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이란>
영화라는 거대한 환상은 언제나 가장 비루한 물리적 현실 위에 세워진다. 스태프로 일하던 시절, 내가 처음 배운 영화의 진실은 스크린의 찬란함이 아니라 현장의 냉기였다. 1월의 새벽, 촬영장은 예술의 성지라기보다 수많은 명령과 고성이 오가는 생존의 현장이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 속으로 얼음이 스며들었고, 바닥에 고인 성에 위로는 사람들의 체온과 욕설, 장비의 진동이 뒤섞여 흘렀다.
거대한 조명은 태양처럼 타올랐지만, 그 열은 언제나 프레임 안으로만 향했다. 카메라 뒤편, 가장 낮은 자리에서 뛰어다니던 스태프의 손끝까지는 좀처럼 닿지 않았다. 주택가 골목을 점거한 촬영 소음, 밤을 찢는 조명 때문에 잠을 설쳤다는 이웃들의 고성, 경찰을 부르겠다는 협박까지—그 모든 우연한 충돌의 책임은 어김없이 말단 스태프의 몫이었다. 감독도, 배우도 아닌 내가 그 사이를 오가며 고개를 숙일 때마다 영화라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은 촬영일자의 숫자로 몸으로 각인되었다. 그 간극은 나의 궁핍과 맞물리며 더 선명해졌다. 헐값에 산 잠바는 이미 제 기능을 잃어 바람이 그대로 살을 베어냈다. 현장에서 비싼 브랜드의 파카를 입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것이 사치가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 장비라는 사실이 서러웠다. 촬영 중 부러진 안경다리는 검은 테이프로 감아 버텼고, 그 탓에 세상은 늘 조금씩 어긋나 보였다. 휴대전화에는 밀린 월세를 묻는 문자가 쌓였고, 나는 컷과 컷 사이에서 알림을 지우며 다시 뛰었다.
이 물질적 결핍은 자연스레 자격지심으로 이어졌다. 누군가는 예술을 말하고 미래를 논했지만 나는 오늘을 넘길 수 있을지를 계산했다. 스태프라는 이름 뒤에 숨은 무력감 속에서 누군가에게라도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은 점점 커졌다. 그것은 허영이 아니라 촬영일자와 콜타임에 휘둘리는 삶을 간신히 붙들어 매던 생존의 끈이었다.
이 감정의 결은 영화 〈파이란〉의 강재와 맞닿아 있다. 강재가 용식을 대신해 자수를 택하려는 이유는 의리라는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밑바닥 인생이 품은 자격지심이 있다. 형을 살고 나오면 번듯한 ‘자리’ 하나쯤은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인정에 대한 욕구.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기대보다 잔인하다. 그의 하루는 조직의 간부석이 아니라 동네 오락실에서 늙은 사장의 동전이나 빼앗으며 연명한다. 또한 나이 어린 새파란 조직 막내들조차 그를 사람으로 대하지 않는다.
바로 그때, 운명처럼 이름도 몰랐던 아내의 부고소식이 도착한다. 이 영화는 극적인 구원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한 남자가 우연한 여행의 끝에서 처음으로 인간으로 호명되는 순간을 조용히 보여준다. 파이란의 편지에서 그녀는 강재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연민 대신, 그를 남편으로, 하나의 존재로 정확히 부른다. 조직에서도 사회에서도 밀려났던 그는 그 편지 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체온으로 호명된다. 그래서 파이란은, 손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아내이지만 강재에게는 사랑보다 먼저 도착한 증거가 된다. 자신의 삶이 전부 헛된 것은 아니었으며 누군가에게 잠시나마 기댈 수 있었던 존재였다는 증거. 그래서 강재의 변화는 구원을 향한 결단이 아니라 파이란의 시신을 수습해야 했던 우연한 여행으로 시작된다. 그는 후배 경수와 함께 강원도 대진항 일대로 향한다. 꿈에도 예정되어 있지 않았던 길. 그 우연한 여행의 끝에서 강재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삶에 도착한 사람이 된다. 그것은 삶을 바꾸는 거창한 선택이 아니라 너무 늦게 도착한 책임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우연한 여행이 있었다. 주연배우의 스케줄 변경으로 예상치 못한 나흘의 공백이 생겼고, 친하게 지내던 촬영감독의 제안으로 제주로 향하게 되었다. 알고 보니 여행이라기보다 다음 작품을 위한 로케이션 헌팅이었지만. 숨 돌릴 틈조차 없던 내게는 정말 달콜한 휴식이 되었다. 제주 바닷바람은 차가웠지만, 현장이 아닌 호텔에서 본 촬영감독님은 엄하고 어려운 상사가 아니라 친근한 형의 모습에 가까웠다. 술기운에 용기를 내어 요즘 쓰고 있는 글을 보여드렸다. 다시 서울로 복귀하던 날 아침, 문 앞에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핫팩 열 박스와 손바닥만 한 쪽지가 들어 있었다.
“항상 고생 많다. 네가 쓴 글들을 봤다. 너는 분명 좋은 작가가 될 거다.”
테이프로 고정된 안경 너머로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쌓여온 무시와 피로, 경제적 비참함으로 곪아 있던 자격지심이 ‘인정’이라는 단어 하나로 터져버린 순간이었다. 제주의 칼바람도, 얇은 잠바도 그때만큼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연히 떠나온 여행지에서, 우연히 도착한 문장 하나가 내 존재를 다시 세우고 있었다.
글을 쓰게 만드는 힘은 막연한 열정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정확히 마주하는 데서 나온다. 강재가 대진항에서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무너진 것은 마음이 약해서가 아니라 우연한 여행 끝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비루함을 정면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 쪽지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내가 왜 그토록 타인의 시선에 목말라 있었는지를. 인정은 거창한 상이나 직함이 아니었다. 가장 추운 자리에서 우연히 건네진, 정확한 문장 한 줄이면 충분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혹한의 현장을 전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글을 쓴다. 그것은 과거를 미화하기 위해서도, 상처를 과장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몸으로 배운 감각들이 여전히 나의 문장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스크린 앞이 아니라 교실과 책상 앞에서 나는 다시 문장을 고른다. 자격지심을 밀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똑바로 보기 위해서.
지금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살아간다. 촬영장은 교실로 바뀌었고, 콜타임은 시간표로 대체되었다. 물리적 가난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월세 독촉 알림에 잠을 설칠 일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 시절의 감각은 여전히 몸 어딘가에 남아 문장을 쓸 때마다 조용히 고개를 든다.
삶의 가치는 언제나 계획된 자리에서가 아니라 이렇게 우연히 떠난 여행의 끝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나는 이제 그 사실을 안다. 그리고 그 우연한 여행들이 여전히 나를 다음 문장으로 데려간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