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그리고 혹한기 대비
아이들 어릴 적, 잠들기 전이면 꼭 동화책을 읽어 주곤 했다. 그 책들 사이에 「푸른 말코손바닥사슴」 이야기도 있었다.
동화 속 요리사 브레튼 씨는 유난히 추위를 탄다. 두꺼운 외투를 잔뜩 껴입고도 늘 춥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가 정말 두려워했던 건 바깥의 찬 공기보다, 마음속에 오래 맴도는 한 질문이었다.
내 음식은 정말 맛있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브레튼 씨의 조개 스프를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아오지만, 그는 좀처럼 확신하지 못한다. 칭찬을 듣고 싶으면서도 묻기가 겁나고, 손님들이 웃으며 인사를 나누어도 금세 불안이 고개를 든다. 손님이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떠나면, 그의 마음은 다시 추운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던 어느 날, 푸른 말코손바닥사슴이 나타나면서 브레튼 씨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듣게 된다.
“정말 맛있어요.”
“우린 이 음식을 먹으려고 몇 마일씩 걸어와요.”
그 말들이 브레튼 씨에게 닿는 순간, 이상하게도 몸이 덜 춥다고 느낀다. 두꺼운 겉옷을 벗고도 그는 말한다.
“이번 겨울은 정말 따뜻할 것 같아.”
그날 브레튼 씨가 덜 춥게 느낀 건 따뜻한 온기 때문이 아니라, 인정해 준 마음 덕분이었다. 동화 속 ‘추위’는 결국 몸의 추위가 아니라, 누군가의 진심을 기다리며 오래 홀로 버틴 마음의 추위였다.
우리 삶의 주기를 사계절로 본다면, 노년기는 겨울에 가깝다. 특히 고령사회에서의 노년은 누구에게나 조금 더 매서운 바람이 부는 혹한기일지 모른다. 사회적 역할이 줄어들고, “내가 아직 쓸모 있는 사람인가”를 확인할 기회가 줄어들수록 마음은 쉽게 식는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노년기에도 인정 욕구는 사치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충족되어야 할 기본 장치라고.
나는 가끔, 해야 할 일이 줄어들어 편해졌는데도 이상하게 더 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잘하고 있다”는 격려의 말을 들으면 하루가 더 활기차고 따뜻해진다. 결국 우리는 살아가면서 타인의 반응을 통해 나를 확인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 사이를 조율하면서 자신을 조금씩 다듬고 성장시킨다. 그런데 그 과정이 끊기면 사람은 금세 흔들린다.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서 앞집 할머니를 만난 적이 있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할머니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날씨도 추운데 … 다들 잘 지내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어르신은 어떻게 지내셨어요?”
“귀가 잘 안 들려서 무슨 말하는지도 잘 몰라요”
그 짧은 대화가 끝나고도, 할머니는 내내 내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인 채 서 있었다. 마치 그 몇 마디가 오늘의 인사를 다 해낸 것 같았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야 서로가 건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하루의 체온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 혼자 사는 어르신들의 경우, 다정한 말 한마디와 긍정적인 피드백은 자아를 건강하게 붙들어 준다. 이를테면 이름을 불러 주는 전화 한 통, “밥은 드셨어요?” 하고 안부를 묻는 짧은 대화가 그렇다.
“오늘도 잘 지내셨어요?”
“늘 편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림이 참 따뜻하네요.”
대단한 말이 아니어도, 그 한마디 한마디는 누군가가 하루를 버틸 수 있게 해 주는 귀한 마음이 된다.
노년은 ‘앞으로’가 아니라 ‘지나온 시간’이 더 많이 떠오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살아온 삶을 스스로 정리해 보는 시간이 필요해진다. 나는 그것이 결국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나”를 따뜻하게 돌아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주변에서 자신의 삶을 인정해 주면, 마음은 그 정리를 조금 더 쉽게 해낸다. “참 잘 살아오셨어요”라는 말 한마디가 지난날의 굴곡을 ‘가치 있는 경험’으로 묶어 준다. 반대로 소외가 반복되면 마음은 자꾸만 작아진다. 허무와 후회가 커지고, 어떤 날은 절망이 더 가까이하기도 한다. 겨울이 더 차갑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깥의 온도보다, 마음이 비어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팔순이 넘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붓을 든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인정이 사람을 얼마나 오래 움직이게 하는지 새삼 알게 된다.
엄마는 한때 시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시는 누군가에게 선뜻 보여 주기가 어려웠고, 이해받는 경험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쓰고 싶던 마음이 조금씩 사그라들었고, 결국 엄마는 “나는 시랑 맞지 않아”라고 스스로를 접어 버렸다.
그런데 그림은 달랐다. 누구에게나 꺼내 보여 줄 수 있었고, 반응이 금방 돌아왔다.
“예쁘다.”
“멋지다.”
“다음 그림도 보고 싶다.”
그 말들이 엄마를 다시 책상 앞으로 데려왔다. 엄마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재능 때문만이 아니라, 돌아오는 따스한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지금도 즐겁게, 꾸준히 그린다.
엄마가 그랬고, 브레튼 씨가 그랬듯. 인정을 받고 소외되지 않으며 관계 속에서 연결감을 느끼게 되면, 혹한기조차 춥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어떤 겨울은 바깥이 아니라 마음에서 풀린다. 그리고 우리가 건네는 다정한 한마디는 누군가의 겨울을 덜 춥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혹한기’를 대비하는 일은 장작과 난로를 준비하듯 몸과 돈의 기본 체력을 차곡차곡 쌓아 두는 일, 동시에 스스로를 인정하는 기술을 익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을 말로 건네는 습관을 들이는 일이다. 오늘의 고마움과 응원을 미루지 않고 표현하는 것.
그 작은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겨울을 견디게 하는 온기가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