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싸구려 감정은 없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by 달빛바람

싸구려 감정은 없다
― 감정 쓰레기 통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한때 부모와 담을 쌓고 살았다. 며칠쯤 말을 섞지 않는 일은 사춘기라면 으레 있는 일이라고 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침묵은 두 달을 넘겼고, 집 안의 공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엄마는 답답함에 눈물을 흘렸고, 아빠는 술에 취해 고성을 질렀다. 때로는 물리적인 폭력으로 그 분노를 처리했다. 말이 없던 나의 침묵은 결국 더 큰 소리와 상처를 불러왔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정확한 이유를 말할 수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분노를 일으켰는지, 왜 그렇게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었는지 설명할 언어를 갖고 있지 못했다. 다만 분명했던 것은 분노의 대상이 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학교 교문 앞에 서 있던 주임 교사와 선도부 선배들,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뺨을 때리고, 교복이 단정하지 않다며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발로 차던 그 폭력적인 질서. 술만 마시면 집 안을 전쟁터로 만드는 아빠와 그 모든 상황을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감내하던 엄마. 이미 집을 떠나 몇 년째 돌아오지 않던 누나까지. 그 어느 하나도 분노하지 않기 어려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분노가 점점 외부를 향하지 않고, 나 자신을 삼키기 시작했다는 데 있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건네는 친절한 말, 위로의 말, 심지어 진심 어린 말까지도 모두 가식처럼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나에게 싸구려 감정처럼 보였다. 진짜 아픔 앞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는 값싼 동정과 위선이라고 단정해버렸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감정을 의심하는 동시에, 내 감정마저 믿지 않게 되었다.
그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하나의 ‘감정 쓰레기 통’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분노, 혐오, 체념, 냉소를 구분하지 않은 채 모두 안으로 쓸어 담았고, 그 안에 무엇이 쌓이고 있는지 들여다볼 용기도 없었다. 대신 나는 침묵했고, 관계를 끊었으며,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고, 나 역시 누구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됐다.


시간이 흘러, 한 여인과 함께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었다. 이미 한 번 보았던 작품이었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전혀 다른 영화처럼 다가왔다. 장애를 가진 여성과 대학생 청년이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국 서로의 삶으로부터 어긋나게 멀어지는 이야기. 줄거리만 놓고 보면 특별할 것 없는 멜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랑의 시작보다 사랑이 끝난 이후의 얼굴을 끝까지 따라간다.


영화 속에서 조제는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아온 인물이다. 그녀의 세계는 제한적이고, 안전하며, 동시에 폐쇄적이다. 츠네오는 그런 조제의 세계로 들어온 외부인이다. 그는 조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점점 부담이 되고, 책임이 되고, 결국 도망치고 싶은 무게로 변해간다. 영화는 이 과정을 미화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악인이 되지도, 누군가가 완벽한 피해자가 되지도 않는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담담히 보여준다.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이별을 예감하는 조제가 바다를 상상하는 순간이다. 그녀는 자신이 다시는 육지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것은 절망이면서도 체념이고, 동시에 스스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가깝다. 반면 츠네오는 다른 여자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아직 떠날 준비가 되지 않았고, 자신의 비겁함을 마주할 언어도 갖고 있지 않다. 한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고, 한 사람은 제자리에 멈춘다. 그 미묘한 시간차가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그 영화를 보며 나는 나 자신의 동굴을 다시 떠올렸다. 사랑에도, 연애에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시절의 나. 이별을 예감하는 사랑은 가짜라고, 끝을 생각하는 감정은 이미 변질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관계가 흔들릴 때마다 더 침묵했고, 더 무표정해졌으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성숙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한 여인과의 이별은 그 착각을 무너뜨렸다. 헤어지던 날, 그녀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오빠가 화를 내고 소리라도 질러줬으면 이렇게 질리고 숨 막히지는 않았을 거야.”


그 말은 오래도록 나를 괴롭혔다. 나는 상대를 존중한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내 감정을 처리할 능력이 없었던 것에 불과했다. 나는 상처 주지 않기 위해 침묵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무너질까 봐 도망친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가 동굴 안에서 나 자신을 감정 쓰레기 통으로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분노도, 슬픔도, 두려움도 모두 더럽고 치워야 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것들을 이름 붙이지 않고, 말하지 않고, 끝내 나 자신에게서도 분리해 버렸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깨끗이 보내는 마음이란, 내가 쏟아부은 열의와 진심만을 기준으로 관계를 재단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그 시간 동안 받았던 온기, 기쁨, 그리고 서로 달라져버린 마음까지 함께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을. 애초에 싸구려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감정 쓰레기라는 말은 내가 나 자신을 옥죄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그 원인에게 붙인 가장 잔인한 이름일 뿐이다.


사랑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영원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유한하고, 변하고,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 때문에 더 선명해진다. 단 한순간이라도 타인의 세계를 온전히 경험하고, 그를 통해 내 안의 동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힘. 그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성장의 불씨를 얻는다. 연애가 위대해지는 지점은 바로 거기에 있다.


조제가 바닷속 바닥에서 나와 호랑이를 쳐다보듯, 우리 역시 감정을 버릴 대상이 아니라 통과해야 할 시간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울며 멈추는 사람과, 울음을 삼키며 움직이는 사람. 그 차이가 시간을 바꾸고,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꾼다. 나는 이제 감정을 억누르지 않는다. 참아낸다고 사라지는 것은 없고, 침묵이 성숙의 다른 이름도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 감정이 왜 지금 이 얼굴로 나를 찾아왔는지 묻고, 끝까지 듣는다. 버려야 할 감정은 없다. 치워야 할 쓰레기도 없다. 감정을 더럽다고 부르던 순간부터, 나는 나 자신을 먼저 훼손해 왔다는 사실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동굴 안에 마음을 쌓아두지 않는다. 이것이 내가 나를 감정 쓰레기 통으로 살게 하지 않기 위해 도달한 최소한의 성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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