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길버트 그레이프
개요 드라마 미국 118분
개봉 1994년 06월 11일
감독 라세 할스트롬 Lasse Hallstrom
1. Opening 오프닝
이 영화는 한적한 시골 도로에서 시작한다. 앳되어 보이는 얼굴의 소년 어니(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기다림에 지친 듯 형 길버트(조니 뎁)에게 묻는다.
"오긴 오는 거야?"
그것은 이 정체된 마을 엔도라에 오래도록 결핍되어 온 움직임과 생기, 어딘가로 향하는 가능성 전체를 향한 갈망처럼 울린다. 해맑아 보이지만 어딘가 헛 자란듯한 어니의 시선은 이곳에 없는 것들을 누구보다 정확히 알아본다. 어니를 바라보는 길버트의 눈빛에는 보호자의 책임과 피로가 동시에 스민다.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과 달리 해가 갈수록 업는 것조차 버거운 동생의 물리적 무게는 그의 얼굴에 무거운 슬픔을 드리운다.
곧 캠핑카들이 줄지어 나타난다. 어니는 신이 나 환호성을 지른다. 곧이어 길버트의 내레이션이 들린다.
"이맘때 캠핑족들을 보는 건 우리의 연례행사이다. 항상 떠날 수 있는 그들이 부럽다. "
‘길버트 그레이프’라는 이름은 한 개인의 호명이자 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족에게 남겨진 거대한 짐의 다른 이름이다. 500파운드(약 226kg) 넘는 몸으로 집 안에 고립된 어머니는 상실의 고통을 식욕으로 바꾸어 삼키며, 그 무게만큼 자식들의 삶을 눌러 앉힌다. 길버트는 무너져가는 가계도의 중심에서 기둥이 되기를 자처한 채, 조금씩 마모되어 간다. 그를 옥죄는 것은 타인의 시선보다도 대형 마트의 등장으로 생계마저 위태로워진 현실, 그리고 이곳을 끝내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조용하지만 확고한 공포이다.
익사하지 않기 위해 애쓰듯 하루를 견디는 길버트의 몸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가장 벗어나고 싶은 가족이라는 닻이다. 이 오프닝은 수평선을 가르는 타인의 자유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 남자의 고독을, 차갑도록 담백한 화면 속에 뜨겁게 응축해 보여준다. 움직이지 않는 마을과 떠나는 것들 사이에서 길버트의 삶은 이미 질문이 되고 영화는 그 질문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는다.
2. 우린 아무 데도 안 가 (We're not going anywhere.)
이 영화에서 위 대사는 여러 번 등장한다. 특히 해맑은 어니의 입을 통해 고장 난 LP 플레이어처럼 반복되어 발화될 때는 마치 길버트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암시이자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로 들리기도 한다. 어니는 언제나 높은 곳을 향해 기어오르며 추락의 위험을 몸으로 드러내지만 정작 말없이 가라앉고 있는 것은 매일 같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집의 붕괴를 떠받치는 길버트의 내면이다. 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그 집은 더 이상 가족을 보호하는 둥지가 아니다. 그것은 서서히 호흡하며 구성원들을 잠식하는 유기체에 가깝다. 거대한 몸으로 고립된 어머니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지하실에서는 오래된 먼지가 쏟아지고, 바닥과 벽은 낮은 비명을 토해낸다. 집이 보내는 이 신호들은 붕괴의 전조이지만 길버트는 그것을 외면한 채 위태로운 평온을 연기한다. 그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버티지만 곧 위기를 맞이한다. 이웃의 호의로 덧대어진 보강재는 잠시 그 균열을 가려준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가족이라는 정서적 굴레가 동시에 내뿜는 신음은 길버트의 청춘을 조용히 잠식한다. 그가 바라보던 지평선 너머의 세계는 점점 흐릿해지고, '아무 데도 안 간다'는 말은 결국 그의 삶을 정의하는 문장처럼 굳어간다. 머무름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가 되고 그 의무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정당화한다. 영화는 이 잔인한 고착 상태를 결코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3. 비극이 지옥이 되지 않으려면
이 영화가 도달하는 가장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지점은 떠남과 머무름 사이의 팽팽한 긴장을 사랑이라는 언어로 끝까지 견디려는 태도에 있다. 억눌린 욕망을 왜곡된 방식으로 분출하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이가 있는가 하면, 우연히 멈춰 선 이방인의 캠핑카 안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비춰보는 인물도 있다.
