맙다는 말은 안 할래. 내가 그런 걸로 빚지는 거 싫어하는 거 알지. 그냥, 네가 준 일이니까, 나는 이 일을 계속 할 거다.
염미정! 염미정! 염미정!
네 이름을 부르면 이제 절로 웃음이 나! 이 웃음소리가 너한테도 들렸으면 좋겠다.
세상이 깡소주처럼 쓰고 비릿하게 느껴지던 나에게 너를 추앙하는 일거리를 준 너에게
구씨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