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비워야 비로소 부풀어 오르는 것들

영화 <업(Up)>

by 달빛바람

비워야 비로소 부풀어 오르는 것들: 흔들림의 기록


​2026년의 첫 태양이 솟았다. 사람들은 다시금 수평선 위로 고개를 드는 붉은 해를 향해 저마다 새해의 다짐을 띄워 보낼 자리를 잡고, 그 안에 결점 없는 계획들을 박제하려 애쓴다. 그러나 내게 새해는 설레는 설계의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시린 바닷바람 속에서 감당해야 했던 ‘서늘한 단절’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 5년을 함께하며 서로의 생을 담보 잡았던 연인과 포항 호미곶의 상생의 손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던 그해 첫날의 기억 말이다.
​당시 우리를 지탱한 것은 ‘완벽한 미래’라는 거창한 부채였다. 언젠가 바다가 보이는 집을 짓고, 타인의 부러움을 사는 삶을 살겠다는 약속들. 하지만 호미곶의 검푸른 파도가 발등을 적시던 그 새벽, 우리가 마주한 실체는 참담했다. 장엄한 일출 앞에서 정작 서로의 떨림조차 감싸줄 외투 한 자락 내어주지 못할 만큼 우리는 이미 서로에게 고갈되어 있었다. 찬란한 해는 오히려 우리의 파산을 극명하게 비췄다. 눈앞의 일출은 눈부셨으나 우리가 쌓아 올린 이상은 허상이었음을 깨달은 순간, 나는 더 이상 일출을 보며 성공을 점치지 않기로 했다. 나에게 새해란 무언가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고여 썩어가는 것들을 도려내는 '결별의 의식'이 되었다.


​이 비워내기의 사투는 영화 <업(Up)>의 노인 칼이 보여준 여정과 맞닿아 있다. 그는 아내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 전체에 수만 개의 풍선을 매달고 '파라다이스 폭포'를 향해 날아오른다. 집이라는 물리적 공간에 과거의 추억과 아내에 대한 집착, 그리고 '완벽해야만 했던 꿈'을 모조리 실어 나른다. 하지만 그가 마침내 도달한 목적지에서 발견한 것은 박제된 풍경이 아니었다. 아내의 낡은 앨범 속에 남겨진 마지막 메모, "나와의 모험은 즐거웠어. 이제 당신의 새로운 모험을 떠나."라는 문장이었다. 그 한 줄은 칼이 쥐고 있던 '어제의 이상'을 무너뜨리고 '오늘의 흔들림'으로 그를 돌려보내는 뜨거운 각성이었다.


​영화 후반, 칼은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 간직해 온 가구들을 창밖으로 던져버린다. 엘리와 함께 앉았던 낡은 소파, 추억이 깃든 장식장들이 허공으로 떨어질 때마다 비로소 집은 하늘 높이 솟구친다. 무거운 과거를 비워낼 때에야 생은 가벼워지고, 그는 비로소 정해진 궤도가 아닌 새로운 풍향을 향해 비행한다. 이상이 독이 되지 않으려면, 때로는 가장 소중히 여겼던 '꿈'조차 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영화는 칼의 텅 빈 거실을 통해 증명한다.


​2026년, 나의 새해 키워드는 '찬란함'이 아니다. 대신 나는 나의 '흔들렸던 순간들'을 기록하기로 한다. 우리가 매해 다짐하는 희망은 종종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우리를 수렁으로 끌어내린다.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 결점 없는 결과를 내야 한다는 욕심이 생의 본질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생명력은 도달해야 할 고정된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으로 향하며 겪는 불안한 진동과 곁에 선 이의 시린 손을 잡아주는 사소한 온기에 있다. 호미곶의 일출보다 절실했던 것은 흔들리는 발을 지탱해 주던 그 미미한 떨림이었을지도 모른다.


​올해도 나는 일출 산행 대신 집안을 정리하며 새해를 연다. 무릎이 늘어난 바지, 이가 빠진 머그컵, 그리고 서랍 깊숙이 고여 있던 케케묵은 미련들을 꺼내어 버린다. 새로 채우기 위해선 먼저 비워야 한다는 이 지독하고도 정직한 물리 법칙을 몸으로 써 내려간다.


비워진 자리에 무엇을 채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비어 있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라 비로소 무엇이든 시작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억지로 부풀려진 완벽이라는 허상을 기꺼이 덜어내려 한다. 매끄럽게 포장된 성공보다는 투박하게 깨지고 흔들리는 오늘의 나를 있는 그대로 통과하고 싶다. 삶은 정지된 사진 속 찬란함이 아니라 풍랑 속에서도 끝내 멈추지 않는 항해 그 자체라는 것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비워낸 무게만큼 가벼워진 마음은 역설적으로 더 뜨겁게 타오른다. 영화 속 칼 할아버지가 낡은 가구들을 던져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구름 위로 솟구쳤듯, 나를 짓누르던 어제의 미련들을 놓아주는 순간 생은 비로소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 가벼움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알 수 없으나 그 불확실함이야말로 내가 살아있다는 가장 뜨거운 증거가 될 것이다. 2026년, 나는 찬란한 결말을 기록하는 대신, 매 순간 격렬하게 흔들리면서도 끝내 나아갔던 발자국들의 정직한 기록자가 되려 한다. 비워내고 깎아낸 끝에 남은 이 담백한 진심이 나를 생각지도 못한 가장 뜨거운 모험의 심장부로 데려다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워야 비로소 부풀어 오르는 것들, 그것은 박제된 이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내 안에서 요동치는 생의 날것 그대로의 불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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