사실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느 집에서나 비슷한 냄새의 고통이 서려 있다. 중요한 것은 그 비극을 어떻게 다루느냐다. 상처를 덮어두는 것만으로는 그것이 일상을 잠식해 지옥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비극이 지옥이 되지 않게 하려면 더러워진 내 몸을 씻어내듯 비극의 매듭을 만져보고 하나씩 풀어나가야 한다. 삐걱대는 신음소리와 가슴을 짓누르는 한숨소리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는 세월의 삭풍에 녹슬기 마련이다. 그 녹슨 고리를 끊어내는 행위는 도망이 아니라 애도에 가깝다. 지금까지의 삶을 정성껏 바라보고, 붙잡아온 것들을 제대로 떠나보내는 일이다. 길버트는 어머니의 거대한 죽음을 정면으로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을 가두고 있던 집을 태운다. 그 불길은 파괴가 아니라 통과의식에 가깝다. 그리고 그제야 그는 새로운 지평선을 향해 타인의 허락이 아닌 자신의 발로 걸어 나갈 수 있게 된다. 영화는 말한다. 비극은 피할 수 없지만 그것을 지옥으로 만들지 않을 책임은 결국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
4. 연기라는 이름의 기적: 결핍을 응시하는 눈동자들
이 영화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중력은 단연 배우들의 연기에 있다. 촬영 당시 스물아홉의 조니 뎁과 극 중 어니와 같은 나이인 열여덟을 통과하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 두 청년 배우의 앙상블은 이 영화가 지닌 정서적 파고의 팔 할을 결정짓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팀 버튼의 <가위손>을 통해 신비롭고 이질적인 이미지를 구축했던 조니 뎁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고유한 아우라를 지워내는 역설적인 선택을 한다. 그가 연기한 길버트는 가족이라는 거대한 부채에 짓눌려 정작 자신의 욕망은 소외시킨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조니 뎁은 감정의 과잉을 철저히 배제한 채, 무심한 듯 툭 내던지는 시선과 서툰 몸짓만으로도 내면의 고독한 침전물을 섬세하게 길어 올린다. 특히 동생을 향한 지극한 애정과 자신을 갉아먹는 환경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의 눈동자는 보살핌이라는 이름의 헌신이 어떻게 한 인간을 마모시키는지를 서늘할 만큼 정확하게 포착해 낸다.
반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보여준 성취는 '연기'라는 단어만으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 어떤 기적에 가깝다. 아역 모델을 거쳐 <디스 보이스 라이프>에서 로버트 드니로라는 대배우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기량을 선보였던 그는 어니라는 복잡한 캐릭터를 통해 비범한 천재성을 증명한다. 손가락 끝의 미세한 떨림, 허공을 부유하는 시선, 그리고 갑작스럽게 폭발하는 순수한 감정의 파편들까지. 그는 지적 장애를 지닌 소년을 단순히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니라는 존재 그 자체가 되어 스크린 위를 유영한다. 대상에 대한 완벽한 몰입을 통해 캐릭터의 영혼을 통째로 이식받는 듯한 그의 메서드 연기는 이후 그가 걸어갈 찬란한 배우 인생의 거대한 예고편과도 같았다.
자유로운 이방인 베키를 연기한 줄리엣 루이스는 특유의 중성적이면서도 따스한 에너지를 불어넣으며 길버트의 굳어버린 세계에 균열을 낸다. 7년 후 <바스켓볼 다이어리>에서 디카프리오와 재회하기도 했던 그녀는 이 영화에서 '본다는 것'과 '머무른다는 것'의 의미를 일깨우는 구원자적 면모를 담백하게 그려냈다.
마지막으로, 거구의 어머니 보니 역을 맡아 극의 정서적 무게를 온몸으로 견뎌냈던 다렌 케이츠의 존재감 역시 잊을 수 없다.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난 그녀를 향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녀는 최고의 어머니였다."라고 헌사한 것처럼 그녀의 연기는 단지 육체적 무게감이 아니라 상실을 먹고 자란 인간의 근원적인 슬픔을 증명하며 이 영화의 비극을 완성했다.
5. 지독한 헌신이라는 이름의 연옥, 그 집을 태우고 나아가기
우리는 종종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소모되는 개인의 삶을 숭고한 미덕으로 착각한다. 길버트의 나날 역시 표면적으로는 헌신의 연속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기 소모에 가까운 체념과 식어 붙은 냉소가 고여 있다. 그는 삶을 저당 잡힌 채 방 안에 갇힌 어머니를 ‘뭍으로 밀려 올라온 고래’라 부르고, 안부를 묻는 이에게는 무심하게 ‘여전히 뚱뚱하다’고 답한다. 그 말들 속에는 사랑과 혐오, 연민과 분노가 뒤엉킨 채 더 이상 말로 풀어낼 수 없게 굳어버린 감정의 잔해가 남아 있다. 돌봄이 곧 사랑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인간을 냉소의 껍질 안에 가두고, 자신이 지녔던 빛과 감각을 조금씩 마모시킨다. 길버트는 베키라는 이질적인 시선을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깊은 곳에서 숨을 죽인 채 가라앉아 있었는지를 자각한다.
이 영화가 끝내 남기는 울림은 비극을 부정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영화는 고통을 넘어서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대신 고통의 중심을 외면하지 않고 통과하는 용기를 묻는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길버트가 집을 불태우는 장면은 과거를 지워버리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결핍을 채우느라 미뤄두었던 자기 삶을 되찾는 선언이며, 죽음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었던 어머니에게 바치는 가장 잔혹하면서도 정직한 애도이다. 불길은 파괴이자 정화이고, 동시에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단호한 약속이다.
이 영화의 원제는 'What's Eating Gilbert Grape (무엇이 길버트를 갉아먹는가)'이며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역설적으로 그를 지탱해 온 가족 그 자체였다. 그러나 영화는 그 사실을 고발로 끝내지 않는다. 굴레가 끊어진 자리에 허무 대신 가능성을 남긴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으로든 살아갈 수 있다는 열려 있는 시간이다. 떠남이 머무름보다 숭고하게 다가오는 것은 길버트가 충분히 고통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삶을 문장의 목적어가 아니라 주어로 발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타버린 집 뒤로 남은 것은 폐허가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는 한 인간의 호흡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 첫 숨을 마침내 조용히 지켜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