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
개요 애니메이션 일본 91분
개봉 2007년 12월 12일
감독 곤 사토시 こんさとし
1. Opening 오프닝
이 영화는 눈 오는 도쿄거리 속 한 교회에서 시작한다. 목사의 성탄절 예배에 이러쿵저러쿵 불만을 표시하는 긴. 그는 현재는 영락없는 부랑자에 지저분한 노숙자이지만 그도 한때 빛나던 시기가 있었다. 그리고 시끄러운 그에게 면박을 주는 화려한 장신구에 두꺼운 화장을 한 하나가 있다. 그, 아니 그녀는 트랜스젠더로 '하나님의 완전한 실수'라는 말로 정체성을 대신한다. 그리고 근처 빌딩 옥상위, 거리 아래로 혐오를 담아 침을 몰래 내뱉는 가출소녀 미유키가 있다. 감독을 이들을 크리스마스이브의 신주쿠 한복판에 세운다. 네온사인과 캐럴이 범람하는 도시의 욕망과 사람들의 희망이 가장 적극적으로 자신을 과시하는 무대 옆에서 세 사람은 도시의 그림자처럼 웅크려 있다. 무대 위에서는 ‘구원’이 노래되지만 무대 아래에서는 폐기물 더미를 뒤지는 손길만이 반복된다. 이 극단적인 대비는 성탄이 약속하는 축복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닿지 않는지를 냉정하게 드러낸다. 그 틈에서 종이상자 사이로 발견되는 갓난아이 키요코는 신성한 기적이라기보다 화려한 도시가 무심히 배출한 작은 오류처럼 보인다. 빛의 축제 한복판에서 가장 어두운 곳에 놓인 생명. 이 순간 영화는 조용히 말한다. 구원은 위에서 내려오는 선물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게 떠 안겨지는 책임이라고.
2. 유기된 아기와 세 명의 부랑자
겨우 추운 바람만 막아주는 골판지 집에 유기된 아기를 데려온 세 사람. 이기의 울음소리는 단순한 구조 신호가 아니라 이들이 외면해 온 과거를 정면으로 호출하는 소리가 된다. 긴은 한때 꾸렸던 가정과 자식의 얼굴을 더듬듯 떠올리며 술과 허세 뒤에 숨겨 두었던 상실을 마침내 말로 꺼낸다. 미유키는 예기치 않게 맞닥뜨린 생명의 온기 앞에서 부모를 향한 증오와 그럼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리고 하나는 여자로서 혹은 엄마로서 작고 여린 생명체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내일은 꼭 경찰서에 데려가겠다 약속한다.
이 아기를 매개로 세 사람의 일상은 도미노처럼 연쇄되는 우연과 필연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간다. 단지 친모를 찾아주겠다는 소박한 의도는 이들을 야쿠자와 킬러, 죽음을 눈앞에 둔 노숙자, 불법 체류 노동자와 퀴어 공동체의 세계로 차례차례 밀어 넣는다. 곤 사토시 감독은 이 기상천외한 여정을 통해 대도시 도쿄가 애써 덮어두었던 균열과 그 속살을 한 겹씩 드러낸다. 사회적 안전망 밖으로 밀려나 멸시받고 잊힌 존재들이야말로 누구보다 강렬하게 소속과 안식처를 갈구하고 있다는 역설. 이 영화가 말하는 ‘기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계시가 아니다. 그것은 불안정한 실존들이 서로의 체온을 잠시나마 붙잡는 순간, 아주 낮은 확률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서늘하지만 거짓 없는 그 현실성이야말로 이 영화가 끝까지 놓지 않는 기적의 얼굴이다.
3. 우연과 운명 그리고 후회
영화의 표면적 추진력은 세 인물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의 소동극에 가깝다. 그러나 서사의 심층을 끝까지 밀어 올리는 힘은 작위적이라 느껴질 만큼 집요하게 배치된 우연의 연쇄에서 발생한다. 하나가 아기에게 부여한 ‘키요코(淸子)’라는 이름이 공교롭게도 긴의 딸의 이름과 겹치고, 차밑에 깔릴뻔한 남자의 사위가 하필 긴이 경륜선수시절 승부조작을 제안한 남자라는 설정은 고전적인 인과율로는 설명되지 않는 과잉된 나비효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무리한 연결들이 끝내 허술한 장치로 전락하지 않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 우연의 매 지점마다 인물들의 삶 속에 켜켜이 침전돼 있던 감정이 폭발하듯 떠오르기 때문이다. 곤 사토시 감독에게 우연은 사건을 굴리는 톱니가 아니라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후회를 표면으로 끌어올리는 촉매제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우연은 놀랍지만 가볍지 않고 기이하지만 공허하지 않다. 에피소드 사이의 이음새가 개연성의 문법을 벗어날수록 관객은 오히려 개인의 선택을 넘어서는 운명이라는 거대한 힘을 응시하게 된다. 모두가 축복의 빛 아래 있는 듯 보이는 성탄의 밤, 철저히 배제된 이들이 자신의 과오와 정면으로 마주하며 통과하는 이 여정은 ‘우연’을 서서히 ‘숙명’으로 변환시킨다. 세 사람의 상처는 각기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 가장 깊은 바닥에는 공통된 감정이 흐른다.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더 집요해지는 후회이다. 이 막다른 골목에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 연민도 값싼 속죄도 아닌 자리에서 감독은 논리나 교훈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설명되지 않기에 더욱 절실한 기적의 손을, 아주 낮은 자세로 조심스럽게 내민다. 그것은 믿음을 요구하지 않는 위로이며 후회를 끌어안은 채로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인간에게만 허락되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에 가깝다.
4. 기적의 의미와 아기 울음소리
이 영화의 청각적 풍경을 지배하는 것은 단연코 아기의 울음소리이다. 유기된 아기가 서사의 중심이라는 설정을 감안하더라도 이 울음은 단순한 생리적 반응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장면마다 의미의 밀도를 달리하며 하나의 상징으로 확장된다. 때로는 파국을 예고하는 경보처럼 날카롭게 공간을 가르고, 때로는 비루한 현실의 표면을 뚫고 솟아오르는 생의 박동으로 화면 전체를 진동시킨다.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이미 냉담해질 대로 냉담해진 세계에도 아직 성스러운 가능성이 남아 있음을 알리는 종소리처럼 들린다. 곤 사토시 감독은 가늘고 연약한 소리를 통해 노숙자라는 이름 아래 사회의 바깥으로 밀려난 인물들 안에 잠들어 있던 근원적인 생명력을 다시 호출한다. 이때 울음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그들을 끝내 살아 있게 만드는 소리로 기능한다.
우리 내면에도 분명 아기의 첫 울음소리가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태초의 우렁찬 울음으로 자신의 탄생을 알리며 태어난 존재들이니까. 그래서 고요하던 내면에서 문득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면 우리는 마땅히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생의 위기를 알리는 비상벨인지 생동하는 삶의 박동인지 아니면 기적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천상의 종소리인지 알려면 말이다.
어쩌면 기적이란 이 성탄의 계절 어딘가에서 아기가 울고 있다는 그 자명한 사실 자체일지도 모른다. 혹은 무너진 삶의 균열 사이로 자신이 여전히 숨 쉬고 있음을 자각하게 하는 그 미세한 기척일 수도 있다. 곤 사토시 감독은 그 소리를 빌려 단언한다. 구원은 먼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이어지고 있는 박동과 울음 그 자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